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환자를 원수에게서 격리시키기 위한 예비단계로 먼저 그 자신에게서 격리시키는 작업이 순조롭게 진행중이었는데, 이젠 다 글러 버렸다. 물론 원수도 인간을 그 자신에게서 격리시키기 원한다는 건 안다. 하지만 방향이 달라. 그 작자는 이 조그만 버러지들을 진짜로 좋아하기 때문에 한 마리 한 마리의 차이에 터무니없이 큰 가치를 부여한다는 걸 명심해야지. 원수가 자아를 버리라는 건 아집으로 소리치고 주장하기를 그만두라는 뜻에 불과하다. 그래서 인간들이 아집을 버리고나면 진짜 각자의 개성을 전부 돌려준다구. 원수는 인간이 온전히 그의 것이 될 때, 그 어느 때보다 더 진정한 제 모습을 찾을 수 있다고 큰 소리친다(불행히도 이건 원수의 진심이지).” _ C. S. Lewis(1942[2005]). <스크루테이프의 편지>, 김선형 옮김, 홍성사. 90~91쪽.

1.  朱子는 性卽理에 근간하여 마음의 구성을 살피고 居敬窮理를 통하여 天理를 내화하여 그것을 人慾에 구애됨 없이 외화하는 것을 추구한다. 朱子가 정초한 1)工夫는 超人이 되기를 요구하는 것은 아닌가? 혹, 그렇다면 克己란 私事化가 아닌가? 2)內聖과 [개인에서 사회로 나아가는] 外王 간의 유기적 연관은 존재하는가? 이는 통치의 관점에서 修己의 道를 통해 治人의 德을 배양하는 것이 아닌가?

2. 朱子의 工夫論은 理氣心性論을 근간으로 한다. 理(太極)가 生命原理라면, 氣(陰陽)는 生命力이다. 朱子는 理先氣後의 관점에 의거하여 氣의 세계가 혼돈과 파멸에 이르지 않는 근거를 理의 질서에서 마련한다. 만물은 생명원리인 理를 부여 받는다. 총체적 理는 “理一”로서 統體一太極이며, 개별적 理는 “分殊”로서 各具一太極이다. 각각에 내재된 理는 性이라 하면, 인간에게 있어서는 心의 양태를 이루는 體가 된다. 心의 상태는 未發과 已發의 두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論語>에 따르면 未發이 思慮未萌, 知覺不昧한 “寂然不動”을 의미하고, 已發은 “感而遂通”을 나타낸다. 延平의 문하생 시절 未發의 氣象을 體認하는 工夫를 靜的이라 비판하였던 朱子는 언제나 이미 마음의 상태가 已發이라 간주하고, 그것으로부터 未發의 (本體 내지) 性의 단서를 살펴서 보존하는 工夫로 전향한다. 그러나 부단한 운동, 즉 已發만을 마음의 상태로 인식하는 전제에 무리가 있음을 깨닫고 未發을 ‘마음공부’의 영역으로 복원한다. 朱子는 <中庸>의 “喜怒愛樂未發謂之中, 發而皆中節謂之和”에서 착안하여 已發을 중시한 전기의 입장을 中和舊說이라 하고, 未發과 已發을 모두 수긍한 후기의 사상을 中和新說이라 하였다. 心(統性情)은 理와 氣가 융합된 것으로, 理가 내화된 것을 性이라 하고, 氣質에 의거한 性(仁義禮智)의 발현 형태를 情(喜怒哀樂愛惡懼)이라 하며, 情은 궁극적으로 氣로서 외화된다. 理의 내화를 靈과 肉의 영향력 수용이라 한다면, 氣의 외화는 魂의 영향력 작용이라 할 수 있다. 내화[Pedagogy, 1차적 학습]된 體와 외화[Andargogy, 2차적 학습]의 用 사이에는 體의 ‘工夫’가 존재하며, 그 수양의 도야에 따라 氣質之性이 약화되고 本然之性이 강화되어 人心이 아닌 道心을 추구하게 된다.

