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을 줄이고, 공부할 것. 홀로 전면에 나서지 말 것.
“책임은 팀의 몫이에요. 그 일을 한 사람 외에 누구도 확인하지 않는다는 건, 말이 되지 않습니다. 누군가 마치 본인과 무관한 일로 여긴다면 납득할 수 없는 추태입니다. 책임질 일 앞에서 돌연 이방인이 되어 버리는 유체이탈 수법에 흔들리지 마세요. 인간의 어떤 무능도 부끄러움의 능력을 잃은 것만큼 부끄럽지는 않습니다.”
“이 시점에 동일 노동 · 동일 임금을 개진하는 것은요, 동일 면적 · 동일 지대를 주장하는 것만큼 요원한 일이 되었어요.”
Girolamo Savonarola, 1452~1498
지롤라모 사보나롤라. 도미니크회 수도원에 들어가 공부하고, 1491년 피렌체의 성마르코 수도원장이 되어, 교회 혁신을 위한 설교와 예언자적 언사로써 신도들을 지도하여, 시민의 정신적 지도자와 같은 지위에 올랐다. ‘하느님의 노여움’이라고 그가 예언한 1494년 프랑스 국왕 샤를 8세의 이탈리아 원정은, 이탈리아인들에게는 신벌(神罰)로 받아들여졌으므로, 프랑스인들은 이와 결탁하여 민주정치와 신재정치(神裁政治)를 혼합한 헌법으로 피렌체를 통치하려고 하였다. 교회 내부개혁에는 많은 사람이 동조하였으나, 1497년의 사육제에서는 시민의 사치품과 이교도적 미술품 및 서적을 불태운 이른바 ‘허영의 소각’을 비롯한 과격한 방법을 취함으로써 크게 반감을 샀다. 프랑스군이 철수한 뒤, 반대 세력이 우세해지고 교황 알렉산드르 6세와의 불화, 프란체스코회와의 대립 등으로 지지 기반을 잃어 다른 2명의 도미니크회 성직자와 함께 화형에 처해졌다. 저서로 <십자가의 승리 Triumphus crucis, ‘Compendium revelationum’>가 있다.
1492년 8월 11일 로드리고가 교황 알렉산데르 6세로 선출되자 체사레의 운명도 새로운 길로 접어들게 되었다. 1493년 9월 체사레는 아버지에 의해 발렌시아 대주교와 추기경으로 임명되었다.
1494년 나폴리공국의 왕위 임명을 두고 불만을 품은 프랑스 샤를 8세(1470~1498)가 로마를 침공하자 산탄젤로 성에 갇혀 정치적 위기에 몰리게 되었다. 프랑스군이 퇴각하자 프랑스 잔류군을 소탕하였고 나폴리 왕 대관식에 대리 참석하였다. 하지만 이 시기에 방탕한 사생활로 나폴리에서 매독에 걸려 일생 동안 고생하게 된다.
1498년 추기경직을 포기하였고 로마냐에 왕국을 세워 군주가 되려는 야심을 키우기 시작했다. 프랑스 국왕의 도움이 필요했으며 정치적 관계를 개선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교황 특사로서 프랑스에 갔으며, 국왕 루이 12세와 친숙해져 발렌티누아 공작이 되었고 그가 추천하는 여자와 결혼하였다. 프랑스의 지원으로 중부 이탈리아의 여러 영주들을 정벌하였으며, 1501년까지 로마냐 지방을 정복하여 지배 영역으로 만들었다. 또 나폴리 왕국에도 침입하였고, 밀라노와 피렌체 공화국을 위협하여 항복과 동맹 서약을 받아냈다.
체사레는 이탈리아 중부 지역인 로마냐를 통치하는 군주가 되는 것이 목표였고 알렉산데르 6세는 아들 체사레를 통해 자신의 정치력을 공고히 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체사레는 부친 알렉산데르 6세가 죽기 전에 목적을 달성해야만 했다. 체사레는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냉혹한 처사로 사람들을 떨게하였고, 마키아벨리는 그를 이상적 전제군주로 보고 이탈리아 통일의 가능성을 내다 보았다.
1503년 8월 18일 말라리아에 걸린 알렉산데르 6세가 죽고, 보르자 가의 숙적인 율리우스 2세가 교황으로 즉위하자 체사레는 실각하여 산탄젤로 성에 감금되었다. 에스파냐 카스티야 메디나 델 캄포에 있는 라 모타 요새에 이감되었다가 탈출하여, 나바라 왕국 팜플로나로 갔다. 나바라 왕국의 총사령관으로 임명되어 스페인 아라곤의 페르디난드와 전쟁를 벌일 예정이었으나, 나바라 왕국 내 페르디난드 일파인 루이 드 뷰몽 백작이 배신하여 내전이 일어났다. 1507년 3월 12일 체사레는 드 뷰몽 백작의 라히아쥐 성을 공격하다 포위되어 스물다섯 군데나 자상을 입고 죽었다.
알렉산데르 6세. 본명은 로드리고 보르자(Rodrigo Borja, 1431~1503)이다. 그는 많은 여성과 교제하여 자녀를 여럿 두었는데 체사레 보르자가 그의 아들이다. 로드리고는 그의 삼촌이 그랬던 것처럼 자신의 숨겨둔 아들 체사레를 추기경으로 임명했다. 그가 중용하던 자신의 사생아 4명 중 가장 야심가인 체사레 보르자를 시켜 로마냐 지방에 강력한 나라를 만들려고 하였다. 이러한 계획을 위해 신성 로마 황제인 막시밀리안 1세, 프랑스 국왕 샤를 8세와 루이 12세 등을 상대로 온갖 권모술수를 다하였다. 그는 성직자라기보다는 세속 군주와 같이 호화로운 궁정을 영위하면서 성직을 매매하였으며 자신의 정치적 목적을 위해서는 교황의 지위를 잔인하게 이용했다. 자기의 사생아 체사레를 교황군 총사령관으로 임명하여 주변국을 위협했으며 교황령을 확대하기 위한 음모를 꾸몄다. 이러한 그의 정책은 ‘네포티즘’(Nepotism)이라 불리는데 이는 자기의 사생아를 조카(nepos)라 하여 중용한 데서 유래한 말이다. 강력한 군사력의 가진 스페인과 프랑스 사이에서 정치적 위기에 몰렸고, 1503년 말라리아에 걸려 73세로 사망했다. 그가 사망하자 아들 체사레 보르자도, 권력도 무너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