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chive for January 26th, 2018

January 26, 2018: 6:06 pm: bluemosesErudition

“한국에 대학이 급증한 건 1995년 김영삼 정부 시절 대학 설립 기준이 바뀌면서부터다. 그전까지 4년제 대학을 세우려면 최소 33만m²의 학교부지와 부지 비용 외에 1200억 원 이상의 재원 등이 있어야 했다. 하지만 당시 교육부는 ‘백화점식 종합대학 일변도에서 벗어나 특성화된 대학이 필요하다’며 인가 기준을 확 낮췄다.”

“2024년이면 사학연금 전체 수입의 16%가 줄어든다. 이 시기는 한 해 출생아 수가 처음으로 50만 명 밑으로 떨어진 ‘저출산 세대’(2002년생 이후)가 4년제 대학 4학년까지 진학하는 때다. 저출산 여파로 정원 미달 사태가 속출하면 4년제 대학 73곳, 전문대 52곳이 존폐 위기에 처할 것으로 보인다. 만약 이 대학들이 문을 닫으면 교직원 약 4만 명이 실직 위기에 놓인다. 현재 14만 명인 사립대 전체 교직원 10명 중 3명이 내던 연금액(2850억 원)이 사라지는 셈이다.

: 3:30 pm: bluemosesErudition

: 3:06 pm: bluemosesErudition

19~21. 니체가 설명하는 십자가 사건의 의미를 생각하자. 그 설명에 따르면, 인간들 모두에게 죄의식과 양심의 가책을 불러일으키는 신의 목소리가 내면화되기 위해 먼저 신이 인간의 손에 죽어야 했고 이를 통해 어떤 탕감할 수 없는 채무관계를 확립해야 했다. 맑스에 따르면, 황금이 상품의 질서를 장악하는 일반적 등가물(화폐)의 위치에 오르기 위해서는 스스로 사용가치를 버려야 했다. 스스로 상품의 자격을 부정하는 조건에서만 황금은 상품 일반의 척도로서, 등가적 교환의 질서를 정초하는 형이상학적 실체로서 다시 태어날 수 있었다. 프로이트에게서도 마찬가지다. 아버지가 아들들의 세계에 입법자로 군림하기 위해서도 죽어야 한다. 이상적 인간으로서 아버지가 행사하는 권위는 부친살해 뒤에 따라오는 후회 속에서, 아들들의 애도 속에서 탄생한다. 초월적인 것은 모두 장례행렬 끝에서 성립하는 것이다. (중략) 근대적 주체는 점점 더 자신의 자연적 조건을 제거해갔고, 이를 통해서 사물의 질서를 벗어나고자 했다. 근대적 주체는 점점 더 자신을 추상화해갔고 선험화했다. 그것은 자연의 중력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자발적으로 자연적 중량을 해소해가는 과정, 곧 유령이 되어가는 과정이다. 그런 유령화를 댓가로 데까르뜨적 자아는 자연 위에 군림하는 입법적 지위에 올라설 수 있었고, 이 세계를 통일하는 권력을 차지할 수 있었다. 헤겔이 말하는 것처럼, 그런 권력의 정점에서 자아는 어떤 공허한 끈이 된다. “추상적인 존재자인 이런 자아는 주체성으로서 동시에 상이한 여러 이름들을 지배하는 권력이고, 이 이름들의 계열을 자신 속에 고정하고 확고한 질서 속에 보존하는 공허한 ‘끈’(band)이다.” 이름의 질서, 그리고 그것이 대신하는 사물의 질서는 자아라는 공허한 끈에 의해 형성되고 조종되는 어떤 그물을 닮았다. 세계가 어떤 집이라면, 그것은 어떤 거대한 거미집이다. 유령화된 자아의 모습은 끊임없이 실을 분비하는 거미를 닮았다. 세계는 거미 같은 자아의 실로 두루 묶인다. 자아는 이름과 이름을 묶는 끈(copula), 사물과 사물을 엮는 계사(繫絲)이다. 자아는 어떤 존재론적 계사(繫辭)이다(앞으로 ‘계사’는 많은 경우 繫絲와 繫辭를 동시에 의미한다). 이 계사 안에는 사물들은 질서를, 단일한 통일성을 얻는다. 그러나 그런 것을 얻기 위해서 무엇을 잃어야 하는가? 그것은 사물들이 ‘원래’ 가지고 있던 유대 또는 종속 관계이다. 자연의 상태에서 사물들을 묶어주던 끈, 가령 유적 일반성을 잃어버려야 한다. 사물들은 자아의 계사 안에서 재편되기 위해서 기존의 관계망에서 벗어나 고립된 개체가 되어야 한다. 그런 조건에서만 자아의 계사적 권력은 대상 일반에 무차별하게 뻗어갈 수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계사로서의 자아는 두 가지 모습을 취한다. 자아는 사물들을 편성하던 자연적 연줄을 끊어내는 동시에 자신이 뽑아낸 실로 사물을 다시 엮어내는 권력이다. 자아가 어떤 ‘공허한 끈’이라면, 그 끈은 푸는 동시에 묶고 이완하는 동시에 수축하는 이중적 운동의 실마리다. 자아는 끊기와 잇기를 거듭하는 계사인 것이다.

