Archive for October 7th, 2016

October 7, 2016: 11:45 am: bluemosesErudition

마음대로 행동한 것이 타인에게 불편이나 불쾌감을 주었다면 스스로에게 상식선을 넘은 권한을 부여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것은 지나친 ‘자부심’이 가져온 ‘낭패’이자 ‘실패’다. 그것은 자신의 소유(돈, 권력, 지식, 미모, 지위, 권한, 식견, 완력, 심미안, 귀하고 특이한 물건 등, 스스로 ‘가졌다’고 생각하는 모두를 포함)에 대해 성찰하지 않고, 그것을 부려 씀으로써 ‘우월감 놀이’를 즐기려던 이의 명백한 오만이다. 언제 어디서든 그 사람의 인격이 말과 행동이 되어, 자신의 신체로 흘러넘치고 있다는 것을 자각해야 한다.

『대학』에 나오는 ‘신독(愼獨)’이란 홀로 있을 때조차 도리에 맞게 행동하고 삼가라는 뜻을 담고 있다. 이 단어를 처음 알게 된 것은 고등학교 때 윤리 교과서를 통해서였다. ‘혼자 있을 때조차 조심해야 한다’는 표현은 드높은 수양의 경지를 보여주는 것 같아 존경스런 마음이 들었지만, 한편으로는 답답해서 도망치고 싶었던 기억이 있다. 하지만 나이가 들면서 알게 되었다. 모든 ‘연습’은 혼자 있을 때부터 시작된다는 것을. 마음의 태도나 언행조차 몸에 쌓는 훈련 없이는 아름답게 적절히 부려 쓸 수가 없다.

그렇다면 일상을 통해 삼가는 연습은 어떻게 해야 할까? 이것은 당연히 삼가고 조심하며 경계하는 표정이나 몸짓을 연습하라는 뜻이 아니다. 우리는 일상을 살아야지, 연기를 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마음과 태도에 대한 공부가 필요한 이유다. 내 기억에 마음을 가르치는 교과서는 없었다. 그렇다고 마음공부는 개인과 삶에 위임되었다고 말하는 건 정확치가 않다. 마음공부야말로 교육이 방치한 것 중의 하나라고 말해서 교육이 방관한 의무에 헌신해야 한다.

_ 최기숙, 연세대학교 국학연구원 HK교수

: 2:01 am: bluemosesErudition

“현존재는 이미 자신의 세계 안으로 던져진 채, 제 가능성을 향해 자신을 기투한다.”

: 1:46 am: bluemosesErudition

실존주의란 인간 존재와 인간적 현실의 의미를 그 구체적인 모습에서 다시 파악하고자 하는 사상운동이며, 실존주의 사상가들은 넓은 의미에서든 후설의 의미에서든 현상학을 방법으로 한다는 점, 그리고 ‘인간에게서 중요한 것은 실존이지 이성이라든가 인간성과 같은 보편적 본질이 아니다’라고 생각하는 점에서 공통적이다. 이 사상운동은 철학뿐만 아니라 정치 · 사상 · 예술 등의 영역에 걸쳐 있다.

실존이라는 개념은 19세기 중반의 덴마크 사상가 키르케고르(Søren Aabye Kierkegaard 1813-55)에서 유래하지만, 비합리적인 인간의 생과도 밀접하게 관계한다는 점에서 니체(Friedrich Wilhelm Nietzsche 1844-1900)도 실존주의의 선구적 사상가로 헤아려진다. 실존의 철학은 1930년대 초두에 야스퍼스가 제창하고 하이데거가 이에 속한다고 생각되었다. 독일의 실존사상이 프랑스의 마르셀과 사르트르, 메를로-퐁티에게 영향을 준다. 특히 사르트르가 제2차 대전 후에 마르셀이 명명한 <실존주의>를 표방함과 더불어 이 사상이 일세를 풍미하게 되었지만, 그 영향력은 1968년 5월 혁명을 경계로 급속하게 상실되며, 구조주의와 후기구조주의가 이를 대신하게 된다. 그러나 실존주의의 사상사적 의의를 생각해 보고자 한다면, 실존주의를 현상학 운동 속에 자리매김하여 이것을 실존적 현상학의 조류로서 고쳐 정의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이미 키르케고르의 작품에서 경험에 직접 주어지는 대로의 현상에 대한 기술적 탐구가 보인다. 사람들은 이것을 인간 실존에 대한 넓은 의미의 현상학(리쾨르의 용어를 빌리자면 ‘잠재적 현상학’)이라고 부를 수 있다. 마르셀의 방법도 이런 의미에서의 현상학이다. 후설이 창조한 현상학은 ‘사태 자체로’, 요컨대 사태의 본질을 지향하는 본질주의이지만, 하이데거가 존재 일반의 의미를 탐구하기 위한 통로인 현존재의 분석방법으로서 후설 현상학을 채용함으로써 현상학이 실존철학의 방법으로서 확립되게 되었다. 이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왜냐하면 현상학이란 “일체의 선입견을 배제하고 경험에 주어지는 대로의 구체적 사태로 되돌아가 모든 것을 다시 묻고자 하는 노력”인바, 이것이야말로 바로 실존의 기술적 탐구에 가장 걸맞은 방법이기 때문이다.

