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chive for December 21st, 2015

December 21, 2015: 11:19 pm: bluemosesErudition

신학의 실상은 [결국 신의 표상을 탐구하는] 인간학일까. 어쩌면 표상이야말로 신과 인간을 매개하는 종교의 본질인지도 모르겠다. 기독교강요 첫 문장을 참고하자. 물론 포이어바흐도.

: 11:07 pm: bluemosesErudition

그리하여 룻은 밭으로 나가서, 곡식 거두는 일꾼들을 따라다니며 이삭을 주웠다. 그가 간 곳은 우연히도, 엘리멜렉과 집안간인 보아스의 밭이었다. 그 때에 마침 보아스가 베들레헴 성읍에서 왔다. 그는 “주님께서 자네들과 함께 하시기를 비네” 하면서, 곡식을 거두고 있는 일꾼들을 격려하였다. 그들도 보아스에게 “주님께서 주인 어른께 복을 베푸시기 바랍니다”하고 인사하였다.

: 10:50 pm: bluemosesErudition

“굳이 단 하나의 보험만 가입할 수 있다고 가정한다면, 전문가들은 실손의료보험을 첫 손에 꼽는다. … 만약 조금 더 여유가 있다면, 가족력 등을 감안해 특정 암보험이나 뇌질환 등을 보장하는 보험에 가입하는 것도 좋다.” ”실손보험은 실비 개념으로 의료비 등을 보상해 주는 보험이고, 암보험은 병에 걸린 이후 치료비가 아닌 생활 자금을 보전해 준다고 보면 이해가 쉽다.”

: 10:24 pm: bluemosesErudition

분당은 어떤 명분으로도 정당화될 수 없었습니다. 분당을 통한 개혁신당론의 핵심 아이디어가 힘센 새 친구를 얻기 위해 그 자가 싫어하는 옛 친구를 버리자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당신을 비롯한 신당 추진파는 ‘망국적 지역주의’의 해소를 정치적 명분으로 내세웠지만, 당신들이 그 거룩한 명분의 실현을 위해 고른 길은, 얄궂게도, 영남패권주의에 사실상 굴복하고 영합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과정을 노무현 대통령은 방조하거나 북돋우거나 지휘했습니다.

돌이켜보면, 지금 제1야당의 지지부진함과 내분의 뿌리가 바로 2003년의 민주당 분당이라는 것이 또렷이 드러납니다. 분당 뒤에 뭘 크게 잘못했다기보다 분당 자체가 문제였던 겁니다. 

분당이 아니었다면 호남과 노무현 대통령 사이가 지금처럼 데면데면해지지 않았을 것이고, 분당이 아니었다면 대한민국 여당과 제1야당의 주류가 모두 영남패권주의 세력으로 채워지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분당이 아니었다면, 당신이 광주에서 새정치민주연합 후보와 대결하며 ‘호남정치’의 복원을 내세울 일도 없었을 것입니다.”

당신이 2003년 민주당 분당을 사과하지 않는다면, 저는 당신의 ‘호남정치’를 신뢰할 수 없습니다. 분당의 가장 참혹한 결과는 호남 유권자들을 친노 영남패권주의 세력의 인질로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당신은 호남 유권자들에게, 그리고 이 나라 민주주의 세력에게 깊이 사과해야 합니다. 당신이 주도한 그 분당 때문에, 호남 유권자들은 노예의 도덕을 내면화해야 했습니다. 선거 때마다 친노가 주류인 새정치연합에 몰표를 주지만, 새정치연합 주류는 영남패권주의를 버릴 생각이 없습니다. 호남 유권자들에게 돌아오는 것은 비웃음뿐입니다.

_ 고종석, 천정배 의원께(경향, 2015/12/21)

: 9:58 pm: bluemosesErudition

토템의 기원은 여전히 불가사의다. 보이지 않는 실재를 부인한다면.

: 7:21 pm: bluemosesErudition

도덕은 어디서 오는가. 이 물음과 씨름하며 칸트는 종교와 절연했고 프로이트는 종교로 귀환했다.

종교는 철학의 끝에서 시작한다. 종교란 무엇인가. 그것은 실재의 표상에 대한 해석일까.

: 3:03 pm: bluemosesErudition

“It does not simply give as much, or keep as much distance, as possible without feeling burden. If God only loved us sensibly, there would be no incarnation and no cross.”

: 3:00 pm: bluemosesErudition

young widow from Moab and great-grandmother of David

: 2:57 pm: bluemosesErudition

“지식의 경박함을 참을 수 없어 연쇄살인을 저지른 눈먼 수도사 호르헤 신부의 모델이 아르헨티나의 눈먼 작가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였다.”

: 11:54 am: bluemosesErudition

소설의 첫 문장을 읽어 보자. “찌듯이 무더운 7월 초의 어느 날 해질 무렵, S 골목의 하숙집에서 살고 있던 한 청년이 자신의 작은 방에서 거리로 나와 왠지 망설이는 듯한 모습으로 K 다리를 향해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그의 표현을 빌리면 악마가 신과 싸움을 벌이고 ‘소돔의 이상’과 ‘마돈나의 이상’이 공존하는 곳이 인간의 마음속이다.

“만약 진리가 그리스도와 함께하지 않는다면 나는 진리 대신 그리스도를 따르겠다.”라는 유명한 선언은 신에 대한 그의 생각을 함축한다.

