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chive for September, 2017

September 22, 2017: 2:18 pm: bluemosesErudition

8. 모든 도덕주의자들이 견해를 같이하듯 만성적인 자책감은 매우 바람직하지 못한 감정이다. 혹시 무슨 나쁜 행위를 저질렀다면, 잘못을 뉘우치며 능력껏 그것을 시정하고, 다음에는 더 잘하도록 스스로 다짐해야 옳다. 어떤 경우에도 자신의 잘못에 두고두고 집착해서는 안 된다. 오물 속에서 뒹구는 것이 몸을 깨끗이 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아니다.

13. 보편적인 생활 철학이란 ‘최대의 행복’이라는 원칙이 ‘궁극적인 목적’ 원칙에 이차적으로 부수되는 일종의 고등실용주의처럼 기능하여, 삶의 모든 우발적인 상황에서 가장 먼저 묻고 대답해야 할 질문은 이렇게 귀결되리라 - “이런 생각이나 행동이, 나와 굉장히 다른 많은 사람들이 인간의 궁극적인 목적을 성취하는데 있어서 어떻게 기여를 하거나, 또는 저해하는가?”

30. 겨우 34층밖에 안 되는 나지막한 잿빛 건물. 정문 입구 위에는 ‘부화-습성 훈련 런던 총본부’라는 현판이 걸렸고, 방패꼴 바탕에는 ‘공동체, 동일성, 안정성’이라는 세계국의 표어.

48-49.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사랑한다는 것 -.” 국장이 단호하게 힘주어 말했다. “그것이야말로 행복과 미덕의 비결이다. 불가피한 사회적인 숙명을 사람들이 좋아하도록 만드는 훈련, 모든 습성 훈련이 목표하는 바가 바로 그것이다.”

63~66. 국장은 길게 줄지어 선 간이침대를 따라 천천히 걸어 내려갔다. 잠을 자서 피로가 풀리고 얼굴이 발그레한 80명의 어린 사내아이들과 계집아이들이 새근새근 숨을 쉬고 있었다. 모든 베개 밑에서는 귀엣말이 들려왔다. 부화본부 국장이 걸음을 멈추고는 어느 작은 침대 위로 몸을 수그리고 주의 깊게 귀를 기울였다. “기초 계급의식이라고 그랬나? 어디 확성기로 조금 더 크게 틀어서 다시 들어보지.” 방 끝에 확성기 하나가 벽에서 튀어나와 있었다. 국장이 그곳으로 걸어가서 스위치를 눌렀다. “…… 모두 초록색 옷을 입어요.” 부드럽지만 아주 명확한 목소리가 중간부터 얘기를 시작했다. “그리고 델타 아이들은 황갈색 옷을 입습니다. 아, 싫어요. 난 델타 아이들하고는 놀고 싶지 않아요. 엡실론들은 더 형편없죠. 그들은 너무 우매해서 글을 쓰거나 읽을 능력이 없어요. 그뿐 아니라 그들은 너무나 흉측한 빛깔인 검정색 옷을 입어요. 나는 내가 베타여서 정말로 기쁩니다.” 잠깐 침묵이 흐르더니 목소리가 다시 계속되었다. “알파 아이들은 회색 옷을 입어요. 그들은 너무나 무서울 정도로 총명하기 때문에 우리들보다 훨씬 열심히 일합니다. 나는 그렇게까지 열심히 일을 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에 베타가 되었다는 것이 정말 굉장히 기쁩니다. 그런가 하면 우리들은 감마나 델타보다 훨씬 좋습니다. 감마들은 어리석어요. 그들은 모두 초록색 옷을 입어요. 그리고 델타 아이들은 황갈색 옷을 입습니다. 아, 싫어요. 난 델타 아이들하고는 놀고 싶지 않아요. 엡실론들은 더 형편없죠. 그들은 너무 우매해서 글을 …….” 국장이 다시 스위치를 눌렀다. 목소리가 잠잠해졌다. 유령처럼 나지막한 목소리가 80개의 베개 밑에서 계속 웅얼거렸다. “그들은 잠이 깨기 전에 저 소리를 40번이나 50번 거듭해서 듣고 목요일에 다시, 그리고 토요일에도 또 듣는다. 일주일에 세 번 120번씩 30개월 동안 듣게 된다. 그런 다음에 그들은 보다 상급반 학습으로 넘어간다.” 장미꽃과 전기 충격, 델타의 황갈색 옷과 아위(미나리과의 다년초)의 강렬한 냄새 – 이런 연상 개념들은 아기가 말을 배우기 전에 서로 단단히 엮어진다. 하지만 어휘를 수반하지 않는 습성 훈련은 조잡하고 개괄적이어서, 보다 세밀한 특성을 인식시키지 못하고, 복합적인 행동의 개도를 치밀하게 가르쳐주지 못한다. 간단히 얘기하자면, 최면 학습이 해답이다.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도덕화, 사회화시키는 가장 훌륭한 힘이다.” (중략) “그러다가 마침내 아이의 마음은 이런 암시들과 하나가 되고, 암시들의 총체는 아이의 이성이 된다. 뿐만 아니라, 어른의 이성도 역시 평생 동안 줄곧 이런 암시들의 지배를 받는다. 판단하고 갈망하고 결정하는 이성은 바로 이런 암시들로 구성되어 있다. 하지만 이런 모든 암시들은 우리들이 제시하는 암시다!” 국장은 의기양양해서 소리를 지르다시피 했다.

72~73. 무스타파 몬드 포드 님! 경례를 하는 학생들은 너무나 흥분한 나머지 눈알이 튀어나올 지경이었다. 무스타파 몬드라니! 서부 유럽 통제관이 아닌가! 10명뿐인 세계 통제관들 가운데 한 사람, 10명 가운데 한 사람이 …… 바로 그런 대단한 분이 부화본부 국장과 함께 벤치에 마주 앉아서, 자리를 같이하고는, 그렇다, 자리를 같이하고는, 정말 그들과 얘기를 나누려는 참이었으니 …… (중략) “너희들 모두 기억할 것이다.” 힘차고 굵은 목소리로 통제관이 말했다. “우리 포드 님께서 들려주시던 감동적이고 멋진 말씀을 너희들은 누구나 다 기억할 것이다. ‘역사는 허튼 수작’이다.” 그는 마지막 말을 천천히 되풀이했다. “역사는 허튼 수작이다.”

