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chive for May, 2016

May 5, 2016: 1:38 am: bluemosesErudition

하나님을 경외하면 감사와 겸손이 흘러나온다. 이것이 잠언의 지혜다. 항시 기억하고 매번 되새기자. 아니다 싶으면 기꺼이 손해를 감수하자.

May 4, 2016: 11:45 pm: bluemosesErudition

“얼마 전에 교육부 장관하신 안명현 교수, 하영섭 교수가 쓴 논문을 봤다. 5ㆍ31 교육개혁 20년이 지났는데 그 이후 어떻게 됐냐에 관한 것이다. 공교육을 잘하면 사교육이 주는가? 아니라고 보고 있다. 사교육은 지위재라는 것이다. 남보다 우위에 서기 위해 하는 것이다. 어떤 제도를 시행하더라도 돈 있는 사람은 쓴다. 요즘에는 자녀도 한두 명 밖에 안 낳는다. 다른 학생보다 자기 애를 더 높이기 위해 돈을 투자할 것이다. 그것은 제도로 바꿀 수 있는 게 아니다. 내가 이해한 논문이다. 자율성 주면, 사교육 늘어난다는 실제적 데이터는 없다. 무조건 풀어주면 대학들이 사교육 엄청나게 늘어나게 할 거냐는 근거도 없다. 두 번째는 사교육이 늘어난다는 고민이 있는 건 사실이니까 제도 만들 때 고민을 해야 한다. 두 개가 같이 가야 되는데, 누가, 먼저냐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자율성 줘야 한다. 동의를 해야 한다는 것은 애기를 했다. 안 대표와 자율성 줘야 한다는 얘기는 큰 틀에서 애기했고, 컨센서스가 이뤄졌다.”(오세정)

: 12:26 pm: bluemosesErudition

“설교가 세상의 젊은이들에게 강하게 끌리는 것은, 그들이 좋아하는 영화 영상을 보여 주거나, 옷을 편하게 입거나, 세련되게 설교하기 때문이 아니다. 대신 설교자들이 그들의 마음과 문화를 잘 이해한다면 청중은 비록 설교의 결론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설교의 논리 전개에는 강하게 공감할 것이다. 이것은 스타일이나 프로그램의 문제가 아니다. … 우리는 복음의 본질과 적용에 대해서 오랫동안 숙고했다. 그리고 뉴욕의 문화에 대해서도 오랜 기간 열심히 공부했다. 우리들 가운데 있는 그리스도인과 비그리스도인의 감수성에 대해서, 도시 중심부의 정서적, 지성적 지형에 대해서도 숙고했다. 국제적 중심 도시에서 우리가 하는 이 사역의 효과성에 있어서, 이 숙고와 의사 결정의 특성과 과정이 그 결과보다 훨씬 중요한 역할을 했다. 우리는 조나단 에드워즈가 ‘복음의 규칙’이라고 부른 것을 따르기 원했다.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기쁘게 하기 위해 살지 않으신 것처럼, 우리는 단지 개인의 취향을 만족시키고 행복하게 하기 위해서 음악을 선택하거나 설교 예화를 택하지 않았다.”(팀 켈러)

* 휴스턴과 각 시·도 가정교회 목자(상)은 달라야 한다. 똑같을 수 있을까. 사고를 멈춰선 안 된다.

: 11:54 am: bluemosesErudition

“Her face was no longer sad.”

: 11:13 am: bluemosesErudition

“Trust in the Lord with all your heart, and do not lean on your own understanding. In all your ways acknowledge him, and he will make straight your paths.”(Proverbs 3:5‭-‬6)

: 11:06 am: bluemosesErudition

“떠날 때 안 떠나면 더 안 좋게 떠난다.”

: 11:02 am: bluemosesErudition

골방 감금, 소통 곤란, 관리 용역 | 책무 위배, 평판 훼손

: 2:14 am: bluemosesErudition

애덤 스미스와 쇠얀 키에르케고어 _ 윤리의 전복과 복원

: 2:08 am: bluemosesErudition

<고통의 문제>에서 루이스는 우리가 하나님의 선하심을 우리 자신의 선에 대한 이해와 연관시키려 할 때 딜레마에 봉착하게 되는 점을 주목했다. 한편으로, 하나님은 우리보다 현명하시고, 그분의 길은 우리의 길보다 더욱 고차원이기 때문에, 우리에게 선해 보이는 일이 사실은 선하지 않을 수 있고, 악하게 보이는 것이 사실은 악하지 않을 수 있다. 다른 한편으로, 만일 이것이 사실이라면, 하나님을 선하다고 부르는 것도 의미 없는 외침이 될 수 있다. 만일 그분이 우리의 의미에서 선하지 않다면, 우리는 그분께 도덕적 기반에서가 아니라 두려움으로 순종할 것이다. 하나님께 그런 식으로 순종하는 것은 권세 있는 독재자에게 복종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루이스에 따르면, 이러한 딜레마를 피할 수 있는 길은 우리의 도덕적 판단들이 하나님의 것과는 실제로 다르지만, 그렇다고 근본적으로 다른 것은 아니라는 점을 인식하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을 염두에 두고 보면, 하나님의 선하심은 “우리의 선함과 흑과 백처럼 다른 것이 아니라, 완벽한 원과 처음으로 바퀴를 그리려는 어린 아이의 시도가 다른 것과 같다. 그러나 어린 아이가 그리는 법을 배웠을 때, 아이는 그 순간 자기가 그린 원이 처음부터 그리려고 했던 바로 그 원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 2:00 am: bluemosesErudition

“유진 피터슨 회고록의 초점은 온전히 ‘목회’다. 사실 이 책을 보기 전까지는 목사라는 정체성이 이렇게까지 그의 핵심을 이루는 줄 몰랐다. 처음 피터슨을 소개받았을 때의 프로필이 캐나다 밴쿠버에 있는 리젠트 칼리지의 영성신학 교수였고 그의 책이 아주 쉽게 읽히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피터슨에게 목사라는 정체성이 그렇게 중요한 줄 몰랐다. 한국에서는 교수가 목사보다 위에 있지 않은가. 한국의 신학교 교수들은 목사라는 직함도 놓고 싶지 않아 어느 교회에 살짝 적을 두지만, 주된 활동은 교수로서 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피터슨은 자신을 처음부터 끝까지 목사로 여겼다. 그의 저술 활동은 목회와 분리된 활동이 아니라 목회의 일환이었다. 29년 동안 한 교회에서 목회를 한 그의 이력은 그냥 어느 교회에 적을 둔 생활이 아니라, 그의 생활의 중심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