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보이는 것을 넘어 보이지 않는 것을 발견하는 힘 그리고 그렇게 새로이 발견한 것을 현실에 구현해내는 힘, 이 두 힘은 인간의 지적 문명을 구동하는 힘인 동시에 인간의 생각이 지닌 고유한 본질입니다. 철학자 플라톤이 위대한 까닭은 그가 감각의 눈으로는 보이지 않는 관념의 세계를 볼 수 있게 해주었기 때문이고, 프로이트가 놀라운 이유는 의식하지 못하던 영역을 인식하게 해주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아직 보지 못하는 영역들, 예를 들면 10의 -35승 미터의 세계나 10의 27승 미터의 세계까지 탐색하고 들여다보고자 애쓰는 이론과학자나 그렇게 본 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고자 시도하는 실험과학자도 그런 점에서는 마찬가지입니다.
25~26. 아르헨티나의 소설가 보르헤스는 타고난 이야기꾼입니다. 현실과 상상이 뒤섞인 그의 이야기들은 재미뿐 아니라 많은 생각거리를 던져줍니다. 그 가운데 지도를 만드는 사람들의 욕망에 관한 우화가 있습니다. (우리말 번역본으로는 《칼잡이들의 이야기》라는 책 <과학에 대한 열정> 편에 나옵니다.) 먼 예날 어느 제국에서 지도를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지도 제작자들은 갈수록 더 정밀한 지도를 만들길 원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지도는 점점 더 커졌고, 어느새 재국을 뒤덮어버릴 정도로 커다란 지도를 만들기에 이릅니다. 물론 이 거창한 지도 이야기의 마지막은 우리 짐작을 벗어나지 않습니다. 지도가 너무 커서 쓸모가 없어져서 결국에는 쓰레기가 되고 말았다는 겁니다. 프랑스의 우울한 회의주의자이자 현대 문명 비판자였던 보드리야르는 자신의 이야기를 펼치기 위해 《시뮬라시옹》에서 보르헤스의 이 우아한 비유를 가져다 씁니다. 보드리야르의 주제는 시뮬라크르(simulacre)로 가득 찬 세상을 고발하는 것이었습니다. 시뮬라크르는 어떤 사물이나 사태를 가리키는, 일종의 기호적 상징을 말합니다. 예컨대 젊은 연인의 손에 들린 장미는 사랑의 시뮬라크르일 겁니다. 또 텔레비전 뉴스 화면에 등장하는 영상들은 우리가 사는 현실이 얼마나 흥미진진한지를 보여주는 시뮬라크르입니다. 우리가 신용카드라는 시뮬라크르를 사용해서 소비하는 수많은 상품도 시뮬라크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고급 자동차를 사면 성공한 사람이 된 듯하며, 바이크를 타면서 자유를 느끼고, 유기농 식품을 구매할 때는 건강을 얻은 양 여기는 것도 시뮬라크르 효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시뮬라크르는 원본을 대신해서 사용하는 기호적 상징이므로 그 시뮬라크르가 가리키는 뭔가가 실제 있다고 믿는 일은 자연스러워 보입니다.
40~41. 플라콘의 대화편 《메논》에는 이와 관련한 흥미로운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소크라테스가 노예 소년과 대화를 합니다. 대화의 주제는 정사각형이 하나 있다고 할 때, 그 면적의 두 배가 되는 정사각형을 만들어보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그 소년은 기하학에 관해서는 아무것도 배우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하지만 소크라테스는 역사상 가장 훌륭한 선생님 중 한 명이 아닙니까. 대화를 통해 지성을 일깨우는 데 그만한 사람은 없었습니다. 소년은 소크라테스와 나눈 대화만으로 주어진 정사각형에 비해 정확히 두 배가 큰 정사각형을 이해했습니다. 대각선을 이용한 것이었죠. (중략)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소크라테스가 그저 말로만 설명하지는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이해를 도울 그림이 없었다면 아마도 소년은 이 문제를 훨씬 어렵게 느꼈을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경험적으로 아는 시뮬라크르의 기능이자 힘입니다. (이제부터는 시뮬라크르를 모형이라고 부르겠습니다. 자신이 본 바를 현실에 구현하기 위해 일단 만들어보는 것 말입니다.)