실존주의 사상가들은 인간에게 있어서는 실존이 본질에 선행한다고 생각한다. 이 경우 실존이라는 말은 인간의 현실존재, 진실존재를 의미한다. 확실히 본질 역시 존재이지만, 이것은 가능적 존재, 추상적 존재이다. ‘있다 · 이다’라고 해도 ‘삼각형이란 3개의 직선에 의해 둘러싸인 도형이다’라는 명제와 ‘여기에 연필로 그려진 삼각형이 있다’는 명제에서 그 의미가 다르다. 전자의 ‘이다’는 삼각형의 본질(essentia)을, 후자의 ‘있다’는 그 실존(existentia)을 의미한다. 본질이란 가능존재이며 현실존재와 구별된다. 본질은 초시간적 존재이나 실존은 시간적 존재이다.

본질과 실존, 가능존재와 현실존재는 ‘이어서 있는 자’인 신에게서 일치한다. 그렇다면 유한한 존재인 인간에게 있어 본질과 실존의 관계는 어떠한 것인가? 이 문제를 가장 예리하게 물어 밝힌 것이 키르케고르이다. 키르케고르는 셸링(Friedrich Wilhelm Joseph von Schelling 1775-1854)의 적극철학에서 차용한 실존 개념을 인간 존재에 한정하여 사용한다. 즉 인간 존재에게 있어서는 그 본질이 전적으로 미확정인 바, 현실존재만이 주어져 있다. 인간은 신에 의해서 창조된 존재이고 신과 인간 사이에는 절대적인 단절이 놓여 있어 신이 어떠한 본질을 인간에게 주었는지는 인간 이성에게는 파악될 수 없다. 따라서 인간은 자기가 무엇인지, 무엇이어야만 하는지를 알지 못한 채 그저 현실에 존재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한 것은 각 사람이 스스로의 결단에 의해 선택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존재하는 것의 의미를 찾아내지 못한 채 이 세계에 유기되어 있는 인간, 자기의 존재의미를 스스로의 결단에 의해 창조해내도록 운명지어져 있는 인간, 자기의 신체에 의해 이 세계에 내던져져 있으면서 타자와의 교통 속에서 자기의 있어야만 할 인생을 지향하여 기투해가는 인간, 이러한 실존주의의 인간상은 이미 키르케고르와 니체가 제시하고 있다. 하이데거는 특히 키르케고르의 영향 하에 현상학을 방법으로 하는 현존재 분석의 저서 『존재와 시간』을 발표하며, 이것이 실존철학의 고전으로서 취급되게 되었다.

실존주의 사상가들은 인간의 구체적인 삶을 현상학적으로 기술하면서 인간 존재에 대한 형이상학적 탐구를 시도하고 있다. 특히 실존적 자유, 자기의 신체, 타자의 존재와 같은 문제 영역은 실존적 현상학에 의해 비로소 본격적으로 열어젖혀졌던 것이다.

_ 하코이시 마사유키(箱石匡行)

: 12:17 am: bluemosesErudition

“‘궁정식 사랑’이란 말은 콜레주 드 프랑스의 중세 문학 교수를 지낸 가스통 파리스(Gaston Paris, 1839-1903)가 크레티앵 드 트루아의 로망 <죄수 마차를 탄 기사 란슬롯>(1883)에 관해 쓴 논문에서 처음 사용한 말이다. 중세 음유시인들은 이런 사랑을 ‘참된 사랑(verai amors)’, ‘순수한 사랑(fin’amors)’이라 불렀다.”

“다이앤 애커먼은 <천개의 사랑>에서 궁정풍 연애의 진수는 오래 지속되는 설렘, 즉 간절한 열망으로 인한 일종의 황홀한 떨림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