윌리엄 포크너는 <맥베스> 5막 5장에서 소설의 제목을 차용했다. “인생은 걸어 다니는 그림자일 뿐, 불쌍한 연기자가 무대 위를 잰 체 활보하며 자신의 시간을 안달복달하는 것일 뿐. 그러고는 더 이상 듣는 이 없는 것일 뿐. 그것은 백치가 들려주는 이야기. 소리와 분노로 가득 찼으나, 아무 의미도 없는.”
윌리엄 포크너는 <맥베스> 5막 5장에서 소설의 제목을 차용했다. “인생은 걸어 다니는 그림자일 뿐, 불쌍한 연기자가 무대 위를 잰 체 활보하며 자신의 시간을 안달복달하는 것일 뿐. 그러고는 더 이상 듣는 이 없는 것일 뿐. 그것은 백치가 들려주는 이야기. 소리와 분노로 가득 찼으나, 아무 의미도 없는.”
246. 셰익스피어 시대의 극장들은 관람석과 무대가 구별되어 있기는 했지만 얼마든지 소통이 가능한 공간이었습니다.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보는 관객들 상당수는 서기, 장인, 도제, 여자 등 교육받지 못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당시 숙련 노동자 일주일 임금이 6실링(30페니) 정도였고 입석 입장료는 1페니로 추정됩니다. 셰익스피어의 관객들은 듣기에 아주 익숙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텔레비전 같은 영상 매체를 보면서도 자막을 봅니다. 그만큼 읽기에 익숙해져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셰익스피어 시대에는 읽을 만한 것들이 널리 보급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오늘날의 우리는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듣기에 능했다는 것을 고려해야 합니다. 셰익스피어 작품에 쓰인 영어는, 셰익스피어 당시의 수많은 관객들이 도대체 이 정도의 영어를 알아들었을까라고 의심스러울 정도로 수준이 높다는 느낌이 있습니다. 그런데 관객들은 그것을 알아들었습니다. 그의 영어는 관객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것이었음에 주의해야 합니다. 셰익스피어는 희곡 작가이면서 극장주였기 때문에 당연히 관객들이 잘 들을 만한 이야기와 대사를 썼습니다. 이것도 아주 중요한 고려사항입니다. 셰익스피어의 드라마는 이를테면 ‘대중 드라마’였다는 사실입니다.
248. 셰익스피어의 드라마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이 살고 있는 세계에는 안정된 규범이 없습니다. 그들은 신이 정해 놓은 운명에 따라 살고 있는 이들이 아닙니다. 그들은 단단한 근거가 없는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까닭에 등장인물들이 의존하고 있는 인생관은 서로 다릅니다. 희랍 비극에서 코로스가 등장하여 관객에게 어떤 것이 옳은 것인지 일어주는 장면들이 있는데, 셰익스피어의 드라마에서는 그것이 불가능한 것입니다. 등장인물들이 발딛고 서 있는 인생관과 세계관이 서로 다르기 때문에 그것들의 충돌이 갈등을 유발하고 서로 쟁투를 벌이다가 한 쪽이 다른 한 쪽을 파멸로 몰아넣습니다. 그리고 관객 또한 안정된 규범을 가지고 있기 않기는 마찬가지이므로 ‘갈등하는 구경꾼’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263. 맥베스 부인과 맥베스의 차이는 이렇습니다. 맥베스 부인은 자신의 행위를 자신의 의식으로 완전히 정당화하였습니다. 맥베스는 자신의 행위를 자신의 의식으로 정당화할 수 없어서, 차라리 의식하지 않기로 하였습니다. 어떤 과정을 거쳤건 이제 두 사람 모두 행위와 의식 사이의 갈등이 없는 상태에 이르렀습니다. 물론 그 방식은 다릅니다. 맥베스 부인은 행위에 의식을 합치시켰고, 맥베스는 의식을 버렸습니다.
