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chive for August 18th, 2010

August 18, 2010: 3:59 am: bluemosesErudition

1. “19세기 이래 문학의 주제는 소외와 그것의 변주이다.” “근대 소설의 주제는 분명해졌다. 이제 남은 과제는 대상을 어떻게 묘사할 것인가이다. … 이처럼 이미 주제가 하나로 정해져 버린 이후 소설의 근대성은 주제가 아닌 묘사 기법, 서사양식을 통해서 담보된다. 그런 까닭에 Alan Spiegel(1976[2005])이 <<소설과 카메라의 눈>>에서 주제화하는 의문, “19세기 소설, 그 중에서도 후반기 소설에는 왜 보는 것이나 순수한 시각적 정보가 그렇게 많고, 그 이전 소설에서는 적은가”는 오히려 우문이다.”

2. “우리가 플로베르를 읽었던 이유는 <<정신현상학>>이 가진 독특한 서술양식에 주목했기 때문이었다. 기존의 철학적 저작들의 주어는 진리를 탐구해 나가는 회의적 정신이거나, 이미 진리를 성취한 보편적 정신이었다. 그런데 <<정신현상학>>에는 이 두 주어가 모두 등장하여 나선螺線을 형성하면서 독자를 혼란에 빠뜨린다. 이는 분명 헤겔의 의도적인 서술의 결과이겠으며, 그로써 헤겔은 근대의 철학적 사유 내용에 걸맞는 철학적 서사형식을 제시했다고 하겠다. 여기서 주목해야 하는 것은 내용과 형식이다.”

3. ”근대의 철학자 헤겔이 진리를 보여주는 방법은 ‘상세한 서술’이다. 그것은 카메라의 눈으로 대상을 보여주는 것만도 아니요, 대상을 도외시한 채 내면만을 보여주는 것도 아니라 양자를 보여주면서 동시에 양자의 통일을 보여주는 총체성 추구와 보여주기의 방법이다. … 1807년에 출간된 <<정신현상학>>의 표면상의 주어는 무지하고 소박한 실체적 의식이다. 이 의식은 총체적 진리를 알지 못하고 당면한 대상에 집착하여 혼신의 힘을 기울여 인식을 시도한다. 그런데 <<정신현상학>>에는 숨어있는 관찰자가 있다. 총체적 진리를 알고 있는 그는 소박한 의식이 편력하는 ‘절망과 회의의 길’을 관조한다. 이 둘은 서로 겹치기도 하고 하나가 숨고 다른 하나가 전면에 나서기도 한다. 아무리 소박한 의식이 무지하다해도 그 의식은 스스로를 형성하는 정신으로서 새로운 형태를 향하여 성숙해가며, 종국에는 관찰자로서의 정신이 이미 이르렀던 지점, 즉 절대지에 도달한다.”

4. ”<<정신현상학>>은 근대 소설의 한계를 표상할 뿐만 아니라 근대 예술의 표상 주장에 대한 철학의 극복도 표상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분열된 소외의 세계인 근대 세계의 극복 및 사유와 존재의 통일을 적어도 정신의 권역에서는 성취한다. 우리는 <<정신현상학>>을 읽음으로써 철학적 위안을 얻으나 소설의 독자는 여전히 카메라의 눈을 따라 움직이고 있다.”

5. “‘내러티브”가 대세라는데… 잡담들 뿐이다. <<소설과 카메라의 눈>>을 먼저 읽는게 어떨까.”

: 2:59 am: bluemosesErudition

연초 학위논문을 제출하고 상반기에 몇 강좌를 맡아 학업을 이어 나갈 수 있었으나 취업, 연수, 출산 등으로 공부가 여의치 않다. 삶을 단순화해야 한다.

: 2:21 am: bluemosesErudition

- “People learn from ‘education of society’ in two ways, primarily through the macro-pedagogic function of society, and secondarily through the micro-andragogic function of education. While the former involves ‘socialization’ or relatively passive adaptation to structural conditions, the latter implies more active and reflexive response to the structural conditions, oriented towards better ways of social life(SY Kim, 2010: 136).”

