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다는 생각에 무기력함을 느꼈다. 그래도 영화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그때 눈에 들어온 것이 바로 <도가니>였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다는 생각에 무기력함을 느꼈다. 그래도 영화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그때 눈에 들어온 것이 바로 <도가니>였다.”
Eric Hobsbawm’s Interesting Times
1. “베에토벤 서거 100주년을 경축하는 학교 행사를 기억하는 남자로부터 그가 살아온 역사를 듣는다는 것은 마치 교황으로부터 종교적 의무사항을 지시 받는 것과 같을 것이다.”
2. “그는, 그의 부모 둘 다 그가 매우 어렸을 때 죽었고 숙모와 숙부에 의해 양육되었다고 우리에게 말한다. 그러나, 그것이 분명히 이후의 그의 삶에 깊은 정서적 영향을 주었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것에 대해서 알 수 없다. 대신 그는 전기라는 장르의 황금률을 깨고 술이나 여자에 대한 자신의 취향이 아니라 역사적 사건 및 사상이라는 맥락 속에 그의 개인적 삶을 위치시킨다.”
3. “페리 앤더슨(Perry Anderson)이 주장했듯이 이러한 유럽인 망명자들의 위치는 애매하였다. 서너개의 다른 문화들을 뒤섞은 그들은 영국인의 편협성을 부끄럽게 하는 국제적인 안목을 가지고 있었다.그들 대부분이 유럽 중심부의 정치적 폭정과 분쟁으로부터 피난 온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그들의 저작들에는 본토인이 따라잡을 수 없는 열정과 절박함이 들어 있었다. 그러나, 피난민들은 대개 그들이 외국에서부터 힘겹게 오르고 있는 구명보트를 흔들지 않는다. 그들은 본토 문화의 지루함을 회의적인 눈으로 바라보면서 동시에 그것에 대해 감사할 수 있다.”
4. “86년전 알렉산드리아에서, 교양있는 오스트리아인 어머니와 런던의 노동계급 집안 자식의 아들로 태어난 홉스봄은 비엔나에서 자라났고 히틀러가 제국의회를 장악하는 와중에 고등학생으로서 베를린으로 이주하였으며, 1933년에는 런던으로 피하였다. 그곳에서 놀랍게도 그는 겨우 2년후에 케임브리지에 장학금을 받고 입학한다.”
5. “홉스봄은 노엘 아난(Noel Annan), 메이너드 케인즈(Maynard Keynes), EM 포스터(E.M. Forster)가 있던 전성기의 케임브리지 대학 킹스컬리지에 입학했으며 그곳 생활을 분명히 즐겼다. … 그러나, 비록 거만한 사립학교가 아니라 특이하게도 비천한 고등학교(grammar school)출신이었지만, 홉스봄은, 테니슨(Tennyson), 러셀, 비트겐슈타인을 자신들의 선구자들로서 세는 사도 클럽(Apostles’ Club)의 회원으로 선출되었다.”
6. “홉스봄의 시대엔, 주요한 영국 공산주의자들의 상당수는 변증법에 대한 관심과 빅토리아시대 골동품 수집에 대한 열정을 동시에 가지는 학자티를 내는 귀족적인 인물들이었다. 홉스봄이 한 때 한 중국 게릴라 지도자를 아테네움(Atheneum)이라는 런던에서 가장 숨막히는 상류사회 클럽에서 만났다는 것은 전적으로 놀라운 일은 아니다.”
7. “그는 10년간 신정치인지(The New Statesman)의 재즈 평론가였는데, 1930년대의 유명한 공산주의자 재즈 트럼펫주자인 프랭키 뉴턴에 대한 오마주로서, 프란시스 뉴턴이라는 가명으로 글을 썼다.”
8. “그는 노동당의 극좌파들에 대항하고 자유당과의 반대처주의 연합을 구성하려는 운동을 전개했다. … 그는 대처리즘(Thatcherism)에 의한 노동당의 선거 패배가 ‘나의 정치적 경험중에서 가장 슬프고도 절망적인 순간이었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는 노동당을 정치적 우파로 돌리려는 그의 노력(가장 큰 임무라고 하기는 어려운)이 그가 혐오하는 바로 그 블레어주의(Blairism) -그가 ‘바지를 입은 대처리즘’이라고 부르는 - 를 마침내 결과했다는 것을 언급하진 않는다.”
9. “홉스봄은 스스로 만족해 할만한 것들이 많다. 그는 강력한 영향력, 학식, 그리고 뛰어난 문장력을 가진 역사가이고, 볼로냐에서 베이징까지 환대를 받는 사람이면서도 개인적 친교의 미묘한 기술에도 능한 남자이며, 인간에게 알려진 가장 유혈이 낭자한 한 세기를 살아남은 정치인이지만 그 과정에서도 자신의 삶을 즐길 수 있었던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