81~82. 어머니와 아버지, 형제와 자매가 있었다. 그리고 남편과 아내와 연인도 존재했다. 그뿐만이 아니라 일부일처제와 낭만이라는 것도 있었다. “너희들은 아마 그것들이 무엇인지 이해조차 못 하겠지만 말이다.” 무스타파 몬드가 말했다. 학생들은 머리를 끄덕였다. 가족, 일부일처제, 낭만. 그로 인해서 어디를 가나 배타성이 존재했고, 어디를 가나 관심은 한곳으로만 쏠렸고, 충동과 정력은 좁다란 분출구를 통해서만 발산되었다. “하지만 모든 사람은 다른 모든 사람을 공유한다.” 최면 학습에 나오는 잠언을 인용해서 그는 결론을 내렸다. 어둠 속에서 6만 2,000번 이상 반복하여 들었던 잠언인지라 학생들은 그 결론에 완전히 동의했다. 그들은 단순한 진실로서만이 아니라 자명하고 전혀 반박의 여지가 없으며 격언이 되다시피 한 진리로서 받아들이겠다는 뜻으로 머리를 끄덕였다.

91. 패니는 충격을 받았다. “사람들 얘기를 들어보니까 그가 아직 병 속에 들어 있을 때 누가 실수를 해서, 그가 감마인 줄 알고는 대용 혈액 속에 알코올을 넣었대요. 그래서 그렇게 발육이 안 됐다는 군요.”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예요!” 레니나가 격분했다.

92. ‘4년에 걸쳐 일주일에 3일 밤 동안 100번씩 반복되었지.’ 최면 학습의 전문가인 버나드 마르크스는 생각했다. 6만 2,400번의 반복은 하나의 진리를 만든다. 백치들!

147. 본부 전체에서 야만인 보호 구역에 들어가 본 적이 있는 사람은 겨우 대여섯 명에 지나지 않았다. 버나드는 알파 플러스 심리학자였으므로, 그녀가 알기로는 버나드야말로 허가서를 받을 자격이 충분한 몇 안 되는 사람들 가운데 하나였다. 레니나에게는 둘도 없는 기회였다.

170~171. 그는 과거에 자주 (소마나 그 무엇의 도움도 없이 자신의 내적인 자질에만 의존해서) 어떤 커다란 시련, 고통, 박해에 맞서게 되면 어떨까 하고 궁금하게 생각했었고, 심지어는 그런 고난을 갈망하기까지 했었다. (중략) 레니나가 그러지 말라고 머리를 저었다. “과거가 어떻든 앞으로가 어떻든지 간에 이것저것 따져봤자 골치만 아파져요.” 그녀가 말했다. “소마 1그램이면 그런 걱정은 다 없어진다니까요.” 결국 그녀는 소마를 네 알이나 삼키도록 그를 설득했다. 5분 후에 근심의 나무에서는 원인의 뿌리와 결과의 열매들이 사라졌고, 현재의 꽃만이 장미처럼 활짝 피었다.

191. “난 너무나 부끄러웠어요. 베타인 내가 아기를 낳다니, 내 입장이 되었다고 한번 상상이나 해봐요.” (레니나는 그녀의 말만 듣고도 몸이 부르르 떨렸다.) “하지만 맹세컨대 그건 내 잘못이 아니었어요. 모든 맬서스식 훈련을 쌓았던 나로서는, 당신들도 알잖아요, 맹세컨대 항상 하나, 둘, 셋, 넷 숫자를 헤아려 가면서 실행했어요. 어쩌다가 그런 일이 벌어졌는지 난 아직도 납득이 안 가지만, 어쨌든 그런 일이 벌어졌어요.”

219~220. 레니나를 생각하자 그의 상기된 얼굴이 갑자기 더욱 붉어졌다. 젊음과 더불어 피부 영양제로 윤기가 나고, 포동포동하고, 상냥한 미소를 짓고, 진한 초록색 인조견을 걸치고 있는 그녀의 모습은 영락없는 천사였다. 존은 말을 더듬거렸다. “오, 멋진 신세계여”(《템페스트》 5막 1장 183행)

240. “소마는 시간적으로 몇 년쯤 상실하게 만들기는 합니다.” 의사가 얘기를 계속했다. “하지만 그것이 시간을 벗어나서 인간이 측정할 수 없는 다른 존속성의 기간을 얼마나 무한하게 누리도록 도와주는지 생각해보세요. 모든 소마 휴식은 우리 조상들이 예전에 영원성이라고 부르던 그런 개념의 한 조각입니다.” 존은 이해가 가기 시작했다. “영원은 우리의 입술과 눈에 깃들었나니.”(《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 1막 3장 35행으로 클레오파트라가 안토니우스에게 한 말) 그가 중얼거렸다.

332. 그는 얼굴을 찡그렸다. “염소와 원숭이들!”(Goats and Monkeys, 추잡하고 간사한 것들이라는 의미. 《오셀로》 4막 1장 289행에서 오셀로가 화를 내며 퇴장할 때 쓴 표현) 그는 자신의 혐오와 증오를 충분히 전달할 수단을 오셀로의 말에서밖에는 찾아낼 길이 없었다.

