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인식의 한계에 감금된 표상
“쿤의 주장은 ‘과학은 사회적으로 구성되었다’는 사회구성주의가 발생한 지적 토대가 되었습니다. 절대적 지식, 확실한 토대가 없어도 세상은 작동한다는 것이 그들의 태도죠. 사회구성주의의 본격적인 출발이 1970년대 후반, 에든버러학파가 제기한 ‘스트롱 프로그램’이었습니다. 1980년대에는 브뤼노 라투르의 ‘행위자 네트워크 이론’으로 발전하죠.”
“전통적인 과학기술운동을 했던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사회적 불평등, 부의 집중, 권력 편재 같은 문제에 몰두한 반면, 사회구성주의자들은 이에 관심을 덜 가졌다. ‘행위자 네트워크 이론’은 그런 단점을 보완해 인간뿐 아니라 생물, 무생물 같은 ‘비인간’ 행위자들 모두가 대칭적으로 연결됐다고 주장한다. 권력의 신화를 해체하는 방법론적 기초가 된다고 평가받는 이론이다.”
“The road to Auschwitz was built by hate, but paved with indifference.”(Ian Kershaw)
“Because he lives, I can face tomorrow, All fear is gone.”
1. 불안의 호소는 결국 마케팅 견책이었다. “아무것도 안 하고 싶다. 이미 아무것도 안 하고 있지만 더 격렬하게 아무것도 안 하고 싶다.”
2. 반면교사의 교훈은 무엇인가. 훈계하지 않겠다. 문제의식을 공유하고 연이은 물음이 있으면 정직하게 답하자.
3. “왜 그분에게는 그토록 권위가 있었는가? 그분이 매우 효과적으로 가르치셨기 때문인가? 아니면 사람들이 예수님에게서, 당시의 다른 종교 선생과는 구분되는 특별한 깊이를 감지했기 때문인가? 이것은 중요한 질문이니, 잠시 생각을 좀 해보자. 예수님이 종교 선생이었다는 데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문제는 사람들이 예수님의 정체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그분의 의미를 단 하나의 범주에 국한시킨다는 데 있다. 그러나 예수님이 선생이신 것은 절반의 진실일 뿐이다. 그것은 스냅 사진이지 ‘큰 그림’이 아니다. 예수님의 역할은 우리에게 좋은 충고를 주시는 것이 전부가 아니다. 그러면 우리는 그저 무엇을 하라고 말해 줄 사람만 있으면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존재가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에게 보는 법을 배우라고 말하는 것이 소용이 없듯이, 우리가 하고 싶어 하는 선한 일들을 말해 주는 것은 무용지물일 뿐이다! 우리에게는 단순한 지혜의 말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치유와 회복이 필요하다. 무엇을 하라는 지시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선한 일을 할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하다.” _ A. McGrath, <예수님은 누구인가>, 성서유니온, 2015, 26~27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