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존 롤스의 오랜 친구이자 동료 철학자인 로저 앨브리튼에게 롤스에 대해 묘사해달라고 하자, 그는 이렇게 말했다. “제가 롤스에 관해 가장 잘 알고 있는 점은 그가 다른 사람들을 대할 때 놀라우리만치 윤리적이라는 것입니다. 그는 위대한 저작을 쓴 한 명의 저자가 아니라, 감탄을 자아내게 만드는 사람입니다. 그는 우리 시대에 둘도 없는 사람입니다.”(133) 하버드대학 에머슨 홀의 철학과 학생들 사이에서 롤스에 대해 여전히 회자되는 특이한 이야기가 있다. 한번은 그가 논문심사에 참여했는데, 햇빛이 논문심사 지원자의 눈에 비치는 것을 알아차리고는 일어나 심사 내내 그 지원자와 태양 사이에 불편한 자세로 앉아 있었다는 것이다.(136)
2. 대학을 마치고 대학원에 진학하기 전, 롤스는 입대했다. 그는 2차 세계대전 동안 32보병 사단에 배속되어 가장 참혹했던 전투 지역이었던 뉴기니와 필리핀에서 복무했고, 일본에서는 점령군으로 있었다.(134) “신입생이었던 해 9월에 히틀러가 폴란드를 침범했고 유럽엔 전운이 감돌았습니다. 저는 1차 세계대전 그리고 전쟁 문제에 대해 많은 것을 읽었습니다. 물론 그 세대의 우리 모두가 곧 전쟁에 휩쓸리게 될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전쟁에 대한 경험은 우리 세대를 지금 시대와는 매우 다르게 만들었습니다. 1943년 초반부터 1946년 초반까지 3년 동안 태평양, 뉴기니, 필리핀, 일본에서 군 생활을 했습니다. 그 경험이 나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정확하게 말할 수 없지만, 영향을 미쳤다는 점은 틀림없습니다. 전쟁이 끝나고 1946년 봄 학기에 대학원생으로 프린스턴대학에 다시 돌아왔습니다.”(137)
3. “<정의론>(A Theory of Justice, 1971)으로 진전된 것들은 언제부터 구체적으로 생각하고, 글을 쓰기 시작하셨습니까?” “박사학위 논문을 끝낸 1950년 가을부터 노트들을 모으기 시작했습니다. 그때까지 혼자서 몇몇 경제학 책들을 읽고 있었는데, 그해 가을에 저명한 경제학자인 보머(W. J. Baumor)의 세미나에 참가했습니다. 저는 모든 작업을 다 하려고 했어요. 우리는 힉스(J. R. Hicks)의 <가치와 자본>을 읽었는데, 전 그 책을 정복하려 했습니다. 새뮤얼슨(Paul Samuelson)의 <토대론>의 몇 부분도 읽었는데, 그 책의 복지 경제학에 대한 장 때문에 신복지 경제학에 대한 논문을 쓰게 되었습니다. 이런 일들은 제가 대학원생일 때부터 시작되어 1950년에서 1951년까지 2년 동안 프린스턴에서 강사를 할 때까지 계속되었습니다. 왈라스(Léon Walras)의 <순수 정치경제학의 요소> 몇 편을 읽었고 게임이론도 조금 공부했습니다. 모르겐슈턴(Oskar Morgenstern)과 함께 쓴 폰 노이만(Von Neumann)의 책들이 막 나온 것도 1944년이었어요. 그 책은 그 주제를 창시했던 게임이론에 대한 중대한 저작이었습니다. 프랭크 나이트(Frank Knight)의 <경쟁의 윤리>에 실린 여러 논문은 저에게 매우 계발적이었습니다. 그는 경제학 못지않게 사회철학에 관심이 있었습니다. ‘어떻게’라고 물으면 대답하기 곤란하지만, 어쨌든 이 모든 것의 결과물이 제가 논문으로 썼던 윤리이론에 더해졌어요. 제 논문은 1950~1951년 사이에 그 책들을 연구한 결과물이고, 저는 ‘원초적 입장’으로 귀결된 사유를 얻게 되었습니다. 이 사유는 ‘정의’의 타당한 원리를 이끌어낼 수 있는 사유 구조를 설계하려는 것이었습니다. 그 당시 저는 마지막에 내리게 된 결론보다 더 복잡한 과정을 거쳤던 것입니다. 이 시기 내내 철학을 가르치고는 있었지만, 저의 최대의 관심사는 계속 경제학에 있었던 거지요.”(139~140)
4. “결국 저는 ‘무지의 베일’(Veil of Ignornance)을 이용해서 모든 세부적인 것을 잘라내서 사람들이 알고 있는 것을 엄청나게 제한했습니다. 저는 또한 동의를 영원한 것으로 만들었습니다. 모든 것이 너무 많이 단순화되어버렸습니다. 근원적인 방식은 정말 너무 복잡했어요. 표면적으로는 분명히 해결되지 않는 문제들이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사람들의 동의를 끌어내기 위해 어느 정도 강제를 해야 하는지, 시간은 얼마나 주어야 하는지 같은 것들 말입니다. 어떠한 대답을 할 때에도 철학적 정당화가 필요하다는 점을 유념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후에 만들어진 ‘원초적 입장’(Original Position)에는 처음에 제가 관심을 가졌지만 잘 알지 못하던 문제들, 이를테면 경제학자들이 사용하는 게임이론이나 일반균형 같은 것들을 제외했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이 모든 것들을 없애버려야만 돼’라고 생각했던 거지요. 되돌아보면, 저는 그 문제들을 제기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다른 방식으로 제기할 수도 있었고, 실제로 제기되었던 적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하버드대학의 스캔론(Tim Scanlon) 교수는 ‘무지의 베일’ 같은 것을 이용하지 않습니다. 그의 논증에는 ‘원초적 입장’과 유사한 점이 있지만, 실제로는 상당히 다릅니다. 그의 관점은 또 다른 가능성인 거지요. 제가 더 나아갈 수 없었던 부분에서부터 이어나가면 누구라도 보다 현실적이고 성공적인 논의를 구성할 수 있을 겁니다. 저는 다른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습니다.”(140~141)
5. 롤스는 ‘원초적 입장’이라는 사상으로 유명한데, 그것은 ’무지의 베일’ 뒤에 사람들이 처했을 때에 관한 사유 실험이다. 그 장막 뒤에서 사람들은 각각의 개인을 만드는 모든 것, 즉 부富, 나이, 재능, 인종, 종교, 기술, 성별, 좋은 삶과 같은 어떠한 개념에 대한 지식들도 거부한다. 롤스는 이러한 입장에 있는 사람들이 사회를 위해 선택하는 것이 정의의 원리로 간주될 수 있을 거라고 믿는다.(1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