3. 요컨대 朱子의 工夫는 萬物의 理를 함양하여 마음의 체제라 할 수 있는 氣質을 변혁하여 본연의 性(卽理)을 세속에서 발현하는 것을 뜻한다. 그렇다면 이것을 실현하는 마음의 원천은 무엇인가? 자아는 어떻게 세속을 역행하여 도야할 수 있는가?

4. 朱子는 爲己之學의 신념하에 功利를 중시하는 事攻學派를 비판하였다. 또한 그 연장선상에서 利錄과 公名에 매몰된 科擧工夫 풍토를 우려하였다. 이러한 현실인식에서 朱子는 자신의 工夫論을 교육체제로 확장한다. 주자는 本性을 실현하는 교육의 본연을 재건하고자 [15세 전ㆍ후를 기준으로] <小學>과 <大學>의 2단계 교육체제를 구상한다. <小學>은 <大學>이 格物致知에서 시작하는 난해함을 감안하여, 工夫의 근본태도를 형성하는 敬의 체득을 목적으로 도입되었다. <小學>이 일상의 事를 통해서 敬을 함양하는 과정이라면, <大學>은 事의 근거로서의 理를 궁구하고 삶에 체현하는 과정이다. 상술한 2단계 工夫 과정의 실현을 위해 朱子는 교육기관으로서 書院을 주목한다. <白鹿洞書院揭示>은 朱子가 의도한 書院 교육이념의 표본이라 할 수 있다. 朱子 역시 學敎에서 대안을 찾는 것인가. 아니다. 書院에서의 공부 목적은 義理를 강론하고 修身하여 타인과 사회를 구제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으로 견인하는 규범은 외적 강제가 아니라 내적 자발성이다. 또한 書院 敎育의 주류는 <大學>의 체제에 의존한다. 朱子는 <小學> 단계의 관련하여 별도의 교육기관을 구상하지 않았다. 세태를 거스르는 본성의 회복을 추구하고자 <小學>의 필요성을 강변하였으나, 그것의 사회적 체화를 위한 제도적 정비는 모색하지 않았던 것이다. 朱子의 대안은 어디에 있는가?

5. 朱子는 <大學>에 의거하여 工夫의 완성을 修身이 아닌 平天下로 파악했다. 만물의 理를 포용하는 것은 자아의 경계를 확대하는 것이기에,  工夫의 과정 속에서 內省과 外王은 일치하여 그 성과는 倫理로서 산출된다. 朱子의 工夫論 硏究의 의의는 여기에 있다. 朱子가 정초한 工夫는 마음과 사회를 연계하여 倫理를 회복하는 변혁적 실천praxis이다.   

6. 교육은 사회의 변화를 추동하는 영향력의 작용과 그것의 수용을 매개하는 기제이고, 학습은 영향력의 작용과 수용 사이에서 리더십과 팔로워십의 일치를 수반한다. 통상 사회의 교육에 의거한 대중의 학습은 ‘사회의 교육적 기능’을 강조하는 1차적 학습과 ‘교육의 사회적 기능’에 중점을 둔 2차적 학습으로 이루어진다. 1차적 학습이 ‘사회화’로 지칭되는 구조적 배치에 대한 [소극적] 적응이라면, 2차적 학습은 구조적으로 각인된 성찰적 반응으로서 사회화 속에 설정된 이상적 존재 양식을 추구하는 [적극적] 지향을 내포한다. 즉, 학습은 자발적 추종으로 귀결된다. 그렇다면 工夫는 학습인가, 아닌가?

7. 부단히 자아의 경계를 확대 - 섬김을 통해 공동체를 구축 - 하는 과정인 工夫는 세속의 物化에 역행한다. 그것을 지속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 慾動이 부재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잦은 반복을 통한 體認’이 성취될 수 있는가? 가능하다면, 그 원천은 무엇인가. 가설로서 ‘영혼’을 설정한다. <죄죽임(The Mortification)>이 탐구의 단서이다.

8. The Community of Praxis를 의역하면 은송림(恩送林)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