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chive for June, 2013

June 7, 2013: 10:54 pm: bluemosesErudition

악한 상황에서의 배려는 얼마나 어리석은가.

June 5, 2013: 2:18 am: bluemosesErudition

실리콘밸리에 있는 발도로프 자유학교는 “구글·애플·마이크로소프트에 다니는 직원 자녀의 비중이 70% 이상이라고 한다. 등록금은 연간 2만 달러가 넘는다. 그런 만큼 최신식 시설이 갖춰져 있을 것 같지만, 이 학교에는 컴퓨터가 단 한 대도 없다고 한다. 학생 중 90% 이상은 구글 검색을 해본 경험이 없다. 스마트 기기를 만들어 먹고사는 회사의 임직원들이 왜 그런 학교에 자기 아이들을 보내는 걸까?”(권장희)

: 1:21 am: bluemosesErudition

“율곡의 ‘理通氣局’이 탁월한 견해이니 그걸 공부하자고 해봐야 소용없고, 그걸로 ‘지금, 여기’를 설명해 보여야 사람들이 귀기울이기 시작한다는 것.”

June 3, 2013: 11:54 am: bluemosesErudition

“최근 내가 가장 관심을 갖는 것은 농어촌 문제다. 얼마 전 경북 예천에 갔다가 깜짝 놀랐다. 전교생이 40명가량인데 그중 고1인데도 아직 한글을 모르는 아이가 있더라. 40명 중 10명가량은 맞춤법을 잘 모르고. 그뿐인가. 전국의 이혼 가정, 조손(祖孫) 가정, 다문화 가정은 전부 시골에 몰려 있는 것 같다. 게임 중독도 도시보다 시골 아이들이 훨씬 심각하다. 너무 슬픈 현실 아닌가. 이런 아이들을 꼭 살려야겠다고 생각했다.”(고원형)

: 11:38 am: bluemosesErudition

“일반 회사들이 컨설팅을 받는 이유가 뭘까. 문제를 몰라서가 아니다. 대부분은 사내에서 해결할 수 없는 정치적 문제 때문에 외부에 컨설팅을 맡기는 것이다. 그런 만큼 겉보기엔 화려하지만, 컨설팅으로는 문제의 본질로 들어가지 못한다고 판단했다.”(강도현)

: 11:22 am: bluemosesErudition

Psalm 150:6 NIV

Let everything that has breath praise the Lord.

June 2, 2013: 7:39 pm: bluemosesErudition

0. “데뷔작이 어땠냐고? 처절하게 실패했다. 한 출판사에서 아홉 번을 퇴짜 맞았다. 오기로 3개월 걸려 그린 24쪽짜리 만화를 다시 들고 갔는데 그것조차 퇴짜 맞았다. 지금의 <미생>보다 데생이 100배는 꼼꼼한 만화였다. 펜선 입히는 데만 사흘 밤을 새웠다. 자존심이 상해 경쟁 출판사로 그 작품을 들고 갔고, 결국 거기서 데뷔에 성공했다. 그런데 데뷔작이 실린 잡지를 사들고 다른 작가들의 작품부터 숙독하다 내 작품을 보니 나도 모르게 얼굴이 벌게지는 거다. 뭐랄까. 그림에는 어마어마하게 공을 들였는데, 그 그림이 담고 있는 얘기는 쓰레기 같달까? 아홉 번 퇴짜 맞은 작가의 아집, ‘이래도 나를 안 써줘?’라는 식의 자기과시… 뭐 그런 게 느껴졌다. 그 뒤 작품을 연재하는 4개월이 지옥 같았다. 너무 비참해 데뷔를 포기하고 다시 문하생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창작이란 무엇인가’를 처음부터 다시 고민하기 시작했다.”

1. “창작자로서 개념 정립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내가 하는 일이 그림을 그리는 거냐, 글을 쓰는 거냐, 아니면 통합적으로 새로운 걸 창작하는 거냐. 그러다 나름 도달한 것이 대중매체의 만화란 ‘익숙하게 다른 것’이라는 결론이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새로운 것이 대중의 외면을 받듯 클리셰(진부하고 상투적인 표현)로 범벅된 작품 또한 외면을 받을 터였다. 그렇다면 익숙한 듯하면서도 나만의 결을 드러낼 수 있는 작품이어야 할 텐데 그것이 뭘까, 고민하다 주목하게 된 것이 캐릭터다. 흔히 작품을 쓸 때 플롯(구성)을 중시하는 분들이 많다. 그렇지만 플롯은 시나리오 작법서나 이론서에 다 정리돼 있다. 나는 그보다는 캐릭터에 마음이 끌렸다. 이를테면 창밖에서 두 사람이 치고받고 있다 치자. 우리 모두 신기하게 싸움을 구경할 뿐, 그 일로 고통을 받지는 않는다. 왜? 모르는 사람이니까. 그런데 만약 내가 버스를 타고 낯선 곳을 가고 있는데 창밖으로 우리 아이 모습이 보인다면? ‘왜 우리 애가 저런 위험한 곳에 혼자 있는 거지? 빨리 내려 구해야 할 텐데…’ 하면서 온갖 불안과 공포가 엄습할 것이다. 나는 만화 캐릭터도 그래야 한다고 생각한다. 내가 만든 캐릭터에 대해 독자가 많이 알고 이해할수록 같이 울고 웃고 공감하지 않겠나. 실제로 작품을 그릴 때 나는 플롯은 전혀 짜놓지 않는다. 대신 캐릭터를 꼼꼼히 정리해둔다. 최연장자에서 연소자까지 등장인물 차트를 만들고, 중요한 역사적 사건이 있던 해에 이 사람은 몇 살이었는지 환산해둔다. 이를테면 88올림픽이 열렸을 때 40대 중반으로 보수 신문의 정치부장이던 사람과 20대 대학생이던 사람이 그 시절을 회상하는 정서는 당연히 다를 것 아닌가. 이렇게 과거의 사건들이 쌓이면서 그 사람의 캐릭터가 만들어진다. 대사·단어·말투가 다 달라진다. 캐릭터에 관심을 가지면서 주변을 새삼 둘러보게 됐다. 내 주변 친구, 선생님, 이웃들에게 나와 닮은 부분이 보였다. 그러면서 깨닫게 됐다. ‘아, 세상 만인의 모습이 바로 내 안에 있구나.’”

