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chive for June 28th, 2017

June 28, 2017: 11:51 pm: bluemosesErudition

1980년 11월 16일 일요일 아침. 파리 시내 울름가에 위치한 프랑스 최고 명문 고등사범학교 교수 아파트에서 루이 알튀세르는 부인 엘렌느의 목을 마사지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그는 열 살이나 위인 부인의 몸이 굳어지는 것을 발견한다. 그가 마사지를 하던 순간과 “내가 엘렌느를 죽였다”고 깨달은 순간 사이에는 의식의 空洞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곧장 셍트안느병원으로 실려간 것은 부인의 시신이 아니라 알튀세르 자신이었다. 그의 정신과 담당의사 르네 디아킨은 그 순간 그가 정신착란 상태였으므로 그에게 살인책임이 없다는 진단을 내렸다.

사법적으로 무죄판결을 받은 알튀세르는 그후 1990년 가을 사망할 때까지 10년 동안 ‘살아 있는 죽은 자’였다. 법적 권리가 없어지고 어떠한 문서에 서명할 권리마저 빼앗겼다. 그러던 그가 사후 1년6개월 만에 입을 열었다. 의료기록의 비밀보장 때문에 재판이 끝난 후에도 일반에 공개되지 않던 그의 얘기가 그가 구술해놓은 원고에 의해 자서전으로 출판된 것이다. 파리의 전통 깊은 출판사 스톡과 4만~5만장에 이르는 알튀세르의 모든 문서를 기증받아 보관하던 현대출판기념연구소(IMEC)가 공동으로 출판한 이 책은 프랑스가 낳은 금세기 최고의 마르크스주의 철학자 알튀세르 바람을 프랑스에서 다시 불러일으키고 있다. 출간된 지 한달도 못돼 평론가들은 이 책이 그의 가장 유명한 저서 《마르크스를 위하여》보다 더 오래 남을 것으로 평가한다.

드골의 어록에서 제목을 따온 “미래는 오래 지속된다”. 오래 전부터 그의 이론과 이론적 배경, 즉 그의 삶을 연구하던 얀 물리에 부탕의 요청에 따라 알튀세르는 자신의 인생을 구술했다. 또 이 자서전의 출간을 염두에 두고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직접 서문까지 썼다. “나는 그 자체로서는 관심도 끌지 못할 내 인생의 자질구레한 이야기를 쓰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나는 모든 심리적 지각이 그러하듯이 나의 고뇌에 환영적으로 투영되어 내가 지각하고 느낀 대로만을 이야기 하겠다. … 단지 나에게 일어났던, 아직도 끝나지 않은 미궁의 미스터리를 좀더 잘 보려는 의도에서일 뿐이다.”

알튀세르가 처음 정신과 치료를 받은 때는 그가 30세였던 1948년경이다. “이 여성을 보호하는 것이 나에게 주어진 임무”라고 느껴 열렬히 사랑한 부인 엘렌느 리트만 레고티엥. 그와 처음 사랑의 행위를 나눈 직후부터 그는 죽을 때까지 정신과 치료를 받는다. 그의 병명은 ‘조기 심신 상실’과 ‘극심한 우울증’. 평생 동안 전기충격 요법을 받고, 신경 안정제와 우울증 치료제를 복용했다. 때로는 몇 주 또는 몇 달 동안 정신병동에 격리되기도 했다. 그 원인을 이 자서전은 바로 원초적인 데서 찾는다.

1918년 알자스에서 이주해온 알튀세르와 베르제 두 가문은 알제에서 인연을 맺는다. 자기가 죽도록 사랑한 연인을 1차 대전으로 잃은 신부가 연인의 큰형과 결혼한 것이다. 아들에게 연인의 이름을 그대로 붙여준 어머니는 아들에게서 연인의 환영을 본다. 무일푼이었다가 큰 은행의 대표가 돼 막강한 힘을 가지게 된 아버지 역시 어린 알튀세르에게는 ‘자연적 본능’이 무엇인가를 가르쳐주지 못했다. 성녀 같은 어머니는 그에게 모든 육체적 접촉을 금지시켰다. “국가의 이데올로기적 체제의 가장 억압적인 형태는 가정과 학교”라고 그는 되풀이 말했다. 그는 ‘자연적 본능’에 억압 받은 자기가 ‘이상’만을 향해 줄달음 친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고 술회했다. 그가 2차대전 때 독일군 포로가 돼 수용소에서 열렬한 공산주의자에게 쉽게 매료된 것도 이같은 ‘이상’에서 비롯된 것이다.

