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탁한, 그 영, 억눌려있는
“I will strike the winter house along with the summer house, and the houses of ivory shall perish, and the great houses shall come to an end,” declares the Lord.
0. “일제의 식민 지배가 이봉창같은 순수한 영혼을 지닌 청년의 삶을 황폐화하는 과정”을 밝힘으로써 “일제의 식민지 개발에 근거한 식민지 근대화론의 허구성을 입증”하려 했다.
1. “나는 스물이 되도록 공부도 못하면서 그저 살기에 바쁘고 곤궁해서 나라니 민족이니 하는 일은 어른들에게서 간혹 얻어들었어도 별로 깊은 감명을 받지 못했고 그저 어떻게 하면 직업을 가지고 어른들 모시고 살아갈까 하는 것뿐이었습니다.”(조봉암, 나의 정치백서)
2. 1901년생인 그는 열아홉되던 해에 일어났던 3.1 운동도 의식하지 못했다. 일본인 관선 변호사가 “그것을 듣고 어떤 소감을 가졌는가”라고 묻자 그는 “아무것도 의식하지 못했다”고 답변했다. 그는 어렸을 때 부유한 집안에서 자랐다. 그의 아버지는 “자신의 능력으로 돈을 번 신흥자본가”였으며, 그의 사업은 1910년(이봉창이 열살 때이다)의 “한일합방으로도 별다른 타격을 입지 않았다.” 아버지의 사업이 몰락함에 따라 가정형편이 어려워지자 그는 취직을 했다. 조선인이었으므로 당연히 차별을 받았다. 그때의 심정은 “체념”이었다. 그가 감옥에서 예심판사에게 체출하기 위해 쓴 상신서(上申書)에는 다음과 같은 탄식이 있다: “나는 내가 조선인임을 명심하지 않으면 안된다. 설혹 억울하게 내던져지고 차인다 하더라도 말없이 견뎌내지 않으면 안되는 인간이다. 체념할 수밖에 없다. 나도 일본인으로 태어났으면 차별이나 학대를 받지 않고 살아갔을 것이다. 불행하게 조선인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
3. 일본으로 건너간 이봉창은 이런저런 일들을 전전하다가 오사카의 어느 가스회사에 취직하면서 “처음으로 기노시타 쇼조(木下 昌藏)”라는 일본식 이름을 쓰기 시작했다. “진짜 일본인처럼 행동한다면 일본인들에게 차별대우를 받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조선인과의 교제를 완전히 끊었다.”
4. “나는 조선인이라는 것이 남에게 알려지지 않도록 노력하며 조선에는 편지도 보내지 않았으며 또한 본명도 밝히지 않고 언제나 항상 일본이름을 쓰면서 어디에 가든 진짜 일본인 행세를 했습니다. 그러나 마음속으로는 본명을 사용해서는 이 세상을 편안하고 태평스럽게 살 수 없다는 생각에 언짢은 마음 참을 길이 없었고, 당당하게 본명을 쓰며 살아갈 수 있게 되었으면 하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5. “나는 2년 정도 일본인으로 변신하여 살아보면서 고통을 겪었기 때문에 이제부터는 나의 본명인 이봉창으로 살기로 하고 차별이나 압박을 받아도 관계가 없는 조선인으로서 생활하기로 마음먹고 있던 때이기도 해 곧 결심하고 상해로 갔다.”
6. “선생님의 관대한 도량과 엄정한 공심에 탄복하여 저는 그 날 밤을 그대로 새웠습니다. 과연 영웅의 도량이십니다. 저의 일생에 이런 신임을 받은 것은 선생님께 처음이자 마지막입니다.”
7. 이봉창은 정치적 각성의 최초 단계에 들어서 있었고 이 각성은 김구의 행동 제안에 의해 구체화되었다.
8. 1932년 1월 8일 식민지 조선 사람 이봉창은 일본제국 천황의 행렬에 폭탄을 던졌다. 실패로 끝난 이 거사에 대한 심문조서에서 그는 자신이 천황을 죽이려했던 이유를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일본인은 관헌까지도 우리 조선인에 대해 차별대우를 하며 학대하고 있으므로 우리 조선인은 어떻게 해서든 조선을 독립시켜 조선인의 국가를 갖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을 갖고 있는 터에 백정선(김구)으로부터 천황폐하를 죽이는 것이 조선의 독립을 촉진시키는 첩경이라는 말을 듣고 과연 그렇다고 생각되어 2천만 동포를 위해 희생하여 천황폐하를 죽이자고 결심하기에 이르렀던 것입니다.”
9. 격정thymos은 인간을 정치적인 존재로 만들어준다. 격정을 즐겨 탐구해온 하비 맨스필드(Harvey Mansfield)의 말을 들어 보자: “격정에서 우리는 인간의 동물성을 보는데, 인간들(특히 남자들)은 종종 개가 짖어대고 뱀이 쉿쉿 소리를 내고 새가 날개를 퍼덕이는 것처럼 행동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로 여기에서 우리는 또한 인간적 동물의 인간성을 본다. 인간은 위협에 직면해 털을 곤두세우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화도 내는데 이는 어떤 근거, 심지어 어떤 원리, 어떤 원인 때문에 반발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오로지 인간만이 화를 낸다. 여러분이 분통을 터뜨릴 때 여러분은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할 근거를 찾는다. 여러분은 부당하다고 느낀 순간이 한참 지난 후에야 근거를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어떤 근거 — 좋은 것이건 나쁜 것이건, 좋게 여겨지는 것이건 당연하게 여겨지는 것이건 — 없이는 부당하다고 느낄 수 없다.”
_ 강유원, 2015. 12. 6.
“멩겔레Josef Mengele는 인간 수집가였다. 폰 페어슈어처럼 그도 쌍둥이 연구로 교수가 되기를 원했다. 그는 화물 전용 플랫폼에 내린, 죽음을 목전에 둔 무리들 가운데서 찾아낸 쌍둥이 아이들을 ‘나의 기니피그’라고 불렀다. 종종 그는 쌍둥이를 차에 태우고 수용소 길을 따라 달리기도 했고, 그들에게 단 것을 선물하기도 했다. 그리고 그 다음 날 멩겔레는 아이들의 몸에서 내장을 들어내기 위해 그들을 자신의 해부용 탁자 위에 눕혔다. … 그를 아우슈비츠로 보냈던 오트마 폰 페어슈어 교수는 단 한 번도 그 일로 인해 책임을 추궁받지 않았다. 그는 1952년에 독일인류학회의 회장 직을 맡았다.”(귀도 크놉, <<나는 히틀러를 믿었다>>, p. 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