337~338. 무스타파 몬드가 미소를 지었다. “글쎄요, 유리병 재처리 작업에 관한 실험이라고 해도 되겠죠. 그건 포드 기원 473년에 시작되었어요. 통제관들은 사이프러스에서 기존의 거주자들을 모두 철수시키고는 특별히 준비된 2만 2,000명의 알파 집단을 새로 정착시켰습니다. 온갖 농기구와 산업 장비를 그들이 인수했고, 스스로 일을 처리해 나가도록 그들끼리만 남았어요. 그 결과 모든 이론적인 예언들이 그대로 충족됐어요. 땅은 제대로 경작되지 않았고, 모든 공장에서 파업이 일어났고, 법들이 아무런 효력도 발휘하지 못했고, 사람들은 명령에 복종하지 않았어요. 하층 작업의 근무를 위해 배정된 사람들은 고급 직책을 얻기 위해 끝없이 책략을 꾸몄고, 고급 직책을 맡은 사람들은 그들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 있는 힘을 다 기울여 역으로 책략을 꾸몄습니다. 6년 이내에 그들은 1급 내란을 일으켰고, 2만 2,000명 가운데 1만 9,000명이 죽었으며, 생존자들은 이구동성으로 세계 통제관들에게 섬의 통치를 다시 맡아달라고 탄원했어요. 결국 그들의 뜻대로 되었죠. 세상 사람들이 알파들로만 이루어진 사회를 본 것은 그것이 마지막이었어요.”

358~359. “이봐요, 젊은 친구.” 무스타파 몬드가 말했다. “문명은 숭고함이나 영웅성을 전혀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그런 개념들은 정치적인 비능률성의 징후들이죠. (중략) 어떠한 불운한 상황에 의해서 혹시 불쾌한 상황이 일어나는 경우라면, 그럼요, 소마가 언제라도 현실로부터 휴식을 마련해줍니다. 분노를 진정시키고, 적들과 타협을 하고, 고통을 오래 견디고 인내하게 만들어주는 소마가 항상 곁에 있단 말이에요. 과거에는 굉장히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여러 해 동안 힘든 도덕적인 훈련을 거쳐야만 이런 일들을 달성할 수가 있었어요. 하지만 이제는 반 그램짜리 정제 두세 알만 삼기면 다 해결됩니다. 이제는 어느 누구라도 덕망을 지니기가 쉬워요. 사람들은 인성의 절반쯤은 병 하나에 넣어 가지고 다닐 수 있어요. 눈물 없는 기독교 정신 – 소마가 바로 그것이죠.”

395. 마약의 영향을 받는 동안에는 주변의 사람들과 또한 자신의 삶에 대해서 예리한 통찰력을 얻게 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놀랍게도 잊어버렸던 사실들을 많이 기억해냅니다. 심리 분석으로 6년이나 걸려야 해낼 일이 단 한 시간 동안에 그것도 아주 쉽게 이루어집니다. 또 그런 경험을 다른 방면으로 대단히 자유롭게 확대하고 접목시킬 수도 있고요. 그것은 그가 당연시하는 세계가 사실은 치밀하게 조절을 당하는 습성, 그러니까 관습의 부산물일 따름이고, 외부에는 아주 다른 세계들이 존재한다는 가능성을 보여줍니다.

399. 《멋진 신세계》는 1932년에 발표했다. 그는 열여덟 살 때 완전히 실명했다가 몇 년 동안 고생한 후에 차차 시력을 회복한 경험이 있었으며, 1936년에는 그런 경험을 바탕으로 삼아 《가자에서 눈이 멀어 Eyeless in Gaza》를 발표했다.

_ 올더스 헉슬리, 안정효 옮김, <멋진 신세계>, 소담출판사, 2015.

: 1:01 pm: bluemosesErudition

“He who dwells in the shelter of the Most High will abide in the shadow of the Almighty.”

: 12:59 pm: bluemosesErudition

A Pure Friendship or a Great Romantic Affair?

: 11:48 am: bluemosesErudition

복잡한 프로세스의 일을 잦은 빈도로 기꺼이 귀찮게 완수하는 사람은 ‘장인’이 된다.

: 11:31 am: bluemosesErudition

범죄의 측면에서도 [청장년이 아닌] 유소년 교육재정 확대가 ‘복지의 핵’이다.

: 10:45 am: bluemosesErudition

두란노아카데미에서 나온 <고백록/신앙편람>은 번역도, 주해도 쓸만하지 않다. 정가 50,000원. 후회가 크다.

September 21, 2017: 7:18 pm: bluemosesErudition

“중국 공산당은 6·4 천안문 사건(1989년) 이후로 3개 파벌, 즉 태자당과 상하이방, 공청단파가 균형을 이뤘고 번갈아 집권했다. 삼족정립(三足鼎立)에 따라 정치 안정이 이뤄졌다. 그런데 지금은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최근 몇 년간 시진핑 주석이 상하이방과 공청단 세력을 많이 제거했다. 원래 자신을 지지했던 태자당도 마찬가지다. 금융계와 증권업계에 대한 반부패 사정 및 대기업 숙정 등을 통해서다.”

“중국 공산당에는 근심체고(根深蔕固), 즉 뿌리가 깊어 흔들리지 않는 신념이 있다. 정권은 총구에서 나온다는 것인데, 다른 방법으로 권력 유지가 불가능할 경우엔 군에 의존한다. 마오쩌둥(毛澤東)이 린뱌오(林彪)를 활용해 류사오치(劉少奇)를 정리했던 방법이다. 지금 권력투쟁의 한 축에서 군을 활용하고 있는 게 아니냐는 추정을 해볼 수 있다.”

: 5:48 pm: bluemosesErudition

14. 보이는 것을 넘어 보이지 않는 것을 발견하는 힘 그리고 그렇게 새로이 발견한 것을 현실에 구현해내는 힘, 이 두 힘은 인간의 지적 문명을 구동하는 힘인 동시에 인간의 생각이 지닌 고유한 본질입니다. 철학자 플라톤이 위대한 까닭은 그가 감각의 눈으로는 보이지 않는 관념의 세계를 볼 수 있게 해주었기 때문이고, 프로이트가 놀라운 이유는 의식하지 못하던 영역을 인식하게 해주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아직 보지 못하는 영역들, 예를 들면 10의 -35승 미터의 세계나 10의 27승 미터의 세계까지 탐색하고 들여다보고자 애쓰는 이론과학자나 그렇게 본 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고자 시도하는 실험과학자도 그런 점에서는 마찬가지입니다.