2. “나를 분석하는 작업도 창작에 도움이 됐다. 20대의 나는 비애감, 열패감, 낮은 자존감으로 똘똘 뭉쳐 있었던 것 같다. 그러던 어느 날 헌책방에 갔다가 <한 정신과 의사의 실존적 자기분석>이라는 책을 우연히 접했다. 외국 유학을 간 신경정신과 의사가 쓴 졸업 논문을 책으로 펴낸 것인데, 책을 보니 자기분석을 위해서는 자신의 아버지부터 분석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쓰기 시작한 것이 ‘아버지 일기’다. 그 전까지 아버지는 내게 ‘자식 상투를 쥐고 좌지우지하는 분’이었다. 그런데 일기를 쓰면서 ‘아버지는 어떤 사람이었을까’를 처음으로 진지하게 생각했다. 먼저 떠오른 것이 집에 있던 아버지 사진이다. 멋진 포즈를 잡고 찍은 젊은 아버지의 사진. 알고 보니 아버지는 연예인이 되고 싶었다고 한다. 그런데 어린 나이에 덜컥 아이를 가져버린 것이다. 남한테 자신을 화려하게 보이고 싶은 욕망을 지녔던 청년이 일찌감치 가장이 됐다. 그러니 아이 때문에 자기 인생이 피해를 봤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 이런 생각이 들면서 아버지가 가여워졌다. 울면서 일기를 썼다. 그 뒤로는 아버지가 무섭지 않았다. 지금도 고향 가면 삼 형제 중 유일하게 아버지와 술 한잔 할 수 있는 아들이 나다.”

3. “창작자는 자기 자신을 비추는 좋은 거울을 가진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남을 비출 게 아니라 내 안에 있는 수십 개의 생각의 결, 그중에서도 어느 결을 끄집어내느냐에 따라 인격이 달라진다. 그런 만큼 창작자는 자신을 끊임없이 돌아보면서 욕망을 관리할 줄 아는 존재여야 한다. … 창작가가 되기 위해서는 일단 스스로의 욕망이 매우 커야 하고, 이를 구체화하기 위한 디테일한 지점까지 알고 있어야 한다. … 한 예로 프로 바둑 기사를 꿈꾸는 아이들이 있는데, 정말 프로가 될 정도의 아이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궁금한 수를 놓아보곤 한다.”

* 윤태호 _ 2013 행복한 진로학교(5. 24)

June 1, 2013: 9:22 pm: bluemosesErudition

“한국은 갈등을 터뜨리는 강한 연극인데, 일본은 예의를 갖추면서 숨기는 스타일이기 때문에 잔잔하다.” “사건이 있는 듯 없는 듯 약하게 나오는데도 긴장감이 더한 것이 일본 연극의 힘이라고 할 수 있다.”

“한국 연극은 에너지와 갈등을 강조하기 때문에 오히려 관객을 소외시키는 면이 있다. 이에 반해 일본 연극은 관객이 생각할 여지를 많이 주기 때문에 더 깊은 인상을 남긴다는 것이다.”

: 12:22 am: bluemosesErudition

“제가 고등학교 3학년 때 광주항쟁이 있었습니다. 저는 광주에 살았고 5월18일 광주항쟁이 시작된 날부터 27일 새벽 도청이 함락될 때까지 다 지켜보았습니다. 80년 5월을 얘기하면 저도 모르게…(이때 그는 끝내 눈물을 흘렸다). 도청이 함락되던 그 마지막 날 26일 저는 도청 앞 수협 건물에 있었습니다. 시민군이 함락되고 그 장면을 보면서 저는 들고 있던 총을 버리고 도망갔어요. 당시 죽어갔던 사람들과 총을 버리고 도망갔던 나. 그것 때문에 대학에 들어가서도 학생운동을 한 것입니다. 이후 85년에 사건에 연루됐고 고문을 받고 거짓 자백을 하고, 교도소에선 계속 잠만 잤어요. 그렇게 3~4개월이 지나고 나니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내가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광주시민들을 학살한 전두환 정권에 굴복해서 거짓 자백을 하고. 내가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내가 80년 5월에 총을 버리면서 절대 다시는 이렇게 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는데 5년이 지나서 또 이렇게 해버린 것이야?’ 그런 내 자신을 용서할 수가 없었습니다. 광주에서 죽어간 열사들과 제 모습이 겹치면서 영혼과 정체성이 다 망가져버린 거죠.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해 버린 나, 전두환 정권의 요구대로 방송에 나와 주절거렸던 나, 권력에 시중들며 짓뭉개지고 쓰레기통에 처박혀버린 내 영혼. 그것을 일으켜세우고 싶었어요. 거기서 할 수 있는 것은 전향하지 않겠다고, 이 사건은 조작이라고 선언하는 것뿐이었죠.”

“유토피아는 “아무 것도 아닌” 준법서약서 한 장 못 쓰고, 아들을 기다리는 칠순 어머니에게 “오래 사셔야 돼요.”라고 말하는 내 동갑내기 장기수의 영혼 속에, 사람들이 ‘미망’이라 비웃는 그 고결한 영혼 속에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