269. 맥베스는 불안함을 억누를 수 없습니다. 그런 까닭에 그는 이제 “운명 자매들”을 찾아갑니다. 자신의 무력과 사내다움을 호언장담하였으나 그것만 믿고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맥베스가 마녀들의 말을 믿고 덩컨 왕을 죽였다 해도 그가 자신의 힘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있다면 굳이 또 다시 마녀들을 찾을 까닭은 없을 것입니다. 그는 자신의 미래에 대한 확신을 자신의 힘으로부터 길어 올릴 수 없습니다. 맥베스에게 가장 괴로운 것은 현재에서 미래로 가는 길을 자기가 완전히 장악하고 있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의 마음속에 깊게 자리잡은 불안입니다. 그는 덩컨 왕을 죽인 다음 왕위를 차지하였으나 그 과정에서 그를 지배하고 있는 심성이 바뀌었습니다. 사악함은 겉으로 드러난 모습이지만 그 안에는 걷잡을 수 없는 불안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내가 나의 미래에 확신할 수 없다면 아예 포기하면 됩니다. 확신이 없다면 자신의 힘으로 미래를 당겨오려는 의지라도 있어야만 합니다. 여기서 맥베스에게 중요한 것은 자신의 힘을 기르는 것일텐데 “운명 자매들”을 만나러 간다고 하니 맥베스 부인이 옳은 말을 한 마디 합니다. “당신에게 필요한 것은 온갖 자연의 보존자, 잠이에요.”(3막 4장) 이 말에는 중요한 함의가 있습니다. 맥베스는 마녀들에게 초자연적인 것에 대해 물으려 하는데, 맥베스 부인은 그에게 필요한 것이 ‘자연의 보존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293. 데스데모나는 오셀로의 “심성에서 오셀로라는 형용”을 보았고, “명예”, “자질”에 자신의 영혼을 바쳤습니다. 데스데모나가 보기에 오셀로는 겉과 속이 같은 사람입니다.
305. 데스데모나를 사랑하고 있는 상황을 지켜야 한다는 것, 이것이 오셀로가 가지고 있는 아주 중요한 행동 동기입니다. 이렇게 자기 역할극에 들어가면 빠져나오기가 어렵습니다. 오셀로는 끊임없이 다른 사람의 인정을 필요로 하는 사람입니다. 자기확신에 가득 찬 듯하지만 그 자기확신은 다른 이의 인정을 받지 못하면 허망하게 무너지기 쉽습니다. 그는 자기가 신뢰하는 이아고에게 확신을 얻고자 합니다. 이아고는 입 안의 혀처럼 오셀로가 원하는 말을 해왔기 때문입니다.
_ 강유원, <문학 고전 강의>, 라티오, 2017.
불어. 여러 겹의 파이를 포개어 쌓고, 그 사이에 크림과 과일 등을 넣어 겹겹이 쌓아올린 케이크. 밀푀유는 직역하면 ‘천 개의 잎사귀’라는 뜻이다.
2017 가을호 계간 <문학동네> 김민정 시인의 심사평을 보고, 언젠가 저 도그마도 철회되리라, 신열 앓듯 되뇌었다. 그 이 역시 자장에 종속되어 있으니까.
김영하의 <오직 두 사람>에 실린 작가의 말은 이렇다. “그해 4월엔 우리 모두가 기억하는 참혹한 비극이 있었다. 그 무렵의 나는 ‘뉴욕타임스 국제판’에 매달 우리나라에서 일어나는 일을 칼럼으로 쓰고 있었다. 4월엔 당연히 진도 앞바다에서 벌어진 의문의 참사에 대해 썼다. ‘이 사건 이후의 대한민국은 그 이전과 완전히 다른 나라가 될 것이다’라고 썼는데 팩트와 근거를 목숨처럼 생각하는 편집자가 그 발언의 근거를 물어왔다. ‘근거는 없다. 그냥 작가로서 나의 직감이다. 지금 대한민국의 모든 이가 그렇게 느끼고 있다’라고 답했더니 그런 과감한 예단은 받아들일 수 없다고 했다. 나는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일을 그만두었다. 작가는 팩트를 확인하고 인용할 근거를 찾는 사람이 아니라 다른 이들을 대신하여 ‘잘 느끼는’ 사람이 아니겠는가. 나는 잘난 팩트의 세계를 떠나 근거 없는 예감의 세계로 귀환했다. (…) 깊은 상실감 속에서도 애써 밝은 표정으로 살아가고 있는 이들이 세상에 많을 것이다. 팩트 따윈 모르겠다. 그냥 그들을 느낀다. 그들이 내 안에 있고 나도 그들 안에 있다.”
_ 어쩌면 오늘 이곳의 모국어 문학을 훼파하고 있는, 저들이 비방하는 시대와 근사한, 완연한 새로운 중세의 가을
“There is therefore now no condemnation for those who are in Christ Jesus. For the law of the Spirit of life has set you free in Christ Jesus from the law of sin and death.”(Romans 8:1-2)
21. “슬퍼서 전화했다. 가장 슬픈 일은 장소가 없어지는 일이다. 그러면 어디에 가도 그곳을 찾을 수 없다. 너는 어디가지 말아라. 어디 가지 말고 종로 청진옥으로 와라. 지금 와라.”
22. 서쪽으로 흐르는 한강의 발원지 검룡소와 남쪽으로 흐르는 낙동강의 발원지 황지못이 태백에는 있다.
