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chive for April 26th, 2017

April 26, 2017: 7:19 pm: bluemosesErudition

(234-235) 주관적 실재는 항상 특정한 타당성 구조plausibility structures, 곧 주관적 실재의 유지를 위해 요구되는 특정한 사회적 기반과 사회적 과정들에 의존한다. 중요한 사람으로서의 자기동일시를 유지하는 것은 그 정체성을 확증해주는 환경에서만 가능하다, 오로지 가톨릭 공동체와 의미 있는 관계를 갖고 있어야만 가톨릭 신앙을 유지할 수 있다, 등등. 개별적인 타당성 구조들의 중재자들과의 의미 있는 대화의 붕괴는 문제의 주관적 실재들을 위협한다. 편지의 보기가 보여주듯이, 개인은 실제의 대화가 부족할 때에도 다양한 실재-유지의 기술들에 의지할 수 있으나, 이러한 기술들의 실재-생성 능력은 그 기술들이 원래 베끼고자 했던 면대면 대화에는 한참 못 미친다. 이런 기술들이 면대면 확증으로부터 오래 격리되면 될수록 실재감을 점점 덜 갖게 될 것이다. 자신의 신앙을 공유하는 사람들의 공동체에서 떨어져서 다른 신앙을 가진 사람들 속에서 오랫동안 살고 있는 개인은 지속적으로 자신을 가톨릭 신자로서 동일시할 수 있다. 기도, 종교적 훈련, 그리고 유사한 기술들을 통해서 그의 오래된 가톨릭 실재는 계속하여 주관적으로 그에게 의의가 있을 수 있다. 적어도 그 기술들은 가톨릭 신자로서의 그의 계속된 자기동일시를 유지할 수 있다. 그러나 그 기술들은 다른 가톨릭 신자들과의 사회적 접촉에 의해 ‘재활성화’되지 않으면, ‘살아 있는’ 실재를 결여하게 될 것이다. 확실히 개인은 대체로 그의 과거의 실재들을 기억한다. 그러나 그 기억들을 ‘재활성화’하는 방법은 그 의의를 공유하는 사람들과 대화하는 것이다. 타당성 구조는 또한 의심의 특정한 중지를 위한 사회적 기반이며, 그 기반 없이는 문제의 실재의 정의가 의식 안에서 유지될 수 없다. 여기서 실재를 해체하는 그러한 의심들에 대한 구체적인 사회적 제재들은 내면화되고 지속적으로 재확증된다. 비웃음은 그러한 제재의 하나이다. 타당성 구조 안에 남아 있는 한, 개인은 관련된 실재에 대한 의심이 주관적으로 생겨날 때마다 스스로 터무니없다고 느낀다. 그는 다른 이들에게 의심의 목소리를 낼 때 그들이 자신에게 웃음 지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는 조용히 자신에게 웃음 짓고, 정신적으로 어깨를 움츠리고, 그렇게 제재된 세계 안에서 지속적으로 존재할 수 있다. 말할 필요도 없이, 만약 타당성 구조가 사회적 기반으로서 유효하지 않다면, 이러한 자기 치료의 절차는 훨씬 더 어려울 것이다. 그 웃음은 강요될 것이며, 결국에는 수심에 가득 찬 찡그림이 대신하게 될 가능성이 많다.

(236-237) 사회 안에 존재한다는 것은 이미 주관적 실재가 변형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 성공적인 개조alternations를 위한 ‘처방전’은 사회적이고 개념적인 조건들 - 당연히 개념적인 것의 기반으로 역할을 하는 사회적인 것 - 을 모두 포함해야 한다. 가장 중요한 사회적 조건은 유효한 타당성 구조, 곧 변형의 ‘실험실’ 구실을 하는 사회적 기반의 사용 가능성이다.

