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chive for January, 2012

January 26, 2012: 4:24 pm: bluemosesErudition

1. 제목 셀 선택 후, F5 블럭 설정

2. [표/셀 속성] 표, [쪽 경계에서 나눔] & [제목 줄 자동 반복] 지정

2. [표/셀 속성] 셀, [제목 셀] 지정

January 25, 2012: 3:02 am: bluemosesErudition

“나와 비클러는 1871년 부터 오늘날에 이르는 미국 ‘S&P 500 지수’의 주가와 ‘주당 순이익(EPS)’의 움직임을 검토한 바 있다(주당 순이익은 해당 기업의 연간 수익을 총 주식 수로 나눈 것으로 기업의 ‘현재 이익’을 나타낸다). 1차 세계대전 이전까지는 주가와 순이익이 같은 방향으로 움직였다. 그래서 상관계수의 값도 ‘양’으로 매우 높아 0.72에 이르렀다(상관계수가 양이면 주가와 순이익이 같이 올라가고 같이 떨어지며, 0.72라는 것은 함께 움직이는 정도가 매우 높다는 의미). 1차 세계대전 이전은 주가가 기업의 ‘현재이익’을 반영하는 ‘돌아보기’의 시대였으니, 이는 당연한 이야기다. … 주식과 순이익의 상관계수가 1차 세계대전 이전의 0.72에서 0.35로 급격히 떨어진다. 심지어 반대로 움직이기도 한다. 예컨대, 1972~1974년의 스태그플레이션기에 이윤은 42% 증가하는 반면 주가는 43% 폭락한다. 1930~2000년의 주가-순이익 간 상관계수는 심지어 마이너스 0.15이다. 투자자들이 현재의 기업수익이 아니라 미래를 보고 주식에 투자했기 때문이다. 주가와 현재이익 간의 관계가 완전히 끊어진 것이다. … 그러나 이런 트렌드에서 벗어나는 두 차례의 ‘역사적 예외’가 존재한다. 바로 1930년대와 ‘2000년~현재’이다. 이 두 시기에는, 주가와 순이익이 밀착해서 함께 움직였다. 상관계수도 1930년대에는 0.90, 2000년 이후엔 0.65에 달하고 있다. 1929년 금융시장이 붕괴하자 자본주의 지배층들은 ‘미리보기’에서 ‘돌아보기’로 전향한다. 더욱이 당시의 자본주의는 볼셰비즘(레닌주의)과 파시즘의 체제 도전에시달리고 있었다. 이렇게 자본주의 시스템 자체가 흔들리고 있는데 ‘미리보기’, 즉 미래 예측에 나설 여력이 있었겠는가. 결국 자본주의 지배층들은 자기들의 지배 능력과 미래에 자신감을 잃고, 미래가 아니라 ‘지금 존재하는 것’, 즉 기업의 현재이익에 기대게 된 것이다. 이는 갑자기 ‘미래 수익은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고 말하는 것과 같았다. 이런 분위기는 1939년에 이르러서야 극복된다. … 1939년부터 2000년까지 수많은 위기가 있었다. 스태그플레이션, 국제적 갈등, 혁명 등이다. 그러나 이런 위기들은 그냥 ‘보통 위기’였고, 자본주의 지배층의 자신감을 해치지는 못했다. 그러나 2000년 들어 ‘기계’가 멈춘다. 1939~2000년 사이, 주가와 순수익 간의 상관계수는 마이너스 0.15였다. 두 지표가 독립적으로 놀았던 것이다. 그러나 2000년에서 2010년 3월 사이의 상관계수는 0.65까지 올라간다. 주가와 순이익이 다시 같은 방향으로 밀착했다는 이야기다. 심지어 이 기간 중에는 상당한 호황기가 있었음에도 주가가 순이익을 따라 움직였다. 1930년대처럼 자본주의 지배층들이 다시 ‘돌아보기’를 하고 있다는 증거다. 이런 현상은 미국 뿐 아니라 전세계적으로 나타나고 있다.”(Jonathan Nitzan)

January 24, 2012: 6:08 pm: bluemosesErudition

‘행복’의 기원은, 요행을 바라는 것과 다르지 않다.

