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chive for June 18th, 2017

June 18, 2017: 5:45 pm: bluemosesErudition

소소한 기쁨, 날마다 솟는 힘

: 5:42 pm: bluemosesErudition

Feedback mechanism to help society selfcorrect _ “Because the problems scream, but the solutions whisper, we often overlooked them.”

: 3:36 pm: bluemosesErudition

Captain Miller: [weakly mutters something]

Private Ryan: [leans in closer] What, sir?

Captain Miller: James, earn this… earn it.

—–

Old James Ryan: [Last lines, addressing Capt. Miller’s grave] My family is with me today. They wanted to come with me. To be honest with you, I wasn’t sure how I’d feel coming back here. Every day I think about what you said to me that day on the bridge. I tried to live my life the best that I could. I hope that was enough. I hope that, at least in your eyes, I’ve earned what all of you have done for me.

Ryan’s Wife: James?…

[looking at headstone]

Ryan’s Wife: Captain John H Miller.

Old James Ryan: Tell me I have led a good life.

Ryan’s Wife: What?

Old James Ryan: Tell me I’m a good man.

Ryan’s Wife: You are.

[Walks away]

Old James Ryan: [Stands back and salutes]

: 3:14 pm: bluemosesErudition

“Even though the god Baal’s falseness had been exposed by the three-year drought, Ahab was stubborn and foolish enough to seek out a source of water.”

“Although he feared God, he was instilled with the fear of Ahab’s merciless tyranny. He was ‘remnant of the kingdom’ who needed comfort and assurance.”

: 1:22 pm: bluemosesErudition

루이 조르주 탱의 <사랑의 역사 - 이성애와 동성애 그 대결의 기록>은 이성애가 사회의 기본 요소가 된 것은 17세기 후반부터였다면서, 그 이전은 이성보다 동성끼리의 친교가 더 소중한 ‘동성사회성’ 높은 사회였다고 주장한다. 17세기 후반 이전은 봉건사회였으며, 봉건사회를 지탱한 것이 남성들로 이루어진 전사(귀족) 계급이었다는 것을 상기하면 쉬이 납득이 된다.

“봉건 문화의 토대는 오로지 남성만의 세계다. 남자, 특히 전사는 흔히 여자의 세계로부터 멀리 떨어져 살았다. 이 기사들은 개인적인 용기, 즉 프뤼돔(prud’homme, 용맹스러운 남자)의 용기와 봉건 질서에 대한 충성스러운 복종의 윤리, 즉 봉신의 윤리를 발전시키는 경향이 있다. 집단생활과 군사작전 그리고 위험을 함께한 경험이 불러일으키는 열광은 명백히 단순한 동지애를 종종 넘어서는 매우 확고한 유대를 낳았다. 이러한 사나이들 간의 우정은 흔히 두 기사로 하여금 죽음도 불사하도록 만드는 열렬한 관계로 발전되기도 했다.”

<롤랑의 노래>에서 보았듯이 기사도 문학 본래의 이상은 동성사회의 규범을 다루는 것이었으나, 이성애가 침투하면서 기사들이 왕이나 영주의 부인에게 충정을 바치는 것으로 변질되었다. 루이 조르주 탱의 <사랑의 역사>는 분석을 생략했지만, 중세를 지나면서 남자들만의 동성문화가 추방되고 이성애를 기반으로 한 궁정문화가 예찬되어야 했던 이유는 무장한 기사들을 순화하기 위해서였다. 노베르트 엘리아스라면 궁정의 귀부인이 중세 남성들 사이의 격렬한 우정을 흡수해가는 이 과정을 ‘문명화 과정’이라고 불렀을 것이다.

나치는 집권 이전부터 동성애자를 국가와 민족의 적으로 간주했으나, 정권을 차지한 히틀러는 왠지 동성애자 단속을 망설였다. 그 까닭은 당·친위대·돌격대·히틀러청소년단 등 나치 체제를 뒷받침했던 주축 조직이 모조리 ‘남성동맹’이었기 때문이다. ‘봉건적 의리’와 ‘사적인 결속’으로 짜인 나치의 역동성은 루이 조르주 탱이 우정보다 더 강렬한 감정이라고 말했던 높은 동성사회성에서 나온다. 나치는 자기 조직을 탈성화(脫性化)하면 “남성동맹의 역동성이 약화되지 않을까 우려했다”. 나치가 동성애자 적발에 전력하게 된 것은 소련과 전쟁을 벌이면서, 내부의 적을 판시할 필요 때문이었다. 동성애자 문제로 나치가 직면했던 곤경은 동성애 혐오증이 극도로 남성화된 집단이나 사회에서 일어나는 자기방어라는, 잘 알려진 결론과 만나게 해준다.

고(故) 기형도 시인은 게이들의 크루징(cruising, 공공장소에서 데이트 상대를 찾는 일) 장소였던 파고다극장에서 급사하는 바람에 게이였다는 소문이 끈질기게 따라다닌다. 또 죽기 한 해 전인 1988년, 대구에 있는 나를 찾아와 “그에게 내 고통의 윤곽을 조금 말해주었다”라고 썼던 여행일지가 마치 ‘커밍아웃’을 한 것인 양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고 있다. 그 장소로 말하자면 게이가 아니더라도 누구나 호기심을 느낄 서울의 명소인 데다가, 그는 기자이자 시인이었다. 또 그는 자기 시의 진로를 놓고 고민을 털어놓았으나, 나는 그의 말을 기억도 하지 못할 만큼 무심히 넘겨들었다. 기형도를 ‘게이 아이콘(gay icon)’으로 삼으려는 사람들은 그의 시집에 성 소수자에게서만 볼 수 있는 ‘퀴어(queer) 감수성’이 충만하다고 하지만, 지배적인 고정관념을 되풀이한다는 뜻에서 나쁜 시인은 다 ‘마초’이고, 소수자의 목소리를 실어 나른다는 뜻에서 좋은 시인은 다 ‘게이’다. 설령 그가 진짜 게이라고 한들, 본인을 포함한 그 누구에게 모욕이 되길래 이런 석명까지 한다는 말인가? 다만 너무 늦기 전에, 나만 아는 사실을 밝혀둘 뿐이다.

_ 장정일, 2015. 8. 25.

: 1:14 pm: bluemosesErudition

외국어 익힘에서 Writing이 설명할 수 있는 지식이라면, Reading은 설명할 수 없는 지식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