(238-239) 개조의 역사적 원형은 종교적 회심이다. …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extra ecclesiam nulla saltus’고 말함으로써 여기에 적용될 수 있다. 여기서 구원은 (이 구절을 만들어낼 때 다른 것들을 염두에 두었던 신학자들에게는 미안하지만) 경험적으로 성공적인 회심의 성취를 의미한다. 회심이 효과적으로 진정한 것으로서 유지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종교적 공동체, 곧 교회 안에서이다. 이것은 그 공동체에 소속되기 전에 회심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부정하지 않는다 - 타르수스의 사울은 그의 “다마스쿠스의 경험” 이후에 기독교 공동체를 찾았다. 그러나 이것이 요점은 아니다. 회심의 경험을 갖는 것은 대단한 일은 아니다. 진정한 문제는 지속적으로 그 회심을 심각하게 받아들일 수 있느냐, 곧 회심이 타당하다는 의식을 유지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종교 공동체가 관여하게 되는 것은 바로 여기서이다. 종교 공동체는 그 새로운 실재를 위한 필수불가결한 타당성 구조를 제공한다. 달리 말하자면, 사울은 종교적 황홀경에 빠진 가운데 바울이 되었을 수 있으나, 그가 바울로 남아 있을 수 있었던 것은 그를 바울로 인정하고 그가 이 정체성을 위치시켰던 ‘새로운 존재’를 확증해준 기독교 공동체의 맥락 안에서였다. 이러한 회심과 공동체의 관계는 (역사적으로 특유한 기독교 교회의 특성에도 불구하고) 특유하게 기독교적인 현상은 아니다. 이슬람의 움마umma 밖에서 이슬람교도로 남아 있을 수 없고, 상가sangha 밖에서 불교 신자로 남아 있을 수 없으며, 아마도 인도 밖의 어느 곳에서도 힌두교도로 남아 있을 수 없을 것이다. 종교는 종교 공동체를 필요로 하며, 종교적 세계 안에 산다는 것은 그 공동체와의 유대관계를 필요로 한다. 종교적 회심의 타당성 구조는 세속적 개조 기구들에 의해 모방되어왔다. 가장 좋은 보기는 정치적 세뇌와 정신치료의 영역에 있다.