: 11:36 pm: bluemosesErudition

“아름다운 사람을 만나 영원히 살 자식을 만드는 일이 <향연>의 사랑이다.”

_ 2010년 1월 7일 / 하얀 케임브리지에서 / 강철웅

: 1:17 pm: bluemosesErudition

“지난 2013년 아시아 최초로 일본 문부과학성에서 국제적으로 공인된 IB 디플로마(International Baccalaureate Diploma)라는 국제 공통 고교 학위 과정을 공교육에 도입했습니다. 이는 일본 정부가 공교육의 경쟁력 상실을 일본의 잃어버린 20년의 원인으로 파악하고, 당면한 난제들의 해법을 교육에서 찾겠다는 국가 차원의 선택이었습니다. 암기 위주의 주입식 교육에 대한 한계를 느낀 일본 문부과학성이 대대적으로 고등학교 교육과정과 대입제도를 수술하기로 한 것입니다. 국가가 앞장서 IB 커리큘럼을 들여오고 교육과정 및 시험의 전 과정을 모두 일본어로 번역하고, 2018년까지 일본 전역 200여 개 공립학교에 IB를 확산하겠다고 결정했으며, 일본 내 대학들이 IB 결과로 대학시험을 대체하게 했습니다.”

: 1:03 pm: bluemosesErudition

1.
니체의 『우리 교육 기관의 미래(Über die Zukunft unserer Bildungsanstalten)』(1872)라는 강연 모음집 머리말에 자신의 이야기는 조용한 사람들을 위한 것이라는 구절이 발견된다. 그는 교육에서 필요한 것은 즉각적이고도 과감한 개혁이라면서 당장 국가가 나서서 새로운 제도를 도입하면 된다고 떠드는 독자는 자신이 문제 삼는 것이 무엇인지 이해하지 못할 것이라고 미리 독자의 자격을 한정했다. 그리고 곧이어 교육 문제를 잘 알고 있다며 자신의 특별한 지론을 펼칠 생각부터 하는 사람도 부적절한 독자로 꼽았다. 이 책에 수록된 강연을 한 시기는 니체가 아직 20대의 나이로 바젤 대학의 고전문헌학 교수로 재직하던 때다.

2.
경쟁이 사라지지 않는 한 어떤 수를 쓰든 입시 지옥을 완전히 없앨 길은 없다. 그런데, 현 체제 하에서 수험생을 둔 학부모들이 입시 경쟁을 없애는 것을 간절히 원하는 것도 아니다. 내 자식이 그 경쟁에서 이길 수 있는 제도를 만들어 달라는 것이다. 그래서 가령 모든 대학을 다 일류 대학으로 만들어 누구나 일류 대학에 들어갈 수 있게 해 주는 것도 해결책이 되지 못한다. 누구나 다 들어갈 수 있는 대학에 들어가는 것은 경쟁에서 이기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누구나 들어갈 수 없는 일류 대학은 소수가 있어야 하는데, 성적이 좀 떨어지더라도 (혹은 인성이 좀 나쁘더라도) 내 자식만큼은 거기에 진학하게끔 해주는 제도를 만들어 주었으면 하는 것이 보통 수험생 부모의 마음이다. 원칙적으로 들어주기 어려운 것을 바라는 마음이다.

3.
입시 제도의 개선만으로는 달성할 수 없는 무게의 목표를 입시에 실어 놓고 교육 전문가들이 묘책을 내서 그 문제를 일거에 풀어 달라고 요구하는 것은 무리한 짓이다. … 입시는 교육 과정상의 일이지만 전형적인 사회학적 문제다. 그것도 엄청나게 과부하가 걸려 있는 사회학적 문제인지라 애당초 교육적인 관점에서만 접근하는 것은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4.
우리나라 사람 대부분은 교육을 어디까지나 수단적 가치를 실현하는 일로 인식하고 있다. 다시 말해 가르치고 배우는 것을 다른 무엇을 위한 수단적 행위로만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교육의 주된 가치는 오직 가르치고 배우는 행위를 통해 전수되는 지식이 어떤 것이냐에 따라 결정된다. 예컨대 자동차공학 지식을 전수하는 행위의 가치는 자동차공학 지식, 좀 더 정확하게는 자동차의 가치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다. 이 예를 일반화한 아주 간명한 내용이 교육의 가치에 대하여 우리가 이해하는 것의 거의 전부라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5.
본래 제도는 이념을 실현하는 방안이다. 교육 제도도 물론 교육 이념의 실현을 위해 마련된 것이다. 그런데 우리의 경우에는 교육 이념이라고 할 만한 것이 없다. 제도를 마련하면서 역점을 두는 대목을 보면 지식 전수의 효율성이 그 내용이라 해야겠는데, 그 정도의 내용은 교육 이념이라는 말에 제대로 값하는 무게를 가진 것이 못 된다. 나는 이 글을 시작하면서 교육은 사람과 사람이 만나서 이루어지는 것이라는 점부터 강조를 했다. 교육 이념이라면 바로 그 대목을 어떤 방식으로든 내용으로 포함해야 한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곰에게 재주 넘기를 훈련시키는 것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사람의 교육에서 가르침의 효율만이 추구해야 할 가치의 전부인 것처럼 이념의 내용을 부실하게 방치해 두는 것은 사실상 교육의 포기를 뜻한다.