그는 시베리아 유배지 옴스크에서 발목에 족쇄를 찬 채 4년 여 동안 옥살이를 했고 6년간은 사병으로 복무했다. 그 10년 동안 가장 많이 생각한 것이 무엇이겠는가? 당연히 자유 아니겠는가.

영국 사상가 제러미 벤담에 의하면 … 공리(utility)라 부르는 이 원칙은 더 나아가 선악과 진위의 척도가 된다. 어떤 행동으로 인해 쾌락이 극대화되어 행복이 극대화되면 그것은 선이다. 반대로 어떤 행동으로 인해 고통이 극대화된다면 그것은 악이다. 벤담의 이론을 라스콜니코프의 살인에 적용할 경우 그 살인은 공리를 위해 바람직한 것이 된다. 쓸모없고 사악한 한 사람을 제거함으로써 사회 전체의 공리가 증가한다면 그것은 선으로 볼 수 있다. 라스콜니코프식으로 바꿔 말하자면 한 마리의 벌레를 죽여서 백 명의 선량한 사람을 구하는 것은 바람직하고 훌륭한 일이다.

도스토옙스키가 『죄와 벌』의 집필을 시작하기 몇 달 전인 1865년 초에 프랑스 제2제정의 황제인 나폴레옹 3세의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역사(Histoire de Jules César)』가 출간되었다. 이 책에서 나폴레옹 3세는 윤리와 도덕률을 초월하는 비범한 인간의 의의를 공공연하게 인정할 뿐 아니라 오히려 그런 인간의 출현을 권장하고 찬양하기까지 한다. … 도스토옙스키는 초인 사상을 발전시켜 ‘인신(人神, Man-God)’으로 재정립한다. 인신은 초인의 다른 말, 곧 신처럼 된 인간이다. 인간을 신처럼 높여 주는 것은 인간의 지성과 힘, 그리고 거기서 오는 교만이다. 지성과 힘을 지니고 무한히 교만하게 된 인간은 스스로를 신격화하여 일체의 윤리적 규범을 초월한다. 이것은 인간이 된 신, 즉 그리스도에 대립하는 개념으로 만일 ‘신인(神人, God-Man)’ 대신 무한히 교만한 인신이 등장하여 모든 도덕과 윤리의 폐허 위에 지상의 천국을 건설하게 된다면 그것은 곧 종말을 의미한다는 것이 도스토옙스키의 생각이었다.

라스콜니코프는 시베리아 유배지에 있다. 그는 여전히 반성도 하지 않고 자기 자신과 주위 사람들을 혐오하며 형기를 보내고 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중병에 걸리고 고열과 헛소리에 시달리면서 기이한 꿈을 꾼다. 꿈의 내용은 이렇다. 전 세계가 무서운 전염병에 걸려 지구가 멸망할 위험에 처해 있다. 그런데 어떤 신종 섬모충이 나타났다. 이 섬모충은 단순히 세균이 아니라 ‘지성과 자유 의지’를 부여받은 영적인 존재였다. 이것에 감염된 사람들은 즉시 미쳐 버리게 되는데 그들은 자기가 진리에 확고하게 뿌리를 내린 가장 현명한 사람이라고 믿기 시작했다. 자신의 과학적인 결론, 도덕적인 확신과 신앙을 이보다 더 확고하게 느끼는 사람들은 이전에도 이후에도 없었다. 사람들이 이 섬모충에 감염되어 모두 다 자기만 옳다고 주장하는 바람에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지 일치를 볼 수 없었다. 사람들은 어떤 무의미한 증오 속에서 서로를 죽이기 시작했다. 화재와 굶주림이 시작되었다. 온 인류가, 그리고 모든 것이 파멸해 갔다. 구원받을 수 있는 사람은 단 몇 명뿐이었는데 이들은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로 새로운 종족과 새로운 삶을 시작하고 대지를 복구하게 될 선택받은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어디에서도 그들을 만날 수 없었고 그들의 목소리조차 들을 수 없었다.

혼자라는 것이 답이 아니라면 함께 있는 것이 답이 되어야 한다. 그런데 함께 있는 것 역시 답이 아니라면 도대체 무엇이 답이란 말인가. 오랜 고민 끝에 도스토옙스키는 결국 공동생활이 아닌 ‘공동체 정신’에서 답을 발견했다.

도스토옙스키에게 자유는 ‘자유욕’과는 정반대되는 어떤 것, 본능의 극복과 최고의 도덕적 상태를 향한 지향이다. 도스토옙스키에 따르면 “진정한 자유란 궁극에 가서는 언제나, 어느 순간에나 인간이 스스로의 진정한 주인이 되는 도덕적 상태를 획득할 정도로 자아를 극복하고 자신의 의지를 극복하는 데 있다.”(XXV: 62) 요컨대 자유란 한 인간이 이 세상에 태어나 사는 동안 인간의 존엄성을 방해하는 탐욕과 공포, 이기주의와 집착, 좌절과 절망과, 증오와 분노와 불안을 딛고 일어서서 자기 자신에 대한, 그리고 세상에 대한 진정한 이해를 거쳐 사랑과 용서와 이해와 인정과 나눔과 베풂의 상태에 도달하는 과정을 의미하는 말이다. 그래서 그는 “최고의 자유는 ‘타인과 모든 것을 나누어 갖고 타인을 섬기는 것’이다.”라고 단언하는 것이다.(XXV: 62)

_ 석영중,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열린연단, 2015/12/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