42~43. 플라톤의 생각은 무척이나 직선적입니다. 그는 참된 존재는 결코 소멸하지 않는다고 생각했습니다. 소멸한다는 것은 곧 불완전하다는 뜻이며, 그런 의미에서도 모형은 참되지 못합니다. 그래서 오직 지성의 눈에만 보이는 형상(eidos) 혹은 이데아(idea)만이 참된 존재라고 여겼습니다. 현실에서 셀 수 없이 많은 책상이 만들어지고 또 사라지지만 책상의 이데아는 여전히 존재합니다. 아니 영원하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쓰는 눈앞의 책상은 챡상이라는 이데아의 한 모형일 뿐입니다. 플라톤이 이데아 이론을 통해 의도했던 바는 책상이 어떻게 생겨나는지를 아는 일만은 아니었습니다. 그의 진짜 관심은 그저 사물의 이데아만이 아니라 인간의 인간다움, 나아가 한 공동체의 이데아가 무엇인지를 아는 일이었습니다. 플라톤은 지성의 눈으로 책상의 이데아가 보이듯이 참된 인간 혹은 참된 삶, 나아가 참된 공동체의 이데아도 지성의 눈으로 볼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 이데아를 알 수 있다면 무엇이 훌륭한 인간이고 어떻게 살아야 훌륭한 삶이며 어떤 공동체가 훌륭한 공동체인지도 알 수 있겠죠. 실제로 인간의 좋은 삶과 훌륭한 공동체의 본성을 보는(아는) 문제는 플라톤에게 가장 중요한 질문이었습니다.
46~47. 플라톤 역시 이데아를 본 자가 현실에서 그 이데아를 구현하려면 일종의 모순적 상황에 직면할 수 있음을 예감한 모양입니다. 때문에 그는 적도(適度, to metrion), 다시 말해 적절한 정도를 측정하는 기술을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이데아가 현실에 구현되는 과정은 그 조건에 따라서 달라질 것이며, 그런 한에서 지혜로운 자는 주어진 현실을 고려하여 적절성의 정도를 찾아내야만 할 것입니다. (중략) 모형을 만들어보는 일은 불완전한 것들로 이루어진 현실에서 완전한 것이 어떻게 구현될 수 있는지를 시험해보는 과정입니다. 그리고 직접 해보기 전에는 보이지 않던 것을 보이도록 하는 과정입니다. 우리가 무엇인가를 제작할 때 여러 모형을 만드는 이유는, 가장 적합한 상태를 결정하기 위함입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가 이렇게 저렇게 모형을 만들어보는 일, 즉 플라톤이 말한 적도를 가늠하는 과정은 모두 맥락 의존적 혹은 상황 의존적입니다.
62~63.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가 형이상학적 원리에 관심을 두었던 이유는 그것이 ‘왜?’라는 물음에 대답해주는 설명적 기능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반면 갈릴레이는 그런 물음에 관심을 두지 않았습니다. 사물이 왜 지상으로 낙하하는지에 대한 이유는 묻지 않고, 오직 어떻게 낙하하는지에 대해서만 관심을 가졌습니다. 예를 들면 자유낙하운동에서 물체의 낙하 거리는 시간의 제곱에 비례한다는 식입니다. (중략) 형이상학적 물음과 해답은 사실상 객관적 검증이 불가능하므로, 서로가 진리라고 주장하는 논쟁이 끊임없이 되풀이될 수밖에 없습니다. 실제로 갈릴레이 이전 중세 철학자들 사이에서 벌어진 수백 년 간의 논쟁들은 갈릴레이가 형이상학적 물음이 무익하다고 생각하게 만든 이유이기도 했습니다. 궁극적 원인을 묻기보다는 현상이 실제로 어떻게 변하는지를 묻는 것, 이러한 물음 방식의 변화는 단순히 질문 종류의 전환을 넘어 세계를 이해하는 패러다임이 달라지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64. 갈릴레이는 변화와 운동의 궁극적 원인이 무엇인지에는 관심을 두지 않았습니다. 그런 탐구는 오히려 무익하다고까지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런 변화의 역학적 성질을 어떻게 다룰 수 있는지에만 관심을 가졌고, 결국 그런 변화들을 측정 가능하며 객관적인 수학적 언어로 표현할 수 있음을 보여준 것입니다.
71~72. 확실히 우리에게는 에피메테우스와 판도라의 유전자가 흐르고 있는 모양입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우리에게 프로메테우스의 유전자 역시 섞여 있다는 점입니다. 새로운 인류의 어머니 퓌라가 에페메테우스와 판도라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그 남편 데우칼리온은 바로 프로메테우스의 아들이었으니까요. 그들이 대홍수의 재앙에서 벗어나 인류의 새로운 조상이 될 수 있었던 까닭은 경건한 삶을 살았기 때문입니다.
