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께서는 저희에게 비단 올바름이 올바르지 못함보다도 더 낫다는 주장만 밝히실 것이 아니라, 그 각각이 그것을 지니고 있는 당사자에게, 그 자체로서, 즉 신들이나 남들에게 발각되건 또는 그렇게 되지 않건 간에, 무슨 작용을 하기에, 한 쪽은 좋은 것이지만, 다른 한 쪽은 나쁜 것인지도 밝혀 주십시오.”

“글라우콘이 ‘그 자체’를 밝혀보일 것을 요구하자 “그의 형 아데이만토스(Adeimantos)”가 개입한다. 그가 보기에는 “무엇보다도 마땅히 언급되었어야 할 바로 그게 언급되지 않았”던 까닭이다. 그것은 무엇일까? 글라우콘이 요구한 것으로 충분하지 않은가? 왜 아데이만토스는 “충분한 언급이 이루어진 것으로 생각하지” 않는 것인가? 아데이만토스의 보충은 당대의 아테나이에서 ‘그 자체’에 대한 탐구가 왜 필요한 지, 다시 말해서 ‘그 자체’에 대한 탐구의 시대적 맥락을 설명하면서 자연스럽게 소크라테스(플라톤)가 대결하고 있는 사유모형-생활세계 를 제시할 것이다. 글라우콘이 담대하다면 아데이만토스는 섬세하다.”

“올바름을 원리로서 탐구할 것을 요구하는 글라우콘과 올바름의 작용과 이로움을 밝혀 달라는 아데이만토스, 이 두 사람의 문제제기는 지적이고도 전혀 새로운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아데이만토스가 언급했듯이 “개인들뿐만 아니라 나라들에 대해서”, 한 사람의 영혼과 공동체 모두에 대해서 올바름의 원리와 작용을 구축하는 작업, 즉 올바름의 학(學) 을 구축하는 작업에 착수해야만 한다. 담대함과 섬세함으로써 수행되는 이 작업은 ‘기쁨’을 낳아놓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