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겔이 7차례 강의한 저작을, 마르크스는 25세에 비판하였다. 양자의 매개체는 <법철학>이다.
헤겔이 7차례 강의한 저작을, 마르크스는 25세에 비판하였다. 양자의 매개체는 <법철학>이다.
“지역의 자활센터에서 만났던 여러 사람들은, 복지정책과 관련해 정당의 존재와 역할에 대해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 말하자면 정당은 서민들의 생활 현실에 뿌리를 내린 적도, 이를 향상하는 데 아무 역할도 한 적이 없다.”(최장집, 경향 ‘11. 12. 27)
언행에 있어 삼가 근신한다. 나는 여전히 진솔하지 않다. “선한 데는 지혜롭고 악한 데는 미련하라.”(롬16:19)
루시드 폴의 <아름다운 날들>
서정성 안에 사회적 비통 대신 자전적 애상을 담았다. 나즈막한 읊조림 어디선가 공감이 저며온다. “나 지금껏 헤매다가 이렇게 겨우 여기에 왔는데 난 지금 여기가 바보처럼 어디인지 몰라요.”
주지하다시피 자유는 불가하다. “다른 것을 통해 불러 일으켜지지 않는” 자존에의 망상은, 우리를 되려 권력의 종복으로 격하시킨다. 세속의 추동을 자기의지로 치환하고 그것을 관철시키고자 늑대처럼 연명하는 것이 인생인가. 인간은 스스로 존재하지 않으나, 그리 되길 원하는 피조물이기에 종국의 선택은 ‘자발적 복종’으로 귀결된다. 그렇다면 내면의 참주는 욕망의 괴뢰에 지나지 않을텐데, 나는 어찌 살아야 하는가. “쉬운 멍에”를 지고 가길 소망한다.
밋밋하게 쓰여진 진중권의 기고(중앙일보, ‘11. 12. 23)를 접하고, 그는 ‘모욕을 당한 적이 없는 자가 아닌가’ 싶었다. “시장에서 공정하게 경쟁하고, 정당하게 획득한 재산을 정의롭게 환원한다”라니, 깽판놓기가 무색해진다.
푸코는 대학에 미리 제출한 강의 제목을 <안전, 영토, 인구>로 했으나, 넷째 주 강의에서는 이 제목보다 “제가 진정으로 하고 싶었고, 실제로 지금하고 싶은 것은 ‘통치성’의 역사라고 부를 수 있는 어떤 것이다”라고 초점을 명료히 했다. (장정일)
* 훈육 / 규율 / 생체권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