74. 실험실에서의 반복적 심문으로 인해 자연은 인간에게 비밀을 고스란히 자백했지만, 사실 그것은 자연의 모습 중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습니다.
86. 흔히 인문학이라는 이름으로 번역되는 독일어의 ‘정신과학’(Geisteswissenschaft)은 영국의 존 스튜어트 밀이 사용한 ‘도덕 과학’(moral science)이라는 개념을 번역한 말입니다. 두 단어에서 핵심은 바로 ‘가치’입니다.
92. 차이를 인정하자는 건전한 슬로건은 속내를 드러내는 일을 일종의 터부로 생각하는, 그럴듯한 수사이기 쉽습니다. 동일성을 전제하지 않는, 순수한 차이는 그저 대립일 뿐입니다.
92~93. 플라톤이 감각 너머 영원히 변치 않는 이데아의 세계를 보려고 한 것이나, 갈릴레이와 뉴턴이 우리 감각을 배제하고 수학적으로 묘사될 수 있는 세계를 보려고 한 것 모두 하나의 원리를 따른 결과입니다. 주어진 것을 넘어서 더 나아가려는 호기심, 그것은 학문의 본성이기도 합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학문의 뿌리를 이 세계에 대한 ‘놀라운 호기심’(thaumazein)으로 설명한 것도 같은 이치입니다.
93. 우리가 구분해야 하는 것은 인문학과 자연과학이 아닙니다. 보이는 것을 넘어 그 이상의 것을 보려고 하는 의지가 있다는 점에서 인문학과 자연과학은 오히려 동류입니다. 오히려 인문학과 자연과학을 한 편에, 다른 편에 기술과 예술을 두고 그 차이에 주목해봄 직합니다. 인문학과 자연과학이 모두 보이지 않는 것을 보려는 탐구 작업이라면, 기술이나 예술은 그렇게 본 것을 현실에 구현해내는 작업이기 때문입니다.
97. 프랑스의 실존주의 철학자 사르트르는 《존재와 무》에서 타인을 영원한 지옥이라고 표현한 바 있습니다. 타인은 나와 똑같이 자유의지를 가진 존재입니다. 그래서 그 속내를 도무지 알 수가 없습니다.
101. 행동에 우연은 없습니다. 우연이라는 말을 ‘원인 없이 일어나는 일’로 이해한다면 말입니다. 그렇다면 우연이라고 일컬을 수 있는 경우는 우리가 의도한 바와는 어긋나게 일어난 행위일 것입니다. 따라서 개회를 선언해야 할 의장이 폐회를 선언한 것을 두고 우연이라고 하는 이유는, 자신의 의도와 어긋나게 폐회라는 말이 튀어나왔다는 뜻이겠지요. 다시 말해 폐회라고 말할 이유가 없는데 그 말이 나왔으니 (특정한 원인이 없다는 뜻에서) 우연이라고 말할 수 있다는 겁니다. 하지만 이에 대해 프로이트는 《정신분석 강의》에서 이렇게 설명합니다. “그런 방식으로 어떤 사람이 자연의 어느 한 부분에서만이라도 인과율을 무의미하게 만들어버릴 수 있다면, 그는 모든 과학적 세계관을 팽개쳐버린 것과 다름없을 것입니다.”
116~117. 인간 정신을 둘러싼 자욱한 안개가 이런저런 시도를 통해 서서히 걷히는 현실이 고무적이기는 하지만, 그 설명 과정에서 중요한 뭔가를 놓치고 있다는 느낌이 들기 때문입니다. 바로 자유의 문제입니다. 인간의 의식과 행동은 결국 뇌의 작용으로 설명할 수 있다는 뇌과학자의 설명 그리고 우리 의식적 행위 대부분이 무의식의 영향을 받는다는 정신분석학적 설명, 둘 모두 인간의 자유가 무엇인지를 만족스럽게 설명해내지 못합니다. 앞서 타인을 영원한 지옥이라고 표현한 사르트르가 인간에게서 가장 주목한 바 역시 자유의 문제입니다.
