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 not suppose that I have come to bring peace to the earth. I did not come to bring peace, but a sword.” (Mattew 10:34)
“just as the Son of Man did not come to be served, but to serve, and to give his life as a ransom for many.” (Mattew 20:28)
“Do not suppose that I have come to bring peace to the earth. I did not come to bring peace, but a sword.” (Mattew 10:34)
“just as the Son of Man did not come to be served, but to serve, and to give his life as a ransom for many.” (Mattew 20:28)
1. 人性 = 認識(현상학) + 倫理(구조주의), 몇 가지 키워드들. 1)體用, 內外 2)收用과 作用 3)心의 樣態, 狀態, 形態
2. 퇴계가 제시한 活看에 따르면, 모든 사물은 하나의 이치를 지니고 있으나 각개 사물은 상황에 따라 그 이치가 다르게 나타난다. 보편적 理는 “理一”로서 統體一太極이며, 개별적 理는 “分殊”로서 各具一太極이다. 心에 수용된 理는 性으로서 體가 된다.
<중국철학사>의 저자 馮友蘭에 따르면, 과학기술의 격차는 동서가 아닌 고금의 차이요, 문명의 태생적 한계가 아닌 상이한 문제의식의 전개 결과이다.
그것이 갖는 의미를 찾을 수 없었다. 일상의 의미를 고찰하되 폄하하지 않을 때 나는 이웃을 존중할 수 있을 것이다. 違和感을 조성하는 것은 자신이 내세울 만한 특정 가치로 상대방을 재단하고 구별지어 공동체로 결절된punctualized 네트워크를 개체들로 펼치는unfolding 행위이다. 분열은 해체를 낳는다. 설령 공의를 추구한다 할지라도 분란을 초래할 소지가 있다면 누구를 위한 의로움인지 자문해야 할 것이다. 다만 환호의 이유가 우려되었다. 기복과 율법의 성스러운 조합은 오해일지도 모른다.
무엇이 문제인가? 믿음의 결여이다. 우리의 믿음은 언약을 전제한다. 그리스도인의 믿음은 언제나 이미 언약에 대한 믿음이다. 그렇기에 믿음의 결여는 언약의 상실에 기인한다. 왜 언약을 상실하였는가? 비전과 그것을 등치시켰기 때문이다. 비전에 도달할 교두보를 잃고 절망하였던 것이다. 여기서 방황이 시작되었다. 교만한 공로와 열등한 무능, 그리고 나태한 분노의 혼재 가운데 은혜를 부인하고 말았다. 이것이 나의 현실태이다. 소시민적 순종과 축복의 등식에 반발하는 심령이 ‘자기의’에서 솟구친다. 그러나 이는 자기애의 기만이다. 내면을 향한 연민이 외부로 전개되어야 할 헌신을 삼켜버리지 않았는가. 주지하듯 각성은 무책임하다. 어쩌면 각성은 한갓 죄의식을 덜어내는 마스터베이션일지도 모른다. 관건은 수없이 되내인 바 ‘수술 중 각성’의 극복이다. 구속된 배치의 성향을 역행할 수 있을까. “내가 눈을 들어 산을 본다. 내 도움이 어디에서 오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