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chive for October 23rd, 2009

October 23, 2009: 7:20 pm: bluemosesErudition

자존감의 상실. 불안한 스산함. 내가 놓친 것, 그리고 반드시 되찾을 것. 영적 주도권. 기도 가운데 강한 뜻을 세우라. 그렇지 않으면 1) 약점에 매인다, 2) 남에게 좌지우지된다, 3) 급한 일 처리하다가 인생 끝난다, 4) 허망한 데 인생을 탕진한다. 지도력은 가장 중요한 것에 우선순위를 두고 집중할 때 비로소 찾아온다. 좌로나 우로 치우치지 않는다. 오직 정진한다. 그것이 평탄의 길이든, 고난의 길이든.

: 7:03 pm: bluemosesErudition

“여보! 나는 1등 이것에 정말 관심이 없어. 그저 공부가 너무 재밌고, 지금 내가 당신을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은 그나마 학교 있는 동안 시간 허비하지 않고 성실하게 공부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게 하고 있을 뿐이야. 나 정말 시간을 허비하지 않을려고 애 많이 쓴다. 욕심이 있다면 1등 자체보다 졸업식장에서 당신과 부모님이 왔을 때 앞에 나가서 상받는 모습 보여주고 싶다는 생각은 해봤어.” - 종필 형님의 고백. 타인에 의해 요동하는 삶. 이제는 아니다. 나의 길을 가야 겠다. 그것이 최선이다.

: 1:23 pm: bluemosesErudition

“내가 젊고 자유로워 상상력의 한계가 없을 때 나는 세상을 변화시키겠다는 꿈을 가졌었다. 좀 더 나이가 들고 지혜를 얻었을 때 나는 세상이 변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시야를 약간 좁혀서 내가 살고 있는 나라를 변화시키겠다고  결심했다. 그러나 그것 역시 불가능한 일이었다. 황혼의 나이가 되었을 때 나는 마지막 시도로 나와 가까운 내 가족을 변화시키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그러나 아무도 달라지지 않았다. 이제 죽음을 맞이하기 위해 누운 자리에서 나는 깨닫는다. 만일 내 자신을 먼저 변화시켰다면 그것을 보고 내 가족이 변화되었을 것을. 또한 그것에 용기를 얻어 이 나라를 더 좋은 곳으로 바꿀수 있었을 것을. 그리고 누가 아는가. 세상까지도 변화되었을지도.”(웨스트민스터 대성당 지하 묘지에 있는 어느 영국 성공회 주교의 고백)

* 은송림: 거시를 염두에 둔 미시적 사랑의 동심원적 확장.

: 1:05 pm: bluemosesErudition

기존의 교육은 기름(forstering), 만듦(making), 도야(buildung)로 정의됐다. 이는 목적의 실현이라는 도구적 가치로 교육을 전락시킨다. 긍정을 추구하는 수동의 교육은 결국 학교로 귀속된다. 이후의 교육은 더 이상 부정을 배제해서는 안 된다. 교육은 “구조적 제약과 행위의 자유”라는 이율배반 속에서 존속한다. 부정을 수용해야 긍정을 지향하는 능동의 교육이 발현된다. 이러한 전환이 전제될 때 교육은 비로소 체제의 첨병이 아닌 변혁의 동인으로서 숨겨진 면모를 드러낼 수 있다.

: 12:48 pm: bluemosesErudition

“네가 작은 것 하나를 선택하면 그 이후에는 모든 사건이 - 어쩌면 평생 동안 - 너를 선택할 것이다.”(Robert Clark, In the Deep Midwinter, 1997: 264) 그러나 “우리가 기회를 드리기만 하면 하나님은 우리의 과거를 구속하실 수 있다. 과거의 구속이란 하나님이 이미 벌어진 일의 악을 사용하여 선을 이루시는 것을 말한다.” “우리는 하나님과 협력하여 미래를 결정하는 것이다. 우리가 올바로 기도할때 역사의 특정한 사건들이 일어난다. 우리는 기도로 세상을 바꾸는 자들이다.”

과거에 대한 후회와 원한, 미래에 대한 공포와 염려. “자력의 강도가 같은 두 자석 사이에 끼인 클립처럼 우리는 과거와 미래 사이의 긴장 속에 살아 간다. 우리에게 주어진 것은 현 순간의 삶뿐이다. 돌이킬 수 없는 과거는 우리의 기억 속에 살고 있다. 예측할 수 없는 미래는 우리의 상상 속에 살고 있다. 확실히 알 수 있는 것은 한 가지뿐이다. 우리에게 주어진 것은 지금 이 순간뿐이라는 사실이다.”

“이제 나에게 명확히 드러나 밝혀진 것은 미래의 시간이나 과거의 시간이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과거, 현재, 미래라는 세가지의 시간이 있다고 말하는 것도 적당치 않습니다. 아마 ‘과거 일의 현재’, ‘현재 일의 현재’, ‘미래 일의 현재’라는 세 가지의 시간이 있다고 말하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이 세 가지의 시간이 어떤 면에서 우리의 영혼 안에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나는 그 밖의 다른 곳에서 그것을 알 수가 없습니다. 즉 과거 일의 현재는 기억이요, 현재 일의 현재는 직관이며, 미래 일의 현재는 기대입니다.”(고백록, 11: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