25~26. 아르헨티나의 소설가 보르헤스는 타고난 이야기꾼입니다. 현실과 상상이 뒤섞인 그의 이야기들은 재미뿐 아니라 많은 생각거리를 던져줍니다. 그 가운데 지도를 만드는 사람들의 욕망에 관한 우화가 있습니다. (우리말 번역본으로는 《칼잡이들의 이야기》라는 책 <과학에 대한 열정> 편에 나옵니다.) 먼 예날 어느 제국에서 지도를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지도 제작자들은 갈수록 더 정밀한 지도를 만들길 원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지도는 점점 더 커졌고, 어느새 재국을 뒤덮어버릴 정도로 커다란 지도를 만들기에 이릅니다. 물론 이 거창한 지도 이야기의 마지막은 우리 짐작을 벗어나지 않습니다. 지도가 너무 커서 쓸모가 없어져서 결국에는 쓰레기가 되고 말았다는 겁니다. 프랑스의 우울한 회의주의자이자 현대 문명 비판자였던 보드리야르는 자신의 이야기를 펼치기 위해 《시뮬라시옹》에서 보르헤스의 이 우아한 비유를 가져다 씁니다. 보드리야르의 주제는 시뮬라크르(simulacre)로 가득 찬 세상을 고발하는 것이었습니다. 시뮬라크르는 어떤 사물이나 사태를 가리키는, 일종의 기호적 상징을 말합니다. 예컨대 젊은 연인의 손에 들린 장미는 사랑의 시뮬라크르일 겁니다. 또 텔레비전 뉴스 화면에 등장하는 영상들은 우리가 사는 현실이 얼마나 흥미진진한지를 보여주는 시뮬라크르입니다. 우리가 신용카드라는 시뮬라크르를 사용해서 소비하는 수많은 상품도 시뮬라크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고급 자동차를 사면 성공한 사람이 된 듯하며, 바이크를 타면서 자유를 느끼고, 유기농 식품을 구매할 때는 건강을 얻은 양 여기는 것도 시뮬라크르 효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시뮬라크르는 원본을 대신해서 사용하는 기호적 상징이므로 그 시뮬라크르가 가리키는 뭔가가 실제 있다고 믿는 일은 자연스러워 보입니다.

40~41. 플라콘의 대화편 《메논》에는 이와 관련한 흥미로운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소크라테스가 노예 소년과 대화를 합니다. 대화의 주제는 정사각형이 하나 있다고 할 때, 그 면적의 두 배가 되는 정사각형을 만들어보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그 소년은 기하학에 관해서는 아무것도 배우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하지만 소크라테스는 역사상 가장 훌륭한 선생님 중 한 명이 아닙니까. 대화를 통해 지성을 일깨우는 데 그만한 사람은 없었습니다. 소년은 소크라테스와 나눈 대화만으로 주어진 정사각형에 비해 정확히 두 배가 큰 정사각형을 이해했습니다. 대각선을 이용한 것이었죠. (중략)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소크라테스가 그저 말로만 설명하지는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이해를 도울 그림이 없었다면 아마도 소년은 이 문제를 훨씬 어렵게 느꼈을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경험적으로 아는 시뮬라크르의 기능이자 힘입니다. (이제부터는 시뮬라크르를 모형이라고 부르겠습니다. 자신이 본 바를 현실에 구현하기 위해 일단 만들어보는 것 말입니다.)

42~43. 플라톤의 생각은 무척이나 직선적입니다. 그는 참된 존재는 결코 소멸하지 않는다고 생각했습니다. 소멸한다는 것은 곧 불완전하다는 뜻이며, 그런 의미에서도 모형은 참되지 못합니다. 그래서 오직 지성의 눈에만 보이는 형상(eidos) 혹은 이데아(idea)만이 참된 존재라고 여겼습니다. 현실에서 셀 수 없이 많은 책상이 만들어지고 또 사라지지만 책상의 이데아는 여전히 존재합니다. 아니 영원하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쓰는 눈앞의 책상은 챡상이라는 이데아의 한 모형일 뿐입니다. 플라톤이 이데아 이론을 통해 의도했던 바는 책상이 어떻게 생겨나는지를 아는 일만은 아니었습니다. 그의 진짜 관심은 그저 사물의 이데아만이 아니라 인간의 인간다움, 나아가 한 공동체의 이데아가 무엇인지를 아는 일이었습니다. 플라톤은 지성의 눈으로 책상의 이데아가 보이듯이 참된 인간 혹은 참된 삶, 나아가 참된 공동체의 이데아도 지성의 눈으로 볼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 이데아를 알 수 있다면 무엇이 훌륭한 인간이고 어떻게 살아야 훌륭한 삶이며 어떤 공동체가 훌륭한 공동체인지도 알 수 있겠죠. 실제로 인간의 좋은 삶과 훌륭한 공동체의 본성을 보는(아는) 문제는 플라톤에게 가장 중요한 질문이었습니다.

46~47. 플라톤 역시 이데아를 본 자가 현실에서 그 이데아를 구현하려면 일종의 모순적 상황에 직면할 수 있음을 예감한 모양입니다. 때문에 그는 적도(適度, to metrion), 다시 말해 적절한 정도를 측정하는 기술을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이데아가 현실에 구현되는 과정은 그 조건에 따라서 달라질 것이며, 그런 한에서 지혜로운 자는 주어진 현실을 고려하여 적절성의 정도를 찾아내야만 할 것입니다. (중략) 모형을 만들어보는 일은 불완전한 것들로 이루어진 현실에서 완전한 것이 어떻게 구현될 수 있는지를 시험해보는 과정입니다. 그리고 직접 해보기 전에는 보이지 않던 것을 보이도록 하는 과정입니다. 우리가 무엇인가를 제작할 때 여러 모형을 만드는 이유는, 가장 적합한 상태를 결정하기 위함입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가 이렇게 저렇게 모형을 만들어보는 일, 즉 플라톤이 말한 적도를 가늠하는 과정은 모두 맥락 의존적 혹은 상황 의존적입니다.