- “주관주의(주체의 철학)와 객관주의(구조주의)를 통합한 사회분석(포스트 구조주의)에 필요한 방법 개념이 바로 실천 감각과 전략의 생성원리를 말하는 아비투스다. 아비투스란, 태도와 자세를 의미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헥시스Hexis’ 개념을 스콜라 철학자가 라틴어로 번역한 것이다. 마르셀 모스와 에밀 뒤르켕이 사회적으로 형성된 습관이라는 의미로 이미 사용했지만, 부르디외가 좀 더 세련된 개념으로 바꾸었다. 아비투스란 사회적 출신과 교육 같은 객관적 구조로 규정된 실천 감각인 습관이나 체질이다. 그런 만큼 아비투스는 객관적 사회 구조의 내재화(심적 구조화), 즉 구조화된 구조이다. 그런데 아비투스는 각각의 실천을 임기응변적으로 생성하고 조직하는 심적 시스템도 되기 때문에 구조화한 구조이기도 하다. 그런 의미에서 부르디외의 사회이론은 생성적[혹은 발생적] 구조주의라고도 부른다(竹內 洋, 2008[2010]: 302~303).”

- “존 오웬이 죄의 존재와 작용을 설명함에 있어서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존재론의 틀을 사용하고, [죄의] 작용의 원인과 목표를 다룸에 있어서는 플라톤의 윤리론의 틀을 사용한다. 이는 악을 ‘선의 결핍(privatio boni)’으로 보는 사상이다.” “죄의 존재와 작용에 대한 설명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존재론과 연관을 갖고 있다. 즉 죄를 인간의 영혼 안에 있는 경향성으로 보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 이후로 존재와 경향성의 문제는 철학에 있어서 중요한 주제가 되어 왔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희랍어 헥시스(Hexis, 문자적으로 실천에 의하여 이루어진 어떤 상태 혹은 항구적인 상황에 놓여 있는 것)로, 토마스 아퀴나스는 라틴어 하비투스(Habitus)를 가지고 설명하였다(김남준, 2008: 93~95).”

- “영혼의 경향성은 작용하는 마음 안에서 성향으로 나타난다. 이 성향은 사물을 인식하고 감정을 느끼고 또 의지로써 행동하는 영혼의 모든 활동에 일관된 영향을 주는데 이것을 가리켜 존 오웬은 ‘마음의 틀(the frame of heart)’이라고 표현하였다. 이것은 명백히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에 있어서 프로네시스(phronesis)의 개념을 차용한 설명이다. …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롬8:6~8). 여기에서 ‘생각’이라고 번역된 희랍어 단어가 프로네마(pronema)인데 이것을 정확하게 표현하면 ‘생각되는 성향’이다. 인간은 누구든지 이러한 ‘프로네마’를 가지고 있어서 마음 안에서 스스로 발생하는 ‘상상(imagination)’이나 외부 사물과의 접촉으로 말미암는 인식과 ‘정동(affection)’의 방향을 결정한다. 이것이 바로 존 오웬이 성화론에서 자주 거론하는 마음의 틀의 개념이다. 이것은 외부의 사물들을 인식하거나 상상을 통해 건져 올린 인상들이 도덕적 결정에 미치는 구조이다. 성화와 관련하여 이 문제들을 더 적극적으로 다룬 작품이 바로 <신령한 생각의 틀 On Spiritual-Mindedness>이다(김남준, 2008: 110~111).”

- “기제(institutions)는 형식을 갖춘 기관이나 제도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기제는 체제ㆍ문화ㆍ일상 등을 포괄하여 사회적 활동에 자기구속성을 행사하는 ‘행위 규범의 복합체’를 뜻한다. 이에 기제는 사회적 행동에 의미와 안정성을 부여하는, 구조와 행위의 인지적(cognitive)ㆍ규범적(normative)ㆍ규제적(regulative) 구성물이라 할 수 있다(Scott, 1995: 33).”

* Primary Macro-Pedagogic Learning에 의해 형성[구조화]된 The Regime of Heart와 Secondary Micro-Andragogic Learning에 따라 조성[구조화]한 The Frame of Heart는 상호 변형을 통해 학습을 통제하고 추동하는 메커니즘(The Institutions of Heart)을 구축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