(240-241) 타당성 구조는 모든 다른 세계들, 특히 개인이 개조 이전에 ‘거주했던’ 세계를 제거하면서 그 개인의 세계가 되어야 한다. 이것은 다른 세계의 ‘거주자들’, 특히 그가 남겨둔 세계 안에 ‘같이 거주했던 사람들’로부터 분리될 것을 요구한다. 이상적으로 이것은 신체적 분리일 것이다. 어떤 이유든지 간에 그것이 가능하지 않다면, 그 분리는 정의定義, 곧 이전의 세계들을 무화시키는 다른 사람들의 정의에 의해서 상정된다. 개조하는 개인은 스스로 이전의 세계와 그 세계를 유지했던 타당성 구조로부터 가능하다면 신체적으로, 그렇지 않다면 정신적으로 유대관계를 끊는다. 어떤 경우든 그는 더 이상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함께 메지” 않으며, 따라서 실재를 교란하는 그들의 잠재적 영향력으로부터 보호된다. 그러한 분리는 개조의 초기 단계(수련 단계)에 특히 중요하다. 일단 새로운 실재가 공고해지면, 생애적으로 중요했던 외부인들은 여전히 위험스럽겠지만, 외부인들과의 신중한 관계가 다시 이루어질 수 있다. 그들은 “집어치워, 사울”이라고 말할 사람들이며, 그들이 상기시켜주는 예전의 실재가 유혹의 형태를 취할 때가 많을 것이다. 그래서 개조는 대화 장치의 재조직화를 포함한다. 중요한 대화의 상대가 바뀐다. 그리고 새로운 중요한 타자와의 대화에서 주관적 실재가 변형된다. 그 주관적 실재는 그들과의 지속적인 대화에 의해서, 또는 그들이 대표하는 공동체 안에서 유지된다. 간단히 말해서, 이것은 이제는 누구와 이야기할지 매우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새로운 실재의 정의와 일치하지 않는 사람과 사상들은 체계적으로 회피된다(일치하지 않는 실재 정의의 회피에 대해서 다시 페스팅거와 비교해보라). 과거 실재의 기억으로 인해 이 회피가 완전히 성공하는 것은 드물기 때문에 새로운 타당성 구조는 ‘다시 되돌아가려는’ 경향을 처리하기 위한 다양한 전형적 치료 절차들을 제공한다. 이 절차들은 전에 논의했던 일반적인 치료 유형을 따른다. 개조를 위해 가장 중요한 개념적 필요조건은 변형의 전체 과정을 정당화하는 장치의 이용 가능성이다. 새로운 실재만이 아니라 그 실재가 전유되고 유지되는 단계들도 정당화되어야 하며, 모든 대안적 실재들이 폐기 또는 거부되어야 한다. 개념적 기구의 무화시키는 측면은 해결되어야만 하는 해체적인 문제의 관점에서 특히 중요하다. 예전의 실재뿐 아니라 이전에 그 실재를 개인에게 중개했던 집단과 중요한 타자들은 새로운 길재의 정당화 장치 안에서 재해석되어야 한다. 이 재해석은 개인의 주관적 생애 안에 ‘기원전 B.C.’과 ‘기원후 A.D.’, ‘다마스커스 이전’과 ‘다마스커스 이후’라는 의미에서 균열을 초래한다. 개조에 선행하는 모든 것은 이제 (말하자면 <구약성경> 또는 ‘복음을 위한 준비’와 같이) 개조를 향해 인도하는 것으로, 그리고 개조에 뒤따르는 모든 것은 그 새로운 실재로부터 나오는 것으로 이해된다. 이것은 “그때는 … 라고 생각했었어. 이제는 알아”라는 공식을 따라서 과거 생애 전체를 재해석하는 것을 의미한다.

(246) 재사회화에서 과거는, 그때에는 주관적으로 유용하지 않았던 다양한 요소들을 과거로 재투사하려는 경향을 가지고, 현재의 실재와 같아지도록 재해석된다. 이차적 사회화에서 현재는, 그러한 변형들이 실제로 일어났을 때 이를 최소화하려는 경향을 가지고, 과거와 지속적인 관계에 있도록 해석된다. 달리 표현하여, 이차적 사회화를 위한 실재의 기반은 과거인 데 비해, 재사회화를 위한 실재의 기반은 현재이다.

: 4:19 pm: bluemosesErudition

(23) 1874년 2월 미국에서 돌아온 모리 아리노리가 처음 건의한 것을 계기로 니시무라 시게키 등은 계몽적인 학술결사로서 ‘메이로쿠샤明六社’를 정식으로 발족시켰다. 메이로쿠샤의 기관지 <메이로쿠잣시明六雑誌> 제1호에서 니시무라는 학술문예에 관한 탁견과 고론을 통해 우매한 민중의 눈을 뜨게 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메이로쿠샤는 니시무라가 말한 것처럼 당대 일류 지식인들이 참가하여 결집한 메이지 초기의 유일한 학술결사였다. 메이로쿠샤 회원은 당시 니시무라 시게키, 쓰다 마미치, 니시 아마네, 나카무라 마사나오, 가토 히로유키, 미쓰쿠리 슈헤이, 후쿠자와 유키치, 스기 고지, 미쓰쿠리 린쇼, 모리 아리노리 등 총 10명이었다. 그 후 회원 수도 대폭 늘어 창립 1년이 되는 1875년 2월에는 약 30명의 회원이 참여하였다. 기관지 <메이로쿠잣시>는 1875년 11월까지 통과 43호가 간행되었는데, 그동안 회원들이 집필한 백여 편의 논설은 정치, 경제, 법률, 사회, 외교, 종교, 역사, 교육, 자연과학 등 여러 영역에 걸쳐 있었다. 메이로쿠샤는 1875년 11월 <메이로쿠잣시>가 간행정지되면서 해산되었지만, 메이로쿠샤가 지닌 학술단체로서의 성격은 미국의 교육학자로 당시 문부성 학감을 지낸 데이비드 머레이의 건의로 1879년 11월에 성립된 ‘도쿄학사위원회’(제국학사원의 전신)에서 발전적으로 계승하였다.

