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치에 맞지 않는 말을 억지로 끌어 붙여 자기에게 유리하게 하다.
“소설을 쓰는 일이 저한테는 직업이잖아요. 소설을 써서 먹고 사니까 내 직업인데, 소설이 잘 팔리고 돈을 벌게 해줘야 하는데, 그렇지가 않아요. 그러면 소설이 나에게 뭘까요. 소설이 내 삶을 지탱할 수 있는 바탕이 된다는 것에는 경제적인 이유가 아닌 또 다른 이유가 있어야겠죠. 세계와 존재에 대한 탐구가 다른 그 이유에요. 그래야 소설이 있는 거고요. 탐구가 병행되어야만 예술작품이고 문학이에요. 문학을 완전히 상품이라고만 부를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고요. 즉 소설이 내 생계를 유지해준다는 것과는 별개로 소설이 나에게 새로운 세계에 대한 모색, 탐구를 제공해줘야 하는데, 그렇다면 과연 ‘내가 보고 느끼는 현실이 과연 확신할만한 것인가’ 그렇게 파고들어갔더니 소설이 변했어요. 작년부터 많이 달라졌어요. 과거에는 일단 서사 중심, 다소 주제 중심이었죠. 어떤 이야기 속에 나의 의도를 싣고 독자가 공감을 얻길 바라는 마음이 있었고, 거기에 동원되는 제재, 곧 이야깃거리는 주로 현실에서 찾았고요. 전통적인 방식이었던 거죠. 그런데 앞으로 달라질 거예요. 일단 내 소설의 전제로 놓여있던 현실, 일상을 빼버렸어요. 현실 자체를 반영, 모방한 것이 지금까지의 방법이었다면 이제부터는 현실 자체를 의심하고 부정하거나 믿지 못하니까, 완전히 달라요. 현실을 반영하는 게 아니라 현실 자체를 모방할 수도 반영할 수도 없는, 불명확하고 비정형적인 어떤 형태를 갖지 않은 걸로 그려지기 시작하고 있어요.”(구효서)
“어떤 비밀의 통로 같은 것이 있고 그걸 통과하면 내가 달라져있는 이야기를 좋아해요. 그래서 통로를 계속 만드는 것 같고요.”(김중혁)
“혀는 자꾸 상처를 맛보려 한다.” “소풍이라 말하려 했는데 슬픔이 와 있다.” “뒤에서 안아주는 것을 좋아한다. 귀지 파주는 것을 좋아한다. 고양이의 관능과 무심함을 좋아한다. 무신경하고 무성의한 사람은 좋아하지 않는다. 아름다움과 슬픔과 리듬을 믿는다. 꽃보다 나무. 서슴서슴한 사귐을 옹호한다. 영롱보다 몽롱. 미신을 좋아한다. 집필 오르가슴을 느낄 때 충만하고 잎사귀를 들여다볼 때 평화롭다. 한 생은 나무로 살 것이다. 병이 될 만큼 과민한 탓에 생활의 불편을 겪기도 한다. 그러나 시인의 예민함은 스크래치 기법의 뾰족한 칼끝 같은 것이라고, 그것으로 검은 장막처럼 칠해진 어둠을 긁어내는 것이라고 우기며 위로한다. 타인을 이해할 수 있다고 믿지 않지만 상상하려 애써야 한다고 다짐한다. 그렇게 애쓰며 쓰는 일로 절반의 삶을 쓰고 싶다. 무어든 더디고 늦되는지라 뒤늦게 시를 만났고, 이제야 시집을 준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