133. 시인이 창조자인 이유는 그가 사실에 덧대어진 또 다른 가능성의 공간, 기형도의 표현을 빌자면 ‘창조적 세계’를 형상화해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시인은 자신이 ‘본’ 것을 ‘보이도록’ 만드는 일에 탁월한 사람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시인은 발견자이기도 하며, 구현의 장인이기도 합니다.
152, 하이데거는 한 강의에서 “과학은 사유하지 않는다”라는 유명한 말을 하기에 이릅니다. 물리학은 물리학이 무엇인지에 대해 되묻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런 물음은 물리학적 물음이 아니라 철학적 물음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과학은 사유하지 않는다는 말이었겠지요. 그런데 이런 비판은 좀 부적절해 보입니다. 인간 사유의 참모습이 오직 근원적 본질을 묻는 물음에만 제한될 이유는 없기 때문입니다.
161~162.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핵심은 이것입니다. 차이는 언제나 동일성을 전제할 때 생산적이라는 점입니다. 순수한 차이는 대립을 의미할 뿐이며, 그에 갇힌 한 대화도 가능하지 않습니다. 오늘날 세련된 지식인들이 신조처럼 믿는 다양성의 존중에서 강조되어야 할 바는 다양성이 그저 순수한 차이가 아니라 동일성에 기초한 차이를 의미한다는 점입니다. 동근원성으로부터 파생된 차이, 그것이 생태계의 풍요로움이자 생명이 지구상에 뿌리내리게 한 생존 전략으로서 진화의 고갱이입니다. 인간의 삶 그리고 학문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172~174. 부정적으로 사유하는 것 그리고 모든 일을 비관적으로 보는 것은 비슷하기는 하지만 그 태도에 있어서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부정적 사유는 근거를 잘 따져보자는 태도여서 내용적으로 보면 개방적인데 반해, 비관적 시각은 미래의 가능성을 지나치게 한쪽 방향으로만 생각하는 것이어서 사실상 폐쇄적인 태도입니다. 너무나도 빤한 현실을 부정해보는 일이 근거를 따져보는 태도라고 여기는 까닭은, 때로 우리가 당연하게 생각하는 일들이 반드시 ‘어쩔 수 없거나’ ‘필연적인’ 것은 아닐 수 있기 때문입니다. (중략) 인간 사유의 부정성은 비관적으로 생각한다는 뜻이 아니라, 이처럼 우리에게 현실 조건으로 주어진 것들의 근거를 다시 묻는 태도를 가리킵니다. 독일의 철학자 에드문트 후설에 따르면 우리는 세계 전체를 존재하지 않는 양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가 ‘판단중지’(epoche)라고 부른 의식의 작용은 세계의 존재 타당성을 잠시 정지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부정성의 능력은 우리 의식을 주어진 현실이라는 족쇄로부터 해방할 수 있습니다. 물론 실제 세계가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특정한 형태로 고정된 현재 대상의 의미로부터 벗어나 새로운 의미를 읽어낼 수 있게 해주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부정성의 능력은 가능성의 세계를 열어젖히는 우리 의식의 힘입니다.
181. 공간이 휘었다는 생각을 가능하도록 이끈 비유클리드 기하학은 18세기 이탈리아의 학자 사케리가 삼각형의 합은 180도라는 생각을 부정해본 데에서 시작합니다. 흔히 평행선 공리라고 부르는 유클리드 기하학의 다섯 번째 공준이 유독 복잡해 보였던 탓에 그것을 증명하고자 사케리는 평행선 공리와 모순되는 가정들을 세우고 모순을 이끌어냄으로써 평행선 공리의 타당성을 입증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그는 모순을 찾아낼 수 없었습니다. 결국 사케리는 그 작업을 포기하고 말았지만, 그 이후 수학자들이 2,000년 동안 진리의 가장 전형적 체계라고 믿어왔던 유클리드 기하학과는 다른 새로운 기하학(비유클리드 기하학)을 찾아내기에 이릅니다. 그리고 아인슈타인은 비유클리드 기하학을 활용하여 자신의 상대성 이론을 전개할 수 있었고 공간이 휠 수 있다는 생각도 가능해졌던 것입니다.