62~63.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가 형이상학적 원리에 관심을 두었던 이유는 그것이 ‘왜?’라는 물음에 대답해주는 설명적 기능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반면 갈릴레이는 그런 물음에 관심을 두지 않았습니다. 사물이 왜 지상으로 낙하하는지에 대한 이유는 묻지 않고, 오직 어떻게 낙하하는지에 대해서만 관심을 가졌습니다. 예를 들면 자유낙하운동에서 물체의 낙하 거리는 시간의 제곱에 비례한다는 식입니다. (중략) 형이상학적 물음과 해답은 사실상 객관적 검증이 불가능하므로, 서로가 진리라고 주장하는 논쟁이 끊임없이 되풀이될 수밖에 없습니다. 실제로 갈릴레이 이전 중세 철학자들 사이에서 벌어진 수백 년 간의 논쟁들은 갈릴레이가 형이상학적 물음이 무익하다고 생각하게 만든 이유이기도 했습니다. 궁극적 원인을 묻기보다는 현상이 실제로 어떻게 변하는지를 묻는 것, 이러한 물음 방식의 변화는 단순히 질문 종류의 전환을 넘어 세계를 이해하는 패러다임이 달라지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64. 갈릴레이는 변화와 운동의 궁극적 원인이 무엇인지에는 관심을 두지 않았습니다. 그런 탐구는 오히려 무익하다고까지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런 변화의 역학적 성질을 어떻게 다룰 수 있는지에만 관심을 가졌고, 결국 그런 변화들을 측정 가능하며 객관적인 수학적 언어로 표현할 수 있음을 보여준 것입니다.

71~72. 확실히 우리에게는 에피메테우스와 판도라의 유전자가 흐르고 있는 모양입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우리에게 프로메테우스의 유전자 역시 섞여 있다는 점입니다. 새로운 인류의 어머니 퓌라가 에페메테우스와 판도라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그 남편 데우칼리온은 바로 프로메테우스의 아들이었으니까요. 그들이 대홍수의 재앙에서 벗어나 인류의 새로운 조상이 될 수 있었던 까닭은 경건한 삶을 살았기 때문입니다.

74. 실험실에서의 반복적 심문으로 인해 자연은 인간에게 비밀을 고스란히 자백했지만, 사실 그것은 자연의 모습 중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습니다.

86. 흔히 인문학이라는 이름으로 번역되는 독일어의 ‘정신과학’(Geisteswissenschaft)은 영국의 존 스튜어트 밀이 사용한 ‘도덕 과학’(moral science)이라는 개념을 번역한 말입니다. 두 단어에서 핵심은 바로 ‘가치’입니다.

92. 차이를 인정하자는 건전한 슬로건은 속내를 드러내는 일을 일종의 터부로 생각하는, 그럴듯한 수사이기 쉽습니다. 동일성을 전제하지 않는, 순수한 차이는 그저 대립일 뿐입니다.

92~93. 플라톤이 감각 너머 영원히 변치 않는 이데아의 세계를 보려고 한 것이나, 갈릴레이와 뉴턴이 우리 감각을 배제하고 수학적으로 묘사될 수 있는 세계를 보려고 한 것 모두 하나의 원리를 따른 결과입니다. 주어진 것을 넘어서 더 나아가려는 호기심, 그것은 학문의 본성이기도 합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학문의 뿌리를 이 세계에 대한 ‘놀라운 호기심’(thaumazein)으로 설명한 것도 같은 이치입니다.

93. 우리가 구분해야 하는 것은 인문학과 자연과학이 아닙니다. 보이는 것을 넘어 그 이상의 것을 보려고 하는 의지가 있다는 점에서 인문학과 자연과학은 오히려 동류입니다. 오히려 인문학과 자연과학을 한 편에, 다른 편에 기술과 예술을 두고 그 차이에 주목해봄 직합니다. 인문학과 자연과학이 모두 보이지 않는 것을 보려는 탐구 작업이라면, 기술이나 예술은 그렇게 본 것을 현실에 구현해내는 작업이기 때문입니다.

97. 프랑스의 실존주의 철학자 사르트르는 《존재와 무》에서 타인을 영원한 지옥이라고 표현한 바 있습니다. 타인은 나와 똑같이 자유의지를 가진 존재입니다. 그래서 그 속내를 도무지 알 수가 없습니다.

101. 행동에 우연은 없습니다. 우연이라는 말을 ‘원인 없이 일어나는 일’로 이해한다면 말입니다. 그렇다면 우연이라고 일컬을 수 있는 경우는 우리가 의도한 바와는 어긋나게 일어난 행위일 것입니다. 따라서 개회를 선언해야 할 의장이 폐회를 선언한 것을 두고 우연이라고 하는 이유는, 자신의 의도와 어긋나게 폐회라는 말이 튀어나왔다는 뜻이겠지요. 다시 말해 폐회라고 말할 이유가 없는데 그 말이 나왔으니 (특정한 원인이 없다는 뜻에서) 우연이라고 말할 수 있다는 겁니다. 하지만 이에 대해 프로이트는 《정신분석 강의》에서 이렇게 설명합니다. “그런 방식으로 어떤 사람이 자연의 어느 한 부분에서만이라도 인과율을 무의미하게 만들어버릴 수 있다면, 그는 모든 과학적 세계관을 팽개쳐버린 것과 다름없을 것입니다.”

116~117. 인간 정신을 둘러싼 자욱한 안개가 이런저런 시도를 통해 서서히 걷히는 현실이 고무적이기는 하지만, 그 설명 과정에서 중요한 뭔가를 놓치고 있다는 느낌이 들기 때문입니다. 바로 자유의 문제입니다. 인간의 의식과 행동은 결국 뇌의 작용으로 설명할 수 있다는 뇌과학자의 설명 그리고 우리 의식적 행위 대부분이 무의식의 영향을 받는다는 정신분석학적 설명, 둘 모두 인간의 자유가 무엇인지를 만족스럽게 설명해내지 못합니다. 앞서 타인을 영원한 지옥이라고 표현한 사르트르가 인간에게서 가장 주목한 바 역시 자유의 문제입니다.