30. 앓아누워 전기요를 세게 틀고, 지난 인연들을 생각할 겨를도 없이 땀을 흘리며, 밖에서 오는 추위와 안에서 퍼지는 신열 사이에서 어쩔 줄 몰랐어야 했는데.
51. “고독과 외로움은 다른 감정 같아. 외로움은 타인과의 관계에서 생기는 것일 텐데, 예를 들면 타인이 나를 알아주지 않을 때 드는 그 감정이 외로움일 거야. 반면에 고독은 자신과의 관계에서 생겨나는 것 같아. 내가 나 자신을 알아주지 않을 때 우리는 고독해지지. 누구를 만나게 되면 외롭지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고독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야. 고독은 내가 나를 만나야 겨우 사라지는 것이겠지. 그러다다시 금세 고독해지기도 하면서.”
62. 지금도 종종 뵙는, 종로에서 태어나 평생을 그곳에서 살고 계시는 한 선생님에게서는 서울의 노포들과 다양한 독주를 배웠다. 종로는 물론 을지로와 충무로, 성북동까지 내 안의 서울 지도는 다시 그려졌다.
63. “사는 게 낯설지? 또 힘들지? 다행스러운 것이 있다면 나이가 든다는 사실이야. 나이가 든다고 해서 삶이 나를 가만두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스스로를 못살게 굴거나 심하게 다그치는 일은 잘 하지 않게 돼.”
76. 선생님의 빈소에서 나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유족들이나 문상객들의 눈에 고인의 손자뻘로 보일 어린 내가 한자리 차지하고 앉아 밤을 샐 수도 없었고 그렇다고 해서 서운하고 슬픈 마음을 두고 집으로 갈 수도 없었다. 생각 끝에 장례식장 로비에 머무르기로 했다. 다음날 새벽, 발인을 마치고 벽제로 이동할 때까지 나는 산울림의 <안녕>을 들었다. 오래전 사당동 막횟집에서 좋아하는 노래가 무엇이냐는 선생님의 질문에 답을 했던 노래. “안녕 귀여운 내 친구야 멀리 뱃고동이 울리면 네가 울어주렴 아무도 모르게 네가 울어주렴 아무도 모르게 잠든 밤에 혼자서”로 시작되는 노래. “안녕 내 작은 사랑아 멀리 별들이 빛나면 네가 얘기하렴 아무도 모르게 울면서 멀리멀리 갔다고”로 끝나는 노래.
94~95. “사람이 사람을 진실로 사랑한다는 건, 자아自我의 무게에 맞서는 것인 동시에, 외부 사회의 무게에 정면으로 맞서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하는 것은 참 가슴 아픈 일이지만 누구나 그 싸움에서 살아남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상실의 시대>, ‘작가의 말’ 중에서)
106. 여자는 뇌졸중 후유증을 앓고 있는 듯 보였다. 몸의 절반은 봄 같았고 남은 절반은 겨울 같았다.
113. 끼니마다 제주 시내의 삼치횟집, 동문시장의 순댓집, 모슬포의 방어횟집, 성산의 조개죽집과 같은 이미 내가 여러 번 가보았던 제주의 식당들로 친구들을 안내했다.
114~115. 천남성天南星이라는 식물의 열매라고 했다. 강한 염기성과 독성이 있어 조선 시대에는 사약의 주재료로 쓰였다는 말도 덧붙였다. 다행스러운 일은 열매를 삼키지 않고 뱉어냈다는 것이었고 불행스러운 일은 내 입술과 혀가 퉁퉁 붓기 시작했다는 사실이었다. 숲길을 다 내려와 물로 입을 몇 번이고 씻어내고 나서야 통증은 조금 진정되는 듯했다. 그날 저녁, 나는 입속이 다 헐은 채로 낮에 먹은 열매에 대해 더 알아보았다. 친구의 말처럼 내가 먹은 천남성은 부자附子라는 식물과 함께 사약의 주재료로 쓰였다. 드라마에서 흔히 보는 장면과 달리 사약은 마시자마자 피를 토하고 죽음에 이르는 것이 아니다. 마시고 나서 위장에서 사약이 흡수될 때까지 고통스러운 시간이 얼마간 더 따른다. 비운의 삶을 살다 강원도 영월 청령포에서 죽음을 맞이한 단종은 사약을 마신 후 약기운을 빨리 돌게 하기 위해 군불을 땐 따뜻한 방에 들기도 했다. 또 하나 우리가 잘 모르고 있던 사실은 사약賜藥의 말뜻이다. 이때의 ‘사’는 죽을 사死가 아니라 줄 사賜 자를 쓴다. 말 그대로 왕이 하사한 약이라는 것이다. 육신을 훼손하는 능지처참이나 참수형에 비해 조금 관대하다는 의미였을까.
