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육신의 소욕과 결별 : 아브라함은 이스마엘을 포기했다.
2. 성령의 소욕에 순종 : 아브라함은 이삭또한 내려놓았다.
축복에 대해 자유로운 삶.
1. 육신의 소욕과 결별 : 아브라함은 이스마엘을 포기했다.
2. 성령의 소욕에 순종 : 아브라함은 이삭또한 내려놓았다.
축복에 대해 자유로운 삶.
32.5 times cost : “Good is the enemy of great.”
1,000원에서 40원이 모자란 헌신. 그 대가로 1,300원의 비용을 지불했다.
L. I. V.(Low Information Voter)를 극복하면 민주주의 사회는 개선되는가. 아니다. 학자적 오류에 갇혀 있는 그들의 “믿음”과 달리 대중은 결코 바보가 아니다. 설령 충분한 정보가 공유된다 한들 TK 지역의 정치적 후견주의를 방지할 수 있겠는가. By no means! 문제는 계몽이 아닌 윤리에 있다. 인간은 과연 정의로운가. 대중의 자기보호를 염두에 둔다면, 사회정의는 필연 생계의 안정 이후에나 기대할 수 있는 무엇이다. 다시 말해, 정의롭기에 풍요로운 것이 아니라 풍요롭기에 정의로운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가라타니 고진의 언급은 거듭 되새길 필요가 있다. “경제 없는 윤리는 공허하고, 윤리 없는 경제는 맹목적이다.”
“공리주의적인 사고방식에서 행위는 신체적 욕구나 타자의 욕망에 따라 규정되는 것이므로 자유가 아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순수하게 자발적이라는 의미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까. 사실 그것은 불가능하다. 내가 자유롭게 선택했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도 실제로는 의식하지 못한 여러 요인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그것은 자율적이 아니라 타율적이다. 가령 자유로운 사회라고 불리는 곳에서 사람들이 자유롭게 행동하는 것같이 보여도 실제로는 다양한 교육이나 선전 등에 의해 주입된 욕망을 충족하고 있을 뿐이다. 자유롭게 생각한다고 해도 결국은 이미 알려진 패턴을 덧쓰고 있을 뿐이다. 정말로 자유로운 행위나 자유로운 주체가 있을 수 있을까? 결론적으로 없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원인에 의해 규정되지 않는 행위나 주체는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결국 언제나 이미 무언가를 따르고 있다. 그렇다면 무엇을 좇아야 자유로울 수 있는가? 그것은 ‘자유로워지라’는 명령 혹은 의무이다. 물론 “실제로는 자유로운 주체라는 것은 없다. 구조주의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주체는 항상 상상적인 존재에 지나지 않는다.” 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유로운 주체는 있다. 그것은 윤리적인 차원에서 타자에 대한 응답ㆍ책임에서만 나타난다.” “타자를 수단으로서만이 아니라 동시에 목적으로서 대하라.” - <윤리 21>에서 발췌
보여주라. 천국 구현의 “기쁨”을. 단, 그것을 ‘엄숙주의’ ‘고행주의’와 혼동하지 말라. 억압은 결코 고난을 초월하여 기쁨을 누리지 못한다.
결혼과 순종에 관한 기도 가운데 인도하심이 있었다. “너는 또 여호와의 손의 아름다운 면류관, 네 하나님의 손의 왕관이 될 것이라. 다시는 너를 버리운 자라 칭하지 아니하며 다시는 네 땅을 황무지라 칭하지 아니하고 오직 너를 헵시바라 하며 네 땅을 쁄라라 하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너를 기뻐하실 것이며 네 땅이 결혼한 바가 될 것임이라.”(사62:3~4) 아직 그 의미를 알지 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