6.
실제로 우리의 삶은 부모와의 첫 만남에서부터 시작해서 그 뒤 끊임없는 타자와의 만남을 통해 꾸며진다. 나의 품성, 나의 세계관, 인생관 그리고 나의 행, 불행 등 나의 정체성을 이루는 모든 것이 그들 타자들과의 만남의 과정에서 확보된다. 특별한 철학 교육을 받지 않아도 누구나 본능적으로 그것을 다 알고 있다. 그래서 그 어린애들은 누가 시키지 않아도 타인과 어떻게 지내야 할지 열심히 배운다. 남의 기분을 헤아려 당기고 늦추고 나서고 물러설 때를 시행착오를 통해 가려내면서 거기에 적응한다. 그것은 학과 공부처럼 집에 가서 나 혼자 예습 복습하는 일도 아니었다. 또 학과 공부처럼 훗날의 삶을 위해 쟁여 놓는 것도 아니었다. 그것은 우리가 항상 현장에서 남과 함께 배우고 동시에 행하는 것이었다. 즉 공부가 곧 삶이기도 했던 것이다. 그 공부를 제대로 할 수 없는 상태가 곧 자기 폐쇄다. 그런 상태는 학과 공부에서 낮은 성적을 받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이 심각한 것이다.

7.
부모가 자식의 정체성을 생물학적인 측면에서 결정지어 준다면, 선생은 학생을 그가 위치해 있는 세계의 문화 속으로 안내해 그의 정체성에 문화적 배경의 깊이가 스며들게 해 준다. 그렇게 함으로써 선생은 학생을 역사 속의 존재로 성장하게 해 주는 것이다.

8.
우리나라의 반지성주의는 무엇보다도 인문 지성을 극도로 위축시키는 데 한몫을 단단히 하고 있다. 가령 문학은 가슴을 따뜻하게 해 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 전부라고 여기는 것이 그 대표적인 예다. 문학 작품을 읽는 것이 산업 역군으로 애쓰느라 거칠어진 마음을 보듬어 쉬게 해 주고 더욱 열심히 일하도록 활력을 충전해 주는 일이라고만 생각하는 사회에서는 문학을 비롯한 인문학이 인간 삶의 문제를 심각하게 고민하는 과제를 수행하고 있다는 사실이 이해될 리 없다. 인간 삶의 문제를 심각하게 고민하는 것은 좀 더 의미 있고 좀 더 훌륭한 삶을 꾸미기 위한 것인데, 이미 그런 문제의 답이 명확히 주어졌다고 전제하는 산업 역군의 사회에서는 그런 고민을 하는 소위 인문 지성은 불필요한 것이고 산업 역군의 감성을 상대로 하는 기쁨조만이 필요한 것이다. 인성 교육의 영역을 감성에 국한하여 이해하는 것은 은연중 인문 지성의 필요를 부인해 왔던 시대 분위기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나는 의심한다.