(36) 1872년 나카무라 마사나오의 <자유지리>가 출판되는데, 이는 ‘자유’라는 번역어를 좋든 싫든 freedom, liberty의 번역어로서 위치를 확고하게 만드는 계기를 제공한다. 그러나 <자유지리>를 출판한 나카무라 마사나오조차도 freedom, liberty의 번역어로 ‘자유’가 적절하지 않다고 여겨, 다른 저술서에서는 ‘자유’를 사용하지 않고 ‘관홍지(寬弘之)’를 쓰기도 하며, 때로는 원어 그대로 리버티를 사용하기도 한다. 그러다가 <메리로쿠잣시> 15호(1874)에서는 다시 다음과 같이 ‘자유’를 사용하기도 한다. “religious liberty, 종교에 관한 것. 인민 자신이 믿고 싶은 바에 따를 자유의 권리.” 이러한 우여곡절을 거치면서 ‘자유’는 다시 freedom, liberty의 번역어로 등장하게 된다. 어쨌든 <자유지리>의 출판과 그 애독층에 의해 ‘자유’는 freedom과 liberty의 번역어로 확고한 위치를 차지하게 된다.

: 4:08 pm: bluemosesErudition

메이로쿠샤明六社, 공리+실증주의, 사회진화론 _ 메이지 번역의 창

: 4:03 pm: bluemosesErudition

Standard score = [Z score(x - μ / σ) * Adjustment SD] + Adjustment Avg

: 1:06 pm: bluemosesErudition

“No good thing does he withhold from those who walk uprightly.”

: 12:02 pm: bluemosesErudition

외재화, 객관화, 내면화 그리고 타당성 구조 안 정체성 유지보수. 객관적 실재와 주관적 실재, 그 양극단의 연속선상에서 과거(이차적 사회화)와 미래(재사회화)의 길항으로 동요하는 그가 말하는 곳

: 10:40 am: bluemosesErudition

덜 말하는 방식으로 더 말하는 시. 안미옥의 시에는 삼켜진, 쟁여진, 그리하여 심연으로 내려가는 굴을 파고, 기도하는 마음으로 한층 한층 탑을 쌓아올리는 그런 말, 들끓는 침묵의 언어가 함께한다. 그녀의 “침묵은 검고, 낮고 깊은 목소리”, “심해의 끝까지 가닿은 문 같다”. 그 문을 “아직 두드리는 사람”의 언어가 안미옥의 시다. 언어에 표정이 있다면 안미옥의 언어는 “숨을 참는 얼굴”. 그리하여 안미옥의 첫 시집을 읽는 우리는 이제 “볼 수 없던 것을 보려고 할 때”의, 들리지 않던 것을 들으려 할 때의 그 얼굴이다. 작고 부드럽고 연한 마음, 그 마음의 언어는, 그 언어의 피부는 고통과 슬픔에 더 힘껏 약해지고자 한다. 타인의 고통과 슬픔을 맨살 같은 언어로 맞이하는 시적 환대의 어떤 자세를 안미옥의 첫 시집은 이룩한다. 그녀의 시집을 읽는 내내 나를 떠나지 않았던 이미지가 하나 있었다. 푸른 새벽빛 속에 기도하는 자세를 이룬 검은 실루엣. 그것은 단정하고 간절하고 환하고 슬펐다. 그 검은 실루엣으로 “끝까지 걸어가는 사람”이 당신을 향해 바야흐로 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