183. 속박이나 구속으로부터 벗어나는 일은 부정성에서 시작합니다. 플라톤이나 뉴턴 그리고 프로이트 역시 자신의 눈앞에 펼쳐진 현실의 이면을 보기 위해서 현실이라는 속박으로부터 벗어나는 데서 출발했습니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보기 위해 현실을 부정해보는 일, 당연해 보이는 대상의 타당성을 의심해보는 일은 일종의 입문 의식과도 같습니다. 플라톤은 이를 카타르시스에 비교한 적이 있습니다. 새로운 눈을 갖기 위해 정화하는 통과의례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222~224. 창의적 문제 해결력이라고 하면 사람들은 보통 ‘좋은’ 아이디어를 내놓을 수 있는 역량을 가장 먼저 떠올립니다. 그래서 사회 곳곳에서 아이디어맨에 대한 요구가 높습니다. 아이디어가 많다 함은 남들이 생각해보지 않은 것, 혹은 남들이 보지 못한 것을 보는 특별한 능력이 있음을 뜻합니다. 따라서 그 사람은 현실의 조건들에 매이지 않고 문제를 바라보는 시선을 다양하게 옮길 역량이 있는 사람입니다. 하지만 아이디어만으로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습니다. 흔히 창의적 문제 해결력이라 하면 주로 이렇게 아이디어가 많은 사람을 떠올리지만, 우리 목표는 그저 창의성 고양이 아니라 우리에게 주어진 과제를 해결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다른 조건들도 고려해야만 합니다. 주어진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좋은 아이디어가 떠올랐다면, 이제 현실적 조건을 고려해서 그것을 관철할 수 있는 실행력이 필요합니다. 여기에는 구현하는 사유, 다시 말해 공학적 합리성이 필요합니다. 최종 목표에 도달할 때까지 체계적으로 과제를 나누고, 그 과제를 달성하기 위한 세부 과정을 정리하고, 각 단계마다의 시간 및 비용 등을 전체적으로 관장해서 단계별로 추진해나갈 수 있는 역량이 필요합니다. 또 다른 역량은 오늘날 우리가 처한 사회의 복잡성과 관련이 있습니다. 다양한 이해관계를 지닌 주체들이 서로 합의하고 협력해야 하는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타인의 협력을 이끌어낼 수 있는 감성적 역량이 그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어떤 사람은 유독 다른 이들 도움을 받지 못합니다. 심지어 가급적 그 사람과 같이 일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게끔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반면 어떤 사람은 능력은 뛰어나 보이지 않아도 그와 함께 일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불러일으킵니다. 그렇다면 문제 해결력이 높은 사람에 대해 정리해볼까요? 가장 이상적인 경우는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아이디어가 많으면서도 그 아이디어를 구체화하고 현실에서 작동하도록 체계적으로 실행할 역량도 있고, 더불어 다른 사람들 협력을 잘 이끌어낼 수 있는 사람입니다.
225~226. 공동체 차원에서 바라보면 모두가 다 문제 해결력을 가진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아이디어를 내는 일이나 일을 추진해가는 일 혹은 사람들 마음을 어루만지는 일 등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기도 합니다. 그중에 특정 영역에서 상대적으로 다른 사람보다 뛰어난 사람이 있을 뿐입니다. 그렇게 각각의 영역에서 탁월함을 발휘할 수 있도록 조직이 운영되고 그러한 서로 다른 역량들이 제대로 평가받을 수만 있다면, 그 공동체는 더 나은 공동체로 진화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 사회는 다소 단선적이고 획일적인 시선으로 사람을 평가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특히 그 평가 기준은 대체로 정량적이고 결과 중심적입니다. 그래서 정량적으로 평가하기 어렵고 구체적 결과로 산출되지 않는 역량은 평가를 제대로 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런 문화가 확산되면 각각 자신이 잘할 수 있는 방기한 채, 자신이 잘하지 못하는 일을 해내기 위해 경쟁을 하게 됩니다. 이런 경쟁이야말로 소모적이며, 경우에 따라서는 공동체 자체를 위협할 수도 있는 결과를 낳기도 합니다. 본래 창의성 교육의 목표 중 하나는 각 개인으로 하여금 자신이 잘할 수 있는 것을 찾아내고, 그리하여 개인의 자존감을 높이는 것입니다. 이러한 교육의 성패는 결국 우리 사회가 얼마나 다양한 평가 기준을 갖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우리 사회가 얼마나 개방적인지를 가늠하는 지표가 될 것입니다.