9.
소크라테스는 자신의 차례가 되어 에로스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하면서 곧 아리스토파네스의 에로스에 대한 정의를 부정하는 반론을 펼친다. 자기 것이라고 해서 덮어놓고 사랑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 그 반론의 요지다. 사람들은 자신에게 속한 신체 부위라도 병들어 썩으면 잘라 낸다. 그렇듯 원래의 자기인 반쪽에서도 좋지 않은 것과는 합치려 들지 않으리라는 것을 시사한다. 소크라테스가 보기에 인간의 영혼은 아름답고 훌륭한 것에 대한 갈망을 가지고 있는데, 바로 그 갈망이 에로스라는 것이다. 그 갈망은 자신이 충분히 아름답고 훌륭하지 못하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다. 그래서 불완전한 인간의 영혼은 계속 그 갈망을 가지고 존재한다. 아니 아예 그 갈망의 힘이 바로 영혼의 정체다. 그러니까 사랑을 이루는 것은 좀 더 아름답고 훌륭한 것을 자신의 것으로 향유하는 것이라 할 수 있겠다. 그 말을 다시 해석해서 사랑을 이룬다는 것은 인간이 자신의 자아를 아름답고 훌륭하게 확대하는 것이라고 해도 좋을 것 같다.

10.
인간은 아름답고 훌륭한 것을 되도록 오래 확보하기 위해 영원을 모방하는 짓을 한다. 후손을 남기는 방식 즉 생식 행위를 통해 확보한 아름답고 훌륭한 것이 가능한 한 지속되게 하는 것이다. 생식이란 인간이 서로 아름답고 훌륭하다고 여겨지는 짝을 찾아 둘의 아름답고 훌륭함을 합쳐 새로운 생명체에 구현해 후세에 남기는 것이다. 그래서 이성 간의 사랑은 어쨌든 자식을 생산하는 성교를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다.

11.
‘같이 있음’ 또는 ‘만남’을 뜻하는 고대 그리스어의 syunousia는 때로 성교를 시사하는 뜻으로도 쓰인다. 그런 점에서 플라톤이 생각한 교육은 synousia라는 말로 아주 적절하게 표현될 수 있다. 플라톤이 말하는 교육은 성교처럼 사람과 사람이 밀도 높게 만나는 일이다. 그런 만남이 바로 이 글의 주제인 사람과 사람의 만남이다. 그 만남은 아름다움과 훌륭함에 대한 갈망인 에로스에 의해 성사된 것이기에 그냥 만나는 사람들 서로의 가슴을 따뜻하게 해 주는 선에서 끝나지 않는다. 다시 말해 아리스토파네스가 그린 반쪽끼리의 만남에서와 같이 둘이 아무 일도 하지 않고 그냥 부둥켜안기만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 만남은 갈망의 대상인 아름다움과 훌륭함을 끊임없이 추구하며 마치 자식을 낳듯이 결실로 만들어 남기는 일을 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자신의 존재 전체를 걸고 하는 일이다. 무엇보다도 무엇이 아름답고 훌륭한 것인지 인지하고 좀 더 아름답고 훌륭한 것을 찾아내는 탐구를 핵심으로 하는 일이다. 낮은 단계에서는 덮어놓고 끌리는 것 같아 충동적인 감성만이 작동하는 것처럼 여겨질지 몰라도 정신적인 것에 관심을 돌리는 단계에 이르게 되면 정말 아름다운 것, 훌륭한 것을 그렇지 못한 것, 덜 그런 것과 분간해 내는 지성이 작동한다. 듣기에 좀 이상하겠지만, 그 단계에서의 만남은 지성적인 성교와도 같은 것이겠다.

12.
사람과 사람의 만남이 『향연』의 아리스토파네스가 그린 것과 같은 결합이 아니라 아름답고 훌륭한 것에 대한 에로스에 의해 추동(推動)되어 좀 더 아름답고 훌륭한 것을 결실로 얻고자 하는 것이라면 플라톤에게서 가르침은 그와 같은 결실을 목표로 젊은이를 성장시키는 내용을 담은 것이어야 함은 당연하다.

13.
오늘날 우리가 차세대에게 무엇을 가르칠 것인가를 논의할 때 그 논의가 제 방향에서 벗어나지 않게끔 이끌어 주는 것은 좀 더 아름답고 훌륭한 것이 무엇인지에 관한 문제의식일 것이다. … 학교에서 무엇을 가르쳐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별 논의를 하지 않는다는 것이 오늘날 우리 사회의 두드러진 특징 중의 하나다. 교육 내용에 관한 문제는 비교적 답이 간단하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즉 대학에서는 이 사회의 발전에 기여할 수 있는 전문 지식을 가르치면 되고, 그 이전 단계의 학교에서는 그 전문 지식을 받아들일 수 있는 지적 바탕을 마련하는 과목을 가르치면 된다는 것이 우리 대부분이 생각하는 정답이다. 플라톤의 교육에 대한 생각을 따라 그 답을 해 보라면 사회 발전이라는 만병통치약과도 같은 범용의 구호를 동원하는 대신 사회 구성원 각자가 다 아름답고 훌륭한 삶을 살아갈 수 있게끔 해 주는 내용을 가르쳐야 한다고 답을 해야 한다.