133. 시인이 창조자인 이유는 그가 사실에 덧대어진 또 다른 가능성의 공간, 기형도의 표현을 빌자면 ‘창조적 세계’를 형상화해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시인은 자신이 ‘본’ 것을 ‘보이도록’ 만드는 일에 탁월한 사람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시인은 발견자이기도 하며, 구현의 장인이기도 합니다.

152, 하이데거는 한 강의에서 “과학은 사유하지 않는다”라는 유명한 말을 하기에 이릅니다. 물리학은 물리학이 무엇인지에 대해 되묻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런 물음은 물리학적 물음이 아니라 철학적 물음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과학은 사유하지 않는다는 말이었겠지요. 그런데 이런 비판은 좀 부적절해 보입니다. 인간 사유의 참모습이 오직 근원적 본질을 묻는 물음에만 제한될 이유는 없기 때문입니다.

161~162.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핵심은 이것입니다. 차이는 언제나 동일성을 전제할 때 생산적이라는 점입니다. 순수한 차이는 대립을 의미할 뿐이며, 그에 갇힌 한 대화도 가능하지 않습니다. 오늘날 세련된 지식인들이 신조처럼 믿는 다양성의 존중에서 강조되어야 할 바는 다양성이 그저 순수한 차이가 아니라 동일성에 기초한 차이를 의미한다는 점입니다. 동근원성으로부터 파생된 차이, 그것이 생태계의 풍요로움이자 생명이 지구상에 뿌리내리게 한 생존 전략으로서 진화의 고갱이입니다. 인간의 삶 그리고 학문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172~174. 부정적으로 사유하는 것 그리고 모든 일을 비관적으로 보는 것은 비슷하기는 하지만 그 태도에 있어서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부정적 사유는 근거를 잘 따져보자는 태도여서 내용적으로 보면 개방적인데 반해, 비관적 시각은 미래의 가능성을 지나치게 한쪽 방향으로만 생각하는 것이어서 사실상 폐쇄적인 태도입니다. 너무나도 빤한 현실을 부정해보는 일이 근거를 따져보는 태도라고 여기는 까닭은, 때로 우리가 당연하게 생각하는 일들이 반드시 ‘어쩔 수 없거나’ ‘필연적인’ 것은 아닐 수 있기 때문입니다. (중략) 인간 사유의 부정성은 비관적으로 생각한다는 뜻이 아니라, 이처럼 우리에게 현실 조건으로 주어진 것들의 근거를 다시 묻는 태도를 가리킵니다. 독일의 철학자 에드문트 후설에 따르면 우리는 세계 전체를 존재하지 않는 양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가 ‘판단중지’(epoche)라고 부른 의식의 작용은 세계의 존재 타당성을 잠시 정지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부정성의 능력은 우리 의식을 주어진 현실이라는 족쇄로부터 해방할 수 있습니다. 물론 실제 세계가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특정한 형태로 고정된 현재 대상의 의미로부터 벗어나 새로운 의미를 읽어낼 수 있게 해주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부정성의 능력은 가능성의 세계를 열어젖히는 우리 의식의 힘입니다.

181. 공간이 휘었다는 생각을 가능하도록 이끈 비유클리드 기하학은 18세기 이탈리아의 학자 사케리가 삼각형의 합은 180도라는 생각을 부정해본 데에서 시작합니다. 흔히 평행선 공리라고 부르는 유클리드 기하학의 다섯 번째 공준이 유독 복잡해 보였던 탓에 그것을 증명하고자 사케리는 평행선 공리와 모순되는 가정들을 세우고 모순을 이끌어냄으로써 평행선 공리의 타당성을 입증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그는 모순을 찾아낼 수 없었습니다. 결국 사케리는 그 작업을 포기하고 말았지만, 그 이후 수학자들이 2,000년 동안 진리의 가장 전형적 체계라고 믿어왔던 유클리드 기하학과는 다른 새로운 기하학(비유클리드 기하학)을 찾아내기에 이릅니다. 그리고 아인슈타인은 비유클리드 기하학을 활용하여 자신의 상대성 이론을 전개할 수 있었고 공간이 휠 수 있다는 생각도 가능해졌던 것입니다.

183. 속박이나 구속으로부터 벗어나는 일은 부정성에서 시작합니다. 플라톤이나 뉴턴 그리고 프로이트 역시 자신의 눈앞에 펼쳐진 현실의 이면을 보기 위해서 현실이라는 속박으로부터 벗어나는 데서 출발했습니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보기 위해 현실을 부정해보는 일, 당연해 보이는 대상의 타당성을 의심해보는 일은 일종의 입문 의식과도 같습니다. 플라톤은 이를 카타르시스에 비교한 적이 있습니다. 새로운 눈을 갖기 위해 정화하는 통과의례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222~224. 창의적 문제 해결력이라고 하면 사람들은 보통 ‘좋은’ 아이디어를 내놓을 수 있는 역량을 가장 먼저 떠올립니다. 그래서 사회 곳곳에서 아이디어맨에 대한 요구가 높습니다. 아이디어가 많다 함은 남들이 생각해보지 않은 것, 혹은 남들이 보지 못한 것을 보는 특별한 능력이 있음을 뜻합니다. 따라서 그 사람은 현실의 조건들에 매이지 않고 문제를 바라보는 시선을 다양하게 옮길 역량이 있는 사람입니다. 하지만 아이디어만으로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습니다. 흔히 창의적 문제 해결력이라 하면 주로 이렇게 아이디어가 많은 사람을 떠올리지만, 우리 목표는 그저 창의성 고양이 아니라 우리에게 주어진 과제를 해결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다른 조건들도 고려해야만 합니다. 주어진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좋은 아이디어가 떠올랐다면, 이제 현실적 조건을 고려해서 그것을 관철할 수 있는 실행력이 필요합니다. 여기에는 구현하는 사유, 다시 말해 공학적 합리성이 필요합니다. 최종 목표에 도달할 때까지 체계적으로 과제를 나누고, 그 과제를 달성하기 위한 세부 과정을 정리하고, 각 단계마다의 시간 및 비용 등을 전체적으로 관장해서 단계별로 추진해나갈 수 있는 역량이 필요합니다. 또 다른 역량은 오늘날 우리가 처한 사회의 복잡성과 관련이 있습니다. 다양한 이해관계를 지닌 주체들이 서로 합의하고 협력해야 하는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타인의 협력을 이끌어낼 수 있는 감성적 역량이 그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어떤 사람은 유독 다른 이들 도움을 받지 못합니다. 심지어 가급적 그 사람과 같이 일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게끔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반면 어떤 사람은 능력은 뛰어나 보이지 않아도 그와 함께 일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불러일으킵니다. 그렇다면 문제 해결력이 높은 사람에 대해 정리해볼까요? 가장 이상적인 경우는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아이디어가 많으면서도 그 아이디어를 구체화하고 현실에서 작동하도록 체계적으로 실행할 역량도 있고, 더불어 다른 사람들 협력을 잘 이끌어낼 수 있는 사람입니다.

