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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ptember 19, 2017: 11:47 pm: bluemosesErudition

이환천의 문학살롱, 흡인력 있다. “시가 아니라고 한다면 순순히 인정하겠다.”

: 10:58 pm: bluemosesErudition

6~7. 카르타고에 갔던 아우구스티누스보다 철이 없었다. 지켜보는 이도 없었다. 삶을, 온전히 쥐고 있다는 오만함이 넘쳤다. (중략)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 절망(絶望), 즉 희망을 끊는 일이다. 야욕과 절망 사이에는 10년 정도의 시간이 놓여 있었다. 그 시간은 인간 존재의 하찮음을 가르쳐주었다.

39. 남의 일 보듯이, 강 건너 불구경하듯이, 어디에도 마음을 두지 않고, 지그시 보아야 한다. 관조(觀照)다. 이는 마음을 비운다 해도 절대적 무(無)의 자리에서 보는 게 아니다. 보는 마음 한 자락은 쥐고 있는 것이다. 이 한 자락에서 더 해보려고 두 자락을 거머쥐면 집착이다. 집착은 욕심을 내는 것이다. 탐욕(貪慾)이다. 탐하고 욕하는데 쥐어지지 않으면 화가 난다. 진에(瞋恚)다. 본래 쥘 수 없는 것인데, 쥐어지지 않는다고 화내는 이만큼 바보가 없다. 어리석은 이가 난리를 치니 우치(愚癡)이다. 이 셋이 인간이 저지르는 근본 잘못 탐(貪)ㆍ진(瞋)ㆍ치(癡)이다. 세 가지는 독물, 삼독(三毒)이다.

44. 그 결합 이전에는 아이에게 시간이란 없지 않은가. 아이와 마찬가지로, 꼭 그와 같이 신의 창조 이전에는 사물이 없었고, 사물들의 사건이 없었고, 바로 그런 까닭에 시간도 없었다. 최초의 창조는 시간 속에서 이루어질 수 없었다. 그러면 시간 이전은 무엇인가. 하느님만 있었던 ‘시간 밖’은 무엇인가. 그것은 ‘영원’이다. 영원은 시간을 한없이 늘려서, 무한히 쌓아 올려서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다. 영원은 시간을 벗어나 버린 것이다. 영원에는 시간의 흐름이 없고, 과거와 미래도 없다. 현재로 있다. 아니 그저 있다 – 신의 시간.

52. 새로운 가르침, 복된 소식은 세계에 대한 정확한 지식을 인과관계에 따라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새롭고 복된 의미를 세계에 부여하여 그 의미를 받아들이는 이들의 삶의 방식을 변화시키고, 그러한 삶의 방식 위에서 어떤 일이 옳은지를 판단하는 방식(way of being right)을 바꾸어버린다. “첫째가 꼴찌가 되고 꼴찌가 첫째가 되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마르코, 10:31).

53. 우리가 거듭 상기해야 하는 것은 이 책이 자서전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이 텍스트는 신앙 고백이다. 그가 이 책을 쓰기 시작한 시기는 회심한지 11년이 지난 후 그의 나이 43세 때였다. 자신의 삶에 대한 정당화를 마련하고 싶은 시기였다. 그는 회심 이전의 모든 사건을 회심 이후로 종속시킨다.