227~228. 우리가 부딪친 문제를 해결해나갈 때 테일러가 빠진 역설 혹은 《멋진 신세계》의 지도자인 무스타파 몬드가 빠진 역설적 상황에 스스로 다시 빠지진 말아야겠습니다. 테일러가 꿈꾸었던 것은 공정을 합리화해서 생산성을 극대화하고 그 풍요로운 과실을 경영자나 노동자 모두가 함께 누리는 사회였습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그러한 합리적 공정은 인간을 소외시킴으로써 그 합리화 과정이 본래 누구를 위한 것이었는지를 잊고 말았습니다. 헉슬리가 그려낸 멋진 신세계 속의 사람들은 자신이 무슨 일을 하든 행복하다고 믿고 있지만, 그 소설을 보는 우리는 결코 그런 세계에서 살고 싶지는 않습니다. 일종의 조작된 삶으로 채워진, 비인간적 세계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온갖 근심 걱정을 털어버리고 행복감을 느끼도록 해주는 약을 언제든 먹을 수 있지만 그런 삶은 왠지 인간답다고 생각되지 않습니다. 문제를 해결해나가는 일은 결코 가치의 문제와 동떨어져 있지 않습니다. 문제 해결이라는 것은 그 문제를 넘어선 어떤 목적을 향한 과정이지 문제를 없애는 것이 목적은 아닙니다. 이것이 바로 기계적 사유와 인간적 사유의 중요한 차이이기도 합니다.
231. [매클루언은] 《구텐베르크 은하계》에서 문화인류학자들의 연구를 원용하여, 인쇄 매체를 사용하는 사람이 세상을 경험하는 방식과 구술 문화 속에 사는 사람이 세상을 경험하는 방식의 차이를 설명한 적이 있습니다. 예컨대 책을 읽을 줄 아는 사람이 영화와 같은 영상물을 지각하고 이해하는 방식과 책을 읽어본 적 없는 사람이 영상물을 지각하고 이해하는 방식은 완전히 다르다는 것입니다. 책을 읽을 줄 아는 사람은 장면과 장면 사이의 이야기를 끊임없이 연결해서 줄거리를 만들고 그렇게 전체 의미를 파악하려고 하지만, 책을 읽어본 경험이 없는 사람은 줄거리가 아니라 매 순간 그들의 관심을 끄는 대상만을 지각하고 기억한다는 것입니다. (중략) 실제로 여기저기서 디지털 미디어의 사용과 관련해서 우리 삶의 태도가 변화하고, 나아가 생각의 방식도 변화한다는 말들을 들을 수 있습니다. 트위터나 문자메시지처럼 단문에 익숙한 세대는 긴 호흡을 요구하는 책을 읽기 어려워한다는 이야기가 그렇고, 인터넷의 하이퍼텍스트 읽기에 익숙한 세대는 그 이전 세대에 비해 순발력이 높고 자유로운 연상에는 강하지만 오랜 시간 집중하기는 힘들어한다는 이야기도 그렇습니다. 매클루언이 미디어는 그저 어떤 메시지를 전달하기만 하는 도구가 아니라 미디어 자체가 메시지라고 말한 이유를 짐작할 만합니다. 미디어는 텍스트를 만들어내는 도구입니다. 문자라는 미디어는 문자화된 텍스트를 만들어내며, 디지털 미디어들은 다양하고 화려한 기술적 구현을 통해 여러 감각을 동시에 활용해서 읽어야 하는 텍스트를 만들어냅니다. 동일한 정보일지라도 글로 읽을 때와 이미지로 보고 소리로 들을 때 수용자가 겪는 경험은 상이합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메시지 자체가 달라지지는 않겠지요. 다만 메시지를 재현해내는 방식의 차이로 인해 메시지를 담고 있는 텍스트의 수용 효과에 차이가 생기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텍스트를 만들어내는 미디어와 텍스트가 전하는 정보는 상호 간에 영향을 미친다고 볼 수 있습니다.
247. 현실을 넘어서기 위해서는 현실의 우리를 붙잡고 있는 조건에 대한 의심이 필요합니다. 기계는 현실적 조건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현실적 조건들을 가능한 한 정확하게 대입하려고 합니다. 이 실증성의 사유는 앞서 살펴보았듯 공학적 합리성이 작동하는 부분입니다. 앞으로 우리 삶에서 만나게 될 범용 인공지능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확실히 우리는 합리성을 외주화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외주화한 합리성은 공학적 합리성입니다. 사유 방식으로 말하자면 현실적 조건을 고려해서 주어진 목표를 구현하려는 사유 방식입니다.
_ 박승억, <렌즈와 컴퍼스>, 로고폴리스, 20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