225~226. 공동체 차원에서 바라보면 모두가 다 문제 해결력을 가진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아이디어를 내는 일이나 일을 추진해가는 일 혹은 사람들 마음을 어루만지는 일 등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기도 합니다. 그중에 특정 영역에서 상대적으로 다른 사람보다 뛰어난 사람이 있을 뿐입니다. 그렇게 각각의 영역에서 탁월함을 발휘할 수 있도록 조직이 운영되고 그러한 서로 다른 역량들이 제대로 평가받을 수만 있다면, 그 공동체는 더 나은 공동체로 진화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 사회는 다소 단선적이고 획일적인 시선으로 사람을 평가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특히 그 평가 기준은 대체로 정량적이고 결과 중심적입니다. 그래서 정량적으로 평가하기 어렵고 구체적 결과로 산출되지 않는 역량은 평가를 제대로 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런 문화가 확산되면 각각 자신이 잘할 수 있는 방기한 채, 자신이 잘하지 못하는 일을 해내기 위해 경쟁을 하게 됩니다. 이런 경쟁이야말로 소모적이며, 경우에 따라서는 공동체 자체를 위협할 수도 있는 결과를 낳기도 합니다. 본래 창의성 교육의 목표 중 하나는 각 개인으로 하여금 자신이 잘할 수 있는 것을 찾아내고, 그리하여 개인의 자존감을 높이는 것입니다. 이러한 교육의 성패는 결국 우리 사회가 얼마나 다양한 평가 기준을 갖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우리 사회가 얼마나 개방적인지를 가늠하는 지표가 될 것입니다.

227~228. 우리가 부딪친 문제를 해결해나갈 때 테일러가 빠진 역설 혹은 《멋진 신세계》의 지도자인 무스타파 몬드가 빠진 역설적 상황에 스스로 다시 빠지진 말아야겠습니다. 테일러가 꿈꾸었던 것은 공정을 합리화해서 생산성을 극대화하고 그 풍요로운 과실을 경영자나 노동자 모두가 함께 누리는 사회였습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그러한 합리적 공정은 인간을 소외시킴으로써 그 합리화 과정이 본래 누구를 위한 것이었는지를 잊고 말았습니다. 헉슬리가 그려낸 멋진 신세계 속의 사람들은 자신이 무슨 일을 하든 행복하다고 믿고 있지만, 그 소설을 보는 우리는 결코 그런 세계에서 살고 싶지는 않습니다. 일종의 조작된 삶으로 채워진, 비인간적 세계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온갖 근심 걱정을 털어버리고 행복감을 느끼도록 해주는 약을 언제든 먹을 수 있지만 그런 삶은 왠지 인간답다고 생각되지 않습니다. 문제를 해결해나가는 일은 결코 가치의 문제와 동떨어져 있지 않습니다. 문제 해결이라는 것은 그 문제를 넘어선 어떤 목적을 향한 과정이지 문제를 없애는 것이 목적은 아닙니다. 이것이 바로 기계적 사유와 인간적 사유의 중요한 차이이기도 합니다.

231. [매클루언은] 《구텐베르크 은하계》에서 문화인류학자들의 연구를 원용하여, 인쇄 매체를 사용하는 사람이 세상을 경험하는 방식과 구술 문화 속에 사는 사람이 세상을 경험하는 방식의 차이를 설명한 적이 있습니다. 예컨대 책을 읽을 줄 아는 사람이 영화와 같은 영상물을 지각하고 이해하는 방식과 책을 읽어본 적 없는 사람이 영상물을 지각하고 이해하는 방식은 완전히 다르다는 것입니다. 책을 읽을 줄 아는 사람은 장면과 장면 사이의 이야기를 끊임없이 연결해서 줄거리를 만들고 그렇게 전체 의미를 파악하려고 하지만, 책을 읽어본 경험이 없는 사람은 줄거리가 아니라 매 순간 그들의 관심을 끄는 대상만을 지각하고 기억한다는 것입니다. (중략) 실제로 여기저기서 디지털 미디어의 사용과 관련해서 우리 삶의 태도가 변화하고, 나아가 생각의 방식도 변화한다는 말들을 들을 수 있습니다. 트위터나 문자메시지처럼 단문에 익숙한 세대는 긴 호흡을 요구하는 책을 읽기 어려워한다는 이야기가 그렇고, 인터넷의 하이퍼텍스트 읽기에 익숙한 세대는 그 이전 세대에 비해 순발력이 높고 자유로운 연상에는 강하지만 오랜 시간 집중하기는 힘들어한다는 이야기도 그렇습니다. 매클루언이 미디어는 그저 어떤 메시지를 전달하기만 하는 도구가 아니라 미디어 자체가 메시지라고 말한 이유를 짐작할 만합니다. 미디어는 텍스트를 만들어내는 도구입니다. 문자라는 미디어는 문자화된 텍스트를 만들어내며, 디지털 미디어들은 다양하고 화려한 기술적 구현을 통해 여러 감각을 동시에 활용해서 읽어야 하는 텍스트를 만들어냅니다. 동일한 정보일지라도 글로 읽을 때와 이미지로 보고 소리로 들을 때 수용자가 겪는 경험은 상이합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메시지 자체가 달라지지는 않겠지요. 다만 메시지를 재현해내는 방식의 차이로 인해 메시지를 담고 있는 텍스트의 수용 효과에 차이가 생기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텍스트를 만들어내는 미디어와 텍스트가 전하는 정보는 상호 간에 영향을 미친다고 볼 수 있습니다.