121. 이제 아침저녁으로 바람이 차가워졌으니 그곳 산사에도 고운 빛의 꽃무릇이 잘도 피었을 것이다.
126~127. 내 새로운 취향은 주로 음식에 관한 것이었다. 섬진강에 봄이 오면 하동의 재첩국과 수박 향이 은은히 번지는 구례의 은어를 접했다. 여름 신안의 민어와 흑산도의 홍어, 가을에는 포항의 과메기와 서천의 박대를 즐겼다. 겨울 영월의 곤드레와 수안보의 꿩고기와 서귀포의 방어도 빼놓을 수 없다. 이러한 미각이 생기지 않았더라면 나는 그 많은 여행을 할 동기를 얻지 못했을 것이다. 미각 다음에 생긴 취향은 시각이었다. 봄을 맞은 통영의 동백섬과 여름이 머무는 고성의 화진포, 그리고 가을 제주의 비자림과 용머리해안, 겨울 철원의 고석정을 비롯한 전국의 많은 곳곳을 어떤 계절과 시간에 찾아야 눈앞에 仙境이 펼쳐지는지 나는 여러 번 시행착오를 겪으며 몸소 익혔다. 미각과 시각 다음에 생긴 여행의 취향이 있다면 그것은 사람에 관한 것이다. 거칠게 요약을 하자면 좋은 술안주가 많은 동해는 친구들과 가기 좋은 곳이고 내가 살고 있는 일산 집과 비교적 가까운 서해는 부모님과 그리고 바람과 볕이 좋은 남해와 제주는 사랑하는 사람과 가기 좋은 곳이다. 나는 특히 남해 중에서도 통영을 사랑했다.
133. 소금기 진한 바람은 식당의 빛바랜 간판을 바꾸기도 합니다. 오래전 ‘이모네 식당’은 ‘모네 식당’이 되었습니다. 곰치국의 간이 조금 진해졌지만 여전히 수련睡蓮 같은 고명들이 가득 들어간 일이나 한해살이풀이 죽은 자리에 같은 한해살이풀이 자라는 일, 어제 자리한 곳에 오늘의 빛이 찾아 비치는 것을 생각하면 이것은 그리 큰일도 아니었습니다.
141. 고등학교 3학년, 수학능력시험을 하루 앞둔 날 아버지는 평소 잘 들어오지 않는 내 방에 들어왔다. 그러고는 나에게 시험을 치르지 말라고 했다. 내일 시험을 보면 대학에 갈 것이고 대학을 졸업하면 취직을 할 것이고 그러다보면 결혼을 하고 아이도 낳을 공산이 큰데 얼핏 생각하면 그렇게 사는 것이 정상인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너무 불행하고 고된 일이라고 했다. 더욱이 가족이 생기면 그 불행이 개인을 넘어 사랑하는 사람에게까지 번져나가므로 여기에서 그 불행의 끈을 자르자고 했다. 절을 알아봐줄 테니 출가를 하는 것도 생각해보라고도 덧붙였다. 당시 나는 그길로 신경질을 내며 아버지에게 나가라고 말했다. 하지만 노동과 삶에 지친 날이면 그리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의 눈빛에서 설핏 가난을 느낄 때면 나는 그때 아버지의 말을 생각한다.
144. 사실이 아닌 내용을 사실처럼 적어 죄송합니다. 하지만 곳곳에 흩어져 있는 여러 사실들을 모아 희미하게나마 진실의 외연을 그려보고 싶었습니다. 몇 번이고 몇 번이고 죄송한 마음을 드립니다.