56~59. 희랍의 자연철학자들은 세계가, 세계 속의 인간이, 자연물이었음을 알고 있었다. 그들은 세계와 인간에 어떠한 의미도, 더 나아가 궁극적인 목적도 부여하지 않았다. 기껏해야 ‘있음은 있고, 없음은 없다’는, 움직임과 변화는 설명하기 어려운 것이니 그것에 매달리면 그 무엇도 확증적으로 말할 수 없으리라는 걱정에 떠밀린 파르메니데스의 고집이 있었을 뿐, 다른 이들은, 이렇게 저렇게 말은 달랐다 해도 세계와 인간은 그저 이합집산으로 모인 덩어리들일 뿐임을 천명하였다. (중략) 그런데 자신의 앞선 시대에 나타났던 자연철학자들, 특히 아낙사고라스의 말을 견디지 못하였던 소크라테스는 세계와 인간에 의미를 부여하려 했다. 자연철학자들은 인간이 틀림없이 우주의 자연물이라 하였다. 우주 만물을 지배하는 법칙 아래 놓여 있는 ‘것’이라 하였다. 그렇게 규정하였다. 그것으로써 모든 것이 해명되었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그렇지 않다고 하였다. 인간은 자연철학적으로 규정할 수 없다고 하였다. 인간에게는 충동이 있고 의지가 있고 목적이 있어서 다른 ‘것’들과는 다르다고 하였다. 이로써 소크라테스에서 시작된 고난의 길, 불필요해 보이는 난문(aporia)이 세상에 펼쳐졌다. 플라톤은 소크라테스의 난해한 시도를 극한으로 끌고 올라가 세상에는 ‘좋음’의 이데아가 관철되어 있다고 고집을 부렸다. 그것이 목적이라는 것이다. 그는 분명히 자연을 떠났다. 혼의 불사(不死)를 믿어야 한다고, 그것에 관한 이야기를 ‘보존’해야 한다고 사람들을 ‘설득’하려 하였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더 큰 야욕을 가졌다. 존재 자체의 자발적 우연적 움직임으로써 움직여가는, 자연물이라는 질료와 우연한 움직임이라는 작용만이 관철되는 자연세계를 목적과 궁극적 실재인 형상과 이어 붙여 연속체를 만들려 한다. 전혀 이질적인 것들의 결합이다. 이질적이니 억지가 동원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그저 떠돌아다니고 있을 뿐인 자연물 안에 목적이 들어 있다고 말한다 – 내재적 목적론. 자연물들은 저마다 목적을 가진 ‘무엇’으로 변형되고, 종국에는 신을 향하게 된다. 이로써 그는 신이 최고의 위치에 놓인 거대한 우주 만물의 연쇄를 만들어낸다. 그러하니 그가 중세 스콜라 철학자들에게 참으로 소중한 ‘철학자’로 받아들여지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70. 본래 신 안에 있음을 깨닫지 못하면 악은 악이 아니다. 깨달음의 순간에 그것이 악임을 알게 되면, 이제 악을 떠나는 일과 신으로 향하는(ad te) 일이 동시에 일어난다. 신을 향하겠다고 마음먹었다고 해서 돌아옴이 단박에 일어나지는 않는다. 자신의 몸에 붙어 있는 세상의 욕망을 두고 고민하기도 하고, 지적인 전환이 일어나기도 하다가, 결단하는 의지의 회심이 생겨난 다음에야 비로소 ‘개종’이라는 최후의 회심이 가능한 것이요, 이때 우리는 신 안에 있음을 자각적으로 알게 된다. ‘in te’에서 ‘in te’로.

75. 회심에 이르는 과정은 그를 움직이는 힘인 사랑이 향하는 대상을 바꾸는 과정이기도 하다. 신에 대한 사랑, 신을 사랑한다는 것, 신의 사랑을 깨닫고 그 안에서 안심을 얻고 그런 다음 신이 만물을 사랑하는 방식을 본받아 만물을 사랑하는 것이 회심인것이다.

77. 정욕에 가득 찬 그의 삶은 <고백록> 3권에서 절정에 이른다. “나는 드디어 카르타고로 왔습니다”(3, 1, 1). 그가 카르타고에서 겪은 정욕은 육신의 것만이 아니다. 신 안에 들어서지 않은 이들이 거쳐가는 모든 것들이 여기서 전형적인 형태로 제시된다. “나는 사랑하기를 사랑하고 올가미가 없는 평탄한 길과 안전한 길을 미워하면서 사랑의 대상을 찾아 헤매었습니다”(3, 1, 1)

82~84. 마니교는 여전히 아우구스티누스를 사로잡고 있다. 9년 동안 믿었다. 수사학을 가르치는 교사 생활을 한다. 점성술에도 빠져든다. 친구와 사별하기도 한다. 고향으로 돌아간다. 20세에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십 범주>(Decem Praedicamenta)를 읽는다. “나는 그 당시에 학예라고 부르는 방면에 관한 여러 가지 책을 구입하여 모조리 읽고 홀로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4, 16, 30). … “그러나”(4, 16, 30) 그는 곧바로 이것을 무의미 한 것이라 고백한다. “나는 사실 사욕의 노예가 되어 있었으니 그렇듯 내가 책을 읽었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나에게 무슨 도움이 되었겠습니까?”(4, 16, 30). 도대체 왜 그러한가? 그것들은 그에게 근원을 알지 못한 채 주어진 지식들일 뿐이었다. “나는 그 책들을 흥미있게 읽었습니다만 그 책 속에 있는 참되고 확실성
있는 것이 어디로부터 오는지를 전혀 알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나는 빛에게 등을 돌리고 있었으므로 내 얼굴은 그 빛이 비추는 것들만 보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비추는 것들만 보고 있던 내 얼굴은 빛을 받지 못하고 있었습니다”(4, 16, 30). 무엇이 잘못된 것인지가 뚜렷해졌다. 지식을 쌓아 올리는 것이 잘못된 것이 아니다. 어떤 지식을 쌓아 올려야 하는지를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그가 쌓아 올렸던 것들은 신에게서 기인한 것이 아니었다. 신이 의미를 부여한 것이 아니었다. “당신 밖에(extra te), s나 자신 밖에(extra se) 있는 아름다운 것들을 추구한다 할지라도 그러합니다. 왜냐하면 당신은로부터 오지 않는 아름다운 것이란 존재할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4, 16, 15). 신에게 기인하지 않는 것은 신 바깥에 있는, 신의 의미부여를 벗어난 것이고, 바로 그러한 까닭에 내게서도 벗어난, 나에게 낯선 것이다. 내가 그 의미를 알 수 없으니 낯선 것이다. 내가 대상의 의미를 부여할 수 없다면, 나는 나 자신의 의미도 부여할 수 없게 될 것이다 - 나 스스로에게 낯선 나. 이것을 치유하는 방법은 하나, 신에게 돌아가는 것이다. 나 자신이 나에게 낯설 정도의 상황에 이르렀으니 이제 신을 향할 때가 되었다. “우리로 하여금 당신에게 돌아감으로써 다시는 파멸에 이르지 않도록 해주소서. 당신은 선 자체이시므로 우리의 선은 당신 안에서만 위험 없이 거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돌아갈 집을 찾지 못할 것이라고 두려워할 필요가 없으니, 우리는 다 스스로 그 집에서 떨어져 나온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집은 우리가 거기 거하지 않아도 허물어지지 않사오니 그 집은 당신의 영원한 집이기 때문입니다”(4, 16, 31).