: 2:44 pm: bluemosesErudition

1. The Leisure Class, 1899

2. The Theory of Business Enterprise, 1904

3. The Instinct of Workmanship and the state of Industrial Arts, 1911

4. Imperial Germany and Industrial Revolution, 1915

5. An Inquiry into the Nature of Peace and the Terms of its Perpetuation, 1917

6. The Higher Learning in America, 1918

7. The Place of Science in Modern Civilization, 1919

8. The Vested Interests and the Common Man, 1919

9. The Engineers and the Price System, 1921

10. Absentee Ownership and Business Enterprise in Recent Times, 1923

11. Essays in Our Changing Order, 1934

: 1:31 am: bluemosesErudition

“여성의 (집단)무의식 속에 존재하는 모든 남성적인 성향의 화신 내지 전형적인 남성상”

January 23, 2012: 3:08 pm: bluemosesErudition

“주님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집을 세우는 사람의 수고가 헛되며, 주님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깨어있음이 헛된 일이다. 일찍 일어나고 늦게 눕는 것, 먹고 살려고 애써 수고하는 모든 일이 헛된 일이다. 진실로 주님께서는, 사랑하시는 사람에게는 그가 잠을 자는 동안에도 복을 주신다.” “네 손으로 일한 만큼 네가 먹으니, 이것이 복이요, 은혜이다.”(시127 : 1~2, 128 : 2)

* 에르고드성이 관철되는, 당위의 세상은 없다. ‘하나님의 은혜를 찬양합니다.’

: 2:32 pm: bluemosesErudition

“정규직 노동자들에겐 두 가지 마음이 있다. 하나는 불안하니까 비정규직을 안전판으로 삼고 싶은 마음이고, 또 하나는 인간이 이렇게 살면 안된다, 함께 살아야 된다는 마음이다. 우리의 운동은 그 두 마음 사이에서 출발한다. 더 잘 먹고 잘 살아야 된다, 임금과 노동 조건이 좋아야 된다는 좁은 방식으로만 노동자들을 조직하고 활동해왔다면 그런 순간에 노동자들을 제대로 조직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또 다른 현실이 가능하다는 것, 우리가 함께 살 수 있고 변화할 수 있고 희망이 있고 공동으로 대응할 수 있음을 잊지 않아야 한다. … 항상 놀라는 게 그거다. 내 경우 투쟁하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 왜 투쟁하게 되었는지 꼭 물어 본다. 열악한 상황에 있으니 필시 임금과 노동 조건 때문일 거라 생각들 하지만 그렇지 않다. 자존심이 상해서이거나 정말 이렇게 사는 건 아닌 것 같아서가 대부분이다. 투쟁이라는 게 인간으로서의 내 삶에 대한 고민, 이제는 굴종하지 않겠다는 자기 표현인 것이다. 임금과 노동 조건보다 더 중요한 건 누구나 마음 깊은 곳에는 인간다움에 대한 욕망이 있다는 사실이다.”

* 이를 탐하면 분열되고, 의를 구하면 연대한다. 분할지배의 극복은 대의를 옹호함으로써 실현된다. 단, 그것이 인권에 국한된다면 우리의 미래는 암담하다.

: 2:31 am: bluemosesErudition

“통상 ‘인륜’이라 번역되나, 본서에서는 문맥에 따라 ‘공동체’, ‘공동정신’, ‘공동의 윤리’, ‘공동감정’, ‘사회성’, ‘도덕적’ 등의 용어로 옮긴다.” (長谷川 宏, 1994: 3)

January 21, 2012: 10:36 pm: bluemosesErudition

하나를 위한 마음, 모두를 향한 규준

: 8:10 pm: bluemosesErudition

“행위자의 통일성은 다양성 속에서 지속적으로 만들어지는 일시적이고 불안정한 연합의 성과이다. 높은 수준의 숙고가 일어난다면, 행위가 우리의 참 자아를 반영할 가능성이 크게 높아질 것이다. 책임이 발생하는 조건에서도 행위는 여전히 하위 메커니즘에 의해 이루어지지만, 우리는 이 행위를 완전히 통제하게 될 것이다.”(Neil Levy, 2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