29~31. 근대적 주체는 이중적 의미의 병리적 상태에 빠져 있다. 먼저 근대적 주체는 나르씨시즘에 젖어 있다는 점에서 병리적이다. 근대적 주체의 유래가 성적 에너지의 승화에 있다면, 그 승화가 있기 위해서는 먼저 대상으로 향하던 성적 에너지가 자기애적 리비도로 변형되어야 한다. 자기 자신으로 향하는 성적 에너지가 충분히 모인 다음에야 승화가 가능하기 때문에 그런 전환이 앞서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전환이 “승화에 이르는 보편적인 길”이며, 그래서 “모든 승화는 자아를 매개로 발생한다.” 따라서 근대적 주체가 있고 나중에 나르키소스적 주체가 있는 것이 아니다. 근대적 주체는 처음부터 나르키소스적 주체의 아들일 뿐이다. 다른 한편 근대적 주체는 본성상 파괴적이고 공격적이라는 의미에서 병리적이다. 왜냐하면 근대적 주체의 유래가 자기애적 에너지의 승화에 있다면, 그 승화는 죽음충동의 공격성을 중화하는 에로스의 성적 에너지를 고갈시키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아는 정체성이 커지고 계사적 권력이 강해질수록 날로 파괴적인 성향을 띠어가게 된다. 승화 - 우리는 앞에서 이것을 유령화라는 말로 표현했다 - 를 통해서 초월론적 차원으로 도약하는 근대적 주체가 배타적일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여기서 자신의 입법적 권위와 규칙에 어긋나는 타자를 공격하면서 쾌감을 느끼는 가학증적 증세까지 예상된다. 그러나 근대적 주체는 가학적일 뿐 아니라 피학적일 수 있다. 주체 안에 준동하는 죽음충동의 파괴력이 주체 자신으로 향할 수 있기 때문이다. 승화는 “자아이상이 강제적 의무에서 볼 수 있는 가혹하고 잔인한 성격을 취하게 되는” 최초의 원인이고, 자아가 초자아로부터 치명적 학대를 받을 수 있는 가능성을 낳는다. 프로이트는 주체의 이런 피학적 자기학대 가능성에서 도덕적 규범의 원천을 본다. 후에 라깡이 칸트와 싸드를 한자리에 놓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양심의 가책, 죄의식, 칸트의 정언명법으로 대변되는 도덕적 원칙 등이 주체의 그런 내향적 공격성에서 발생한다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근대적 주체에 대한 프로이트의 비판적 함축을 끌어낸다면, 그 주체는 어떤 치명적 폭력에 마주선 방어적 주체이다. 단지 자신의 내부에서 오는 폭력에 대해서만 그런 것이 아니다. 주체는 외부세계에 대해서도 방어적이고 반응적이다. 주체가 자신의 안과 밖에 대해 맺는 모든 관계는 그 근본에 있어 능동적이라기보다 반동적이다. 가령 칸트가 말하는 의식의 선험적 형식은 어떤 방어 메커니즘이다. 이런 시각이 잘 드러나는 것은 <쾌락원칙을 넘어서> 4절이다. 여기서 프로이트는 의식의 생물학적 기원과 유래를 가장 단순한 형태의 유기체에 해당하는 미분화된 소포(小胞)를 가지고 설명한다. 이 소포는 강력한 에너지로 넘실대는 외부세계의 한가운데 매달려 있다. 그 에너지는 소포가 생명을 유지할 수 있는 자양분이지만, 그것이 초래할 강력한 자극은 소포를 파괴할 수도 있다. 그러므로 여기서 “살아 있는 유기체에 대하여 자극의 수용보다 훨씬 중요한 것은 자극에 대한 방어”라는 일반적 명제를 끌어낼 수 있다. 이 방어를 위해서 소포가 갖추어야 하는 것은 어떤 ‘방패’이다. 소포는 자신의 일부를 죽요서 그런 방패를 만드는데, 그것이 외피다. 외부의 자극을 수용하는 동시에 방어하는 이 표면의 외피는 진화과정을 거쳐 감각기관으로 발전한다. 그리고 이 감각기관이 다시 진화하여 의식체계가 성립한다.

_ 김상환, <니체, 프로이트, 맑스 이후>, 창비, 2002.

: 1:38 am: bluemosesErudition

어려서 나는 램프불 밑에서 자랐다,
밤중에 눈을 뜨고 내가 보는 것은
재봉틀을 돌리는 젊은 어머니와
실을 감는 주름진 할머니뿐이었다.
나는 그것이 세상의 전부라고 믿었다.
조금 자라서는 칸델라불 밑에서 놀았다,
밖은 칠흑 같은 어둠
지익지익 소리로 새파란 불꽃을 뿜는 불은
주정하는 험상궂은 금점꾼들과
셈이 늦는다고 몰려와 생떼를 쓰는 그
아내들의 모습만 돋움새겼다.
소년 시절은 전등불 밑에서 보냈다.
가설극장의 화려한 간판과
가겟방의 휘황한 불빛을 보면서
나는 세상이 넓다고 알았다, 그리고
나는 대처로 나왔다.
이곳 저곳 떠도는 즐거움도 알았다,
바다를 건너 먼 세상으로 날아도 갔다,
많은 것을 보고 많은 것을 들었다.
하지만 멀리 다닐수록, 많이 보고 들을수록
이상하게도 내 시야는 차츰 좁아져
내 망막에는 마침내
재봉틀을 돌리는 젊은 어머니와
실을 감는 주름진 할머니의
실루엣만 남았다.
내게는 다시 이것이
세상의 전부가 되었다.

_ 신경림, “어머니와 할머니의 실루엣”, 199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