147~148. 그동안 살면서 나이를 묻는 질문을 숱하게 들어왔다. 그런 질문을 하는 사람은 주로 나보다 더 연장자인 경우가 많았다. 그들의 대부분은 나에게 나이를 물은 뒤 부러움과 핀잔이 반반쯤 섞인 말들을 건넸다. “내가 그 나이 때는 말이야”로 시작해서 “한창 좋을 때다”나 “조금 지나봐야 알지” 같은 말들을 거쳐 “그 나이로 돌아갈 수 있다면 소원이 없겠다”로 끝을 맺곤 하는 말들. 나에게 하는 말인지 아니면 자신에게 하는 말인지 잘 구분이 되지 않던, 이해는 가지만 딱히 이해하고 싶지는 않았던 말들. 어느 모임의 저녁 자리에서 연세가 지긋한 한 분을 만났을 때의 일이다. 시작은 역시 같은 질문이었다. 하지만 돌아오는 그분의 말을 달랐다. “제가 잘은 모르지만 한창 힘들 때겠어요. 적어도 저는 그랬거든요. 사랑이든 진로든 경제적 문제든 어느 한 가지쯤은 마음처럼 되지 않았지요. 아니면 모든 것이 마음처럼 되지 않거나. 그런데 나이를 한참 먹다가 생각한 것인데 원래 삶은 마음처럼 되는 것이 아니겠더라고요. 다만 점점 내 마음에 들어가는 것이겠지요. 나이 먹는 일 생각보다 괜찮아요. 준이씨도 걱정하지 말고 어서 나이 드세요.” 충격이었다. 자신의 과거를 후회로 채워둔 사람과 무엇을 이루었든 이루지 못했든 간에 어느 한 시절 후회 없이 살아냈던 사람의 말은 이렇게 달랐다.
157. 아버지의 세발자전거를 잠깐 이야기했었는데요. 그때가 1953년이나 1954년 즈음입니다. 당시 며칠씩 생으로 굶던 처지의 어린 아버지가 갖기에는 값비싼 물건입니다. 그 자전거는 사실 병으로 일찍 세상을 떠난 엄마를 대신한 물건이었습니다. 며칠씩 울기만 하는 아들이 불쌍했는지 할아버지가 선물해준 것이지요. 분명 자전거도 좋았겠지만 ‘엄마’라는 것이 무엇으로 대신 할 수 있는 것인가요. 우리는 모두 고아가 되고 있거나 이미 고아입니다. 운다고 달라지는 일은 아무것도 없겠지만 그래도 같이 울면 덜 창피하고 조금 힘도 되고 그러겠습니다.
176. 그분들의 이야기를 주워듣는 것이 가져간 책의 내용보다 귀할 때가 많았다. 탄광의 매몰 사고는 큰 인명 피해가 따르는데 희생된 분들의 사인死因은 아사나 질식사가 아니라 터져나온 수맥으로 익사를 하는 경우가 많다는 아득하고 저린 이야기도 그때 들은 것이다. 그분들의 대화에는 늘 기침이 섞여 있었는데 인간의 몸에서 나는 소리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만큼 거칠었다. 저녁이 되면 나는 가져간 책을 몇 장 읽지도 못하고 순대를 사서 여관으로 돌아왔다. 조금 이상한 결론이지만 허파를 먹지 않게 된 것도 그때부터이다.
177. 삶은 그 어느 때보다 진실했고 간결했지만 점점 억울한 마음이 짙어졌다. 내 삶이 점점 시와 문학에서 멀어져가고 있다는 생각 탓이었다. 맹목에 가까울 정도로 썼던 습작시들은 하나도 아깝지 않았지만 이십대 초중반, 스스로를 몰아붙이며 애를 쓴 시간들이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고 있다는 생각이 나를 괴롭혔다. 나는 곧 그곳의 일을 그만두고 문학과 관련된 직장을 얻고자 했다.
179. 역사 교과서에서 짧게 접했던 현대사를 조금 깊이 알게 된 것도 그 시기였다. 그 도서관이 세워진 자리가 바로 사사오입의 주역 이기붕씩의 자택이었던 만큼 4.19혁명과 그 전후사에 대한 내용을 다룬 책이 유독 많았다. 자신의 아들을 서울대학교 법학과에 부정편입학시키려다 거센 반발로 실패했고 이후 육군사관학교로 보냈다는 이야기. 당시 이화여대 부총장이자 이기붕씨의 아내였던 박마리아씨가 마산시민항쟁 직후 “신의 섭리에 순종할 줄 알고, 신을 두려워할 줄 아는 국민이라야 위대한 국가를 건설할 수 있다는 것은 역사가 웅변적으로 증명하고 있다. 어떻게 하면 신을 두려워하는 국민을 기르느냐 하는 대답은 종교 교육을 잘하여야 된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는 문제적이고 문장의 호응조자 잘 되지 않는 글을 <이대학보>에 남겼다는 사실도 나는 그 시기에 알았다.
181. 시를 짓는 일이 유서를 쓰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많다. 아마 이것은 이미 사라졌거나 사라지고 있는 것들이 이 세상에 너무 많기 때문일 것이고 이 숱한 사라짐의 기록이 내가 쓰는 작품 속으로 곧잘 들어오기 때문일 것이다. 사라지는 것들의 유언을 받아 적는다는 점에서 나의 시는 창작보다는 취재나 대필에 가깝다.
_ 박준, <운다고 달라지는 일은 아무것도 없겠지만>, 난다, 20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