247. 현실을 넘어서기 위해서는 현실의 우리를 붙잡고 있는 조건에 대한 의심이 필요합니다. 기계는 현실적 조건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현실적 조건들을 가능한 한 정확하게 대입하려고 합니다. 이 실증성의 사유는 앞서 살펴보았듯 공학적 합리성이 작동하는 부분입니다. 앞으로 우리 삶에서 만나게 될 범용 인공지능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확실히 우리는 합리성을 외주화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외주화한 합리성은 공학적 합리성입니다. 사유 방식으로 말하자면 현실적 조건을 고려해서 주어진 목표를 구현하려는 사유 방식입니다.

_ 박승억, <렌즈와 컴퍼스>, 로고폴리스, 2016.

: 5:11 pm: bluemosesErudition

“무바늘 주사기는 고밀도 에너지를 가해 물을 급격히 팽창시켜 그 힘으로 약물을 쏘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머리카락 한 가닥 두께 정도의 미세한 구멍을 통해 약물이 초당 150m의 빠른 속도로 피부에 주입되기 때문에 통증이 없다.”

: 12:36 pm: bluemosesErudition

54. “암을 규명하려는 노력이 그렇게 오랜 세월에 걸쳐 방대하게 축적되어 왔는데도, 왜 암을 극복하는 길은 전혀 보이지 않는 겁니까?” 와인버거 박사는 거대한 경로 지도를 보여주면서 명쾌하게 설명했습니다. 암이 생겨나는 세포의 세계는 상상 이상으로 복잡해서 무수한 생명분자가 서로 뒤얽힌 상태에서 신호를 주고받습니다. 그것은 차라리 하나의 우주라고 해도 좋을 만큼 복잡한 세계라서, 그 전모는 아직도 밝혀내지 못하고(그래서 암 세계를 여전히 잘 모르는 것이다) 있습니다. 그리고 복잡기괴한 경로 지도가 해명되면서 비로소 암유전자의 어떤 기능이 세포 증식을 멈추지 않게 하는지도 해명됐습니다. 항암제의 기능과 나아가 항암제는 왜 금방 약효가 떨어지는지(우회로가 생기고 만다)도 알게 됐습니다. 그리고 곧 새로운 유형의 항암제(분자표적약)는 어떻게 설계해야 하는지도 알게 될 거라고 했습니다.

150~153. NHK스페셜에서 와인버거 박사의 패스웨이 지도를 입체적인 CG로 표현하여 다양한 생체신호분자가 서로 교차하며 오가는 모습을 보여주어 암세포가 살아가는 세계가 거의 하나의 우주와 같은 복잡한 세계라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그 대목은 프로그램에서 가장 힘주어 표현한 장면이었고, 가장 전하고 싶었던 내용입니다. 암이 살아가는 세계를 그런 이미지로 포착할 수 있는가의 여부가 암 세계를 본질적으로 이해할 수 있느냐의 여부를 결정짓습니다. … 방송에서도 분자표적약에 대한 설명으로 “분자표적약은 패스웨이의 입구나 마디를 막습니다. 그래서 패스웨이의 스위치를 누루는 물질이 결합하는 것을 막는 겁니다”라는 내레이션이 나옵니다. 이에 대해 조금 더 자세히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방송에서는 생체 속을 오가는 신호를 패스웨이 지도에 마치 신경계를 달리는 전기 신호처럼 표현했지만, 현실은 전혀 다릅니다. 실제 과정은 세포들이 전부 잠겨 있는 세포간액이라는 풀Pool 속에서 일어납니다. 거기에는 무수한 생체 신호 물질이 분자 형태로 떠 있습니다. 그것은 작은 단백질 조각인데, 일반적으로 ‘인자’라 불리는 분자량이 작은 조각입니다. 세포 표면에는 수용체(리셉터Receptor)라 불리는 단백질 조각이 세포막에 절반쯤 묻힌 형태로 머리를 내밀고 있습니다. 세포간액 속에 있는 신호 분자는 굉장한 기세로 끊임없이 열운동을 하므로 세포막에 수없이 부딪힙니다. 신호 분자와 수용체는 열쇠와 열쇠 구멍의 관계여서, 구멍에 꼭 맞는 상대가 오면 즉시 찰칵, 하고 결합합니다. 열쇠가 열쇠 구멍에 결합되면 즉시 생체 신호가 세포 속으로 흘러가 일련의 연쇄 반응이 일어납니다. 생체 속에서 일어나는 생화학 현상의 기본은 ‘인자와 그 수용체’가 열쇠와 열쇠 구멍처럼 결합함으로써, 일련의 생화화적 연쇄반응에 스위치를 켜는 현상에 있습니다. 패스웨이 지도에 나오는 패스웨이 한 가닥 한 가닥에 열쇠와 열쇠 구멍이라는 스위치가 여러 개 자리 잡고 있습니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그 열쇠와 열쇠 구멍들이 전부 정밀한 1대1 대응의 관계에 있느냐는 것입니다. 만약 그렇다면 부작용 문제는 일어나지 않지만, 열쇠 하나에 두 개 이상의 열쇠 구멍이 열린다면(혹은 둘 이상의 열쇠로 열리는 열쇠 구멍이라면), 부작용도 발생할 수 있겠지요. 실제로 그렇습니다. 복수의 열쇠 구멍에 맞는 열쇠도 있고 여러 열쇠에 열리는 열쇠 구멍도 있으므로, 분자표적약 분야에서 생각지 못한 부작용이 일어납니다. 이를 다양한 과정을 통해 이제야 알게 되었습니다. 그것도 손발이 저리다거나 발진이 나타나거나 하는 정도의 부작용이라면 그나마 좋겠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부작용으로 사망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_ 다치바나 다카시, <암, 생과 사의 수수께끼에 도전하다>, 청어람미디어, 20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