85. <고백록> 5권부터 아우구스티누스는 신으로 향하는 여정을 기록한다. 그는 먼저 마니교를 떠나기로 결심하고, 암브로시우스 감독의 설교와 성서 해석의 도움을 받아 기독교도의 예비 신자가 되는 길을 차곡차곡 밟는다. 지적인 여정만이 아니다. 어머니 모니타와의 애착이 강력해지고 동거인과 결별하며 세속의 명예와 여자 문제를 정리한다(제6권). 회심을 향한 정서적 겪음을 거치면서 아우구스티누스는 결정적인 지적 회심에 들어서서 신플라톤주의의 텍스트들을 읽고 드디어 바울로의 서신들을 읽는다(제7권). 그러던 중 그에게 “확신의 빛”(8, 12, 29)이 들어와 의심을 거두어내며, 세례를 받는다(제9권).

91. 내가 사랑하는 신은 내 안 깊숙한 곳에 있지만, 저 높은 곳에 있기도 하다. 신을 찾아서 바깥으로 나갔다가, 세상의 모든 겪음을 기억 속에 담아 자기로 돌아왔다. 영혼 속에서 신을 찾았다. 그러나 신은 저 위에 계신다. 이제 신을 찾아서 위로 올라가야만 한다. 영혼을 거쳐서, 나의 내면을 거쳐서 신에게 간다. “내 영혼의 첨단 위에 계신 분은 누구이십니까? 내가 그분에게 오르려고 하면 바로 이 영혼을 통해 가아만 합니다”(10, 7, 11). 내 깊숙한 곳으로 내려가면 영혼이 있다. 바깥 세상에서 육체를 거쳐서 이른 곳이다. 그곳에 가야만 비로소 저 높은 곳에 있는 신에게 오를 수 있다 - 밖에서 안으로, 안에서 위로.

93. “내 위에 계시는 당신 안에서(supra me in te)” - 이렇게 말하면 지적 오만을 벗어버릴 수 있다. 그러나 그곳에 가려면 “내 자신의 깊은 내면보다 더 깊은 내면”(3, 6, 11)으로 내려가아먄 한다.

94. 불교에는 부정관(不淨觀)이라는 수행법이 있다. 정결하지 못한 것을 보는 것이다. 특히 몸의 더러움을 보는 것이다. (중략) 박상륭은 <죽음의 한 연구>에서 이렇게 쓴다: “해골을 볼 일이다. 그리고 살에 관해 험담하기나 찬양하기나, 그것이 어떤 의미를 지녔는지, 그래서 해골을 볼 일이다.”

99. 아우구스티누스는 고백하였다: “내가 당신을 알게 되기 이전에는 당신은 내 기억 안에 계시지 않으셨습니다”(10, 26, 37). 얼핏, 우리는 이 구절을, 아우구스티누스가 신을 알았을 때에야 비로소 신의 존재가 의미 있게 된다는 것으로 이해한다. 그렇지 않다. 아우구스티누스에서는, 그가 신을 알게 되기 전에도 신은 있다. 있기는 하나, “기억 안에 계시지 않”았을 뿐이다.