14.
실용을 이야기할 때마다 나는 유클리드 기하학을 생각한다. 기하학은 다 알다시피 서양 말 geometry의 어원에서 읽어 낼 수 있듯이 고대 이집트의 측량술이 그리스로 수입, 변형되어 탄생한 학문이다. 나일 강 유역의 넓은 비옥한 땅이 있었던 이집트에서 측량술은 참으로 실용적인 지식이었다. 홍수가 난 후 토지를 측량하여 소유권을 재확정해 준다는 현실의 요구에 부응하는 지식이었다. 그러나 그런 측량할 땅을 가지지 못한 고대 그리스에서 그 지식은 쓸모가 없었다. 그럼에도 고대 그리스인들은 그 지식을 받아들여 그것을 현실의 땅 대신 머릿속에 순수 공간을 구상해 그 위에 도형을 그리고 그 도형들의 관계를 관조하는 학문으로 발전시켰다. 그 학문은 참으로 비실용적이었다. 유명한 무한의 공리를 생각해 보자. 무한까지 그은 두 직선이 만날까 또는 만나지 않을까에 관한 언명을 담은 이 공리는 정말 쓸모없는 내용이다. 무한한 크기의 땅도 없고 땅 위에 하릴없이 한없이 직선을 그을 일도 없는 것이 현실이다. 심지어 삼각형의 두 변의 길이의 합이 다른 한 변의 길이보다 크다는 것을 증명하는 정리도 있다. 먹이를 앞에 놓고 우회로를 택하지 않고 곧장 달려가는 개조차도 아는 것을 짐짓 모르는 것처럼 증명해 보라는 요구는 참으로 한가한 짓이다. 그렇지만 무한을 그리고 우아한 논리적 추론의 절차를 생각해 내는 인간 머리의 지적 모험은 그 자체로 참으로 아름답고 훌륭해 보인다. 유클리드 기하학의 체계는 선생과 학생이 만나 지적인 모험을 통해 만들어 낸 아름답고 훌륭한 결실이다. 그리고 그것은 플라톤이 생각한 교육을 통해 이룩된 성취다. 다시 말해 아름답고 훌륭한 것에 대한 갈망을 지닌 인문 지성의 성취다. 눈앞의 실용에 사로잡혀 있으면 그런 성취는 불가능하다.

: 11:46 am: bluemosesErudition

“요즘 사람들은 흔히 기원(genesis)으로 본성을 이야기하는 데 대해 ‘발생론적 오류’라는 말로 반감을 드러낸다.” 예컨대 분석철학은 영미 제국주의 철학이다.

: 11:33 am: bluemosesErudition

If any of you lacks wisdom, let him ask God, who gives generously to all without reproach, and it will be given him. But let him ask in faith, with no doubting, for the one who doubts is like a wave of the sea that is driven and tossed by the wind.

: 2:43 am: bluemosesErudition

1.
사형 선고를 받은 친구에게 가족과 이별할 시간을 주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내걸었던 고대 피타고라스 학파 사람들의 우정

2.
피타고라스의 교단은 그 자체가 신비주의적인 분위기를 가졌으면서도 신비한 것을 배척하였다. 피타고라스 교단은 남성만으로 구성되어 있었고, 그들에게는 극단적인 금욕과 사고의 순수성이 요구되었다. 더 나아가 그들은 실제 생활에서도 이른바 ‘매개’ 기능을 갖는, 즉 두 세계에 걸쳐 있다고 여겨지는 것들을 철저하게 배제했는데, 그 대표적인 것의 하나가 콩을 먹지 말라는 지침이었다. 콩은 모든 신화적 사유체계 속에서 모호한 것으로 나타나며, 그런 까닭에 피타고라스는 콩을 악마적인 것으로 여겼다.

3.
피타고라스는 삶을 세 가지 종류 즉 상인, 운동선수, 관객으로 나눴다.

4.
유클리드는 분명히 피타고라스의 전통에 속해 있었다. 청중의 한 사람이 그에게 피타고라스 정리의 실용적 가치가 무엇이냐고 묻자, 유클리드는 자기 노예에게 경멸어린 어조로 이렇게 지시했다고 전한다. “저 사람은 학문에서 이득을 얻으려 하는구나 – 1전을 주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