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다고가 있는 효고 현 고베 시
객관과 주관이 대면하면, 전자는 대상이 후자는 주체가 된다. 객관의 대상화, 즉 주체에 의한 대상의 포섭이다. 닦달하여 장악. 파악. 여기서 닦달은 분석, 장악은 해부로 읽을 수 있겠다. 참된 인재인가, 그럼 어떤 인재인가.
의식과 대상의 이어짐이 빚는 경험의 수수께끼가 ‘명확한 침묵’이다. 기술된 바를 거르는 현상학적 환원은 자유 변경을 걷어낸 본질 직관이고, 이것은 언제나 이미 [역설적이게도 가능성을 열어 두는] 판단 중지를 요청한다.
객관Objekt은 주관Subjekt과는 무관하게 그 자체로서 완전히 자립적으로 존재하는 외부 세계이다. 이러한 객관이 인간의 의식이나 활동(또는 이 둘을 통칭하는 실천) 앞에 서게 될 때, 즉 주관에 대면할 때 우리는 그것을 대상Gegenstand이라 하며, 주관은 그러한 대상을 자신의 실천의 대상으로 삼음으로써, 즉 ‘대상적 활동’을 통해서, 주체가 되며, 이때 대상은 주체 안으로 포섭됨에 따라 대상이 가진 성질, 즉 대상성Gegenständlichkeit을 폐기하게 된다. 따라서 마르크스가 말하듯이 외부 세계는 이미 인간의 활동, 실천의 대상이므로 대상, 현실, 감성이지 그 자체 독립적인 객관이 아니다.
직관은 무엇인가? 직관은 전통적인 의미로는 사유가 대상과 직접적으로 관계를 맺는 방식이다. 가령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에서의 다음과 설명은 이에 해당한다: “객관적인 지각이 인식이다. 이것은 다시금 직관이거나 개념이다. 전자는 직접적으로 대상과 관계 맺으며, 개별적이다. 후자는 간접적으로, 곧 다수의 사물들에 공통될 수 있는 징표를 매개로 해서 대상과 관계 맺는다.”(A320/B377, 백종현 역본)
III Woman as Image, Man as Bearer of the Look
Laura Mulvey, “Visual Pleasure in Narrative Cinema”, Screen, vol. 16(08/1975), pp 6-18.
Who kept my commandments and followed me with all his heart, doing only that which was right in my eyes(1 Kings 14:8 ESV)