106. 데카르트는 신의 보장을 가진 자기의식을 내세웠지만 영리한 근대인들은 자기의식도 신의 보장도 필요치 않은 세계를 만든다. 그들은 서로의 내면을 궁금해하지 않는다. 이것은 ‘양심의 자유’라는 개념으로 구체화된다. 내면에 어떠한 성질을 가지고 있어도 겉으로 드러난 행위가 공동의 절차를 지키기만 하면 ‘사람’으로서 살아갈 수 있다. 이것은 ‘절차적 정당성’이라는 법적 개념으로 지칭된다. 이는 근대 민주정 체제의 근간이 된다. 내면에 대한 고민이 인간성의 척도가 아니다. 절차의 준수가 인격성의 척도가 된다.

136. 내가 전지전능한 신 관념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이 관념을 유한한 내가 떠올렸다는 것은, 유한한 존재에게는 도무지 있을 수가 없는 일이다. 이렇게 따져야만 가능한 것이다. 나처럼 하찮은 존재가, 신이라는 전지전능한 존재가 없었다면, 그런 전지전능한 존재가 실제로 있어서 내게 그 관념을 불어넣어주지 않았다면, 전지전능한 신이라는 관념을 가질 수나 있었겠는가, 내가 어떤 능력을 조금 가지고 있다해도 누군가 나를 도와주지 않았다면, 그런 성취를 할 수 있었을까. 데카르트가 신의 관념을 두고 신의 현존을 증명해내는 것은 바로 이러한 겸손함, 경건함이다. 그런 까닭에 이 현존 증명은 인간의 유한함에 대한, 인간의 하찮음에 대한 강력한 확신에 의존한다. 인간의 유한함과 하찮음과 나약함을 강조하면 할수록 이 증명의 위력은 커진다.

149. “신만이 인간의 진정한 행복이다”(팡세, §181). 그저 믿고 의지하면 된다. 하찮은 유한자의 처지에서 세계를 내 정신으로 구축해보려 애써서는 안 된다. 인간은 신의 자리로 결코 건너갈 수 없다. 그렇게 생각하면 오만함이다. 자신이 진리의 담지자라고 선포하는 것이다. 차라리 나는 유한한 존재임을 인정하고 그 안에서 깜냥껏 살겠다고 하는 것이 낫다. 인간은 신에게 다가갈 수 있을지언정 어디에 있는지는 알지 못한다. 신을 찾았다고 선언할 수도, 현존을 증명할 수도 없다. 파스칼은 고백한다. “하느님께서는 숨어 계시기를 원하셨다는 것. (중략) 하느넴께서는 이처럼 숨어 계시기 때문에 하느님께서 숨어 계신다고 말하지 않는 모든 종교는 참 종교가 아니다”(팡세, §1275). “참으로 당신은 자신을 숨기시는 하느님이십니다”(Vere tu es Deus absconditus)(이사야 45:15).

149~151. 신은 숨어 있다. 우리는 신이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다. 알 수 없으니 신이 있는 곳으로 갈 수 없다. 알지 못하니 갈 수 없다. 어쩌면 우리는 이것에서 위안을 얻을지도 모른다. 멈춰 설 곳을 알지 못한 채 계속 나아가기만 하는 것은 비극적 전망이 아니다. 그저 가는 것이다. 꿈도 없이 희망도 없이. 어디에 있는지 알면서도 가지 못하는 것이 차라리 비극이다. 저기에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가 닿을 수 없는 것 - 그것이 슬픔 아닌가. 슬픔을 이기려면. 내가 멈춰 선 곳에 신이 있다고 확신한다.

_ 강유원, <숨은 신을 찾아서>, 라티오, 2016.

: 8:36 pm: bluemosesErudition

“만인을 적으로 만들지언정 신들을 적으로 만들지는 말게.”(오레스테이아 3부작 <제주를 바치는 여인들> 902행) _ 퓔라데스가 모친 살해를 망설이는 오레스테스에게.

: 10:19 am: bluemosesErudition

오롯이 자기로 충일한, 충분히 좋지 못한 부/모는 아이에게 해롭다.

: 1:24 am: bluemosesErudition

도망갈 생각조차 하지 않는
난만한 그 눈동자,
너를 떠나서는 아무데도 갈 수 없다고
갈 수도 없다고
나는 오르던 산길을 내려오고 만다

_ 나희덕, “어린것”, <그 말이 잎을 물들였다>, 창비, 1994.

: 1:05 am: bluemosesErudition

소외가 혼비백산이면, 도야는 금의환향이다.

: 12:51 am: bluemosesErudition

‘무한한 우주의 영원한 침묵이 나를 하나의 점인 것처럼 삼켜 버리나, 나는 사유에 의해 우주를 그리한다.’ 이 자각이 신앙의 관(棺)이다. 무덤으로 틈입한 빛은 고요히 수런거린다. ‘너는 생각하는, 상한 갈대라고.’ 여기에 파스칼을 읽는 보람이 있다. 그런데, 왜 신은 숨어 계시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