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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의 빤스에 구멍이 난 걸 알게 된 건
단풍나무 때문이다
단풍나무가 아내의 꽃무늬 빤스를 입고
볼을 붉혔기 때문이다
열어놓은 베란다 창문을 넘어
아파트 화단 아래 떨어진
아내의 속옷,
나뭇가지에 척 걸쳐져 속옷 한 벌 사준 적 없는
속없는 지아비를 빤히 올려다보는 빤스
누가 볼까 얼른 한달음에 뛰어내려가
단풍나무를 기어올랐다 나는
첫날밤처럼 구멍 난 단풍나무 빤스를 벗기며 내내
볼이 화끈거렸다
그 이후부터다, 단풍나무만 보면
단풍보다 내 볼이 더 바알개지는 것은
_ 손택수, 「단풍나무 빤스」, 『목련 전차』, 창비, 2006.
스무살 무렵 나 안마시술소에서 일할 때, 현관 보이로 어서 옵쇼, 손님들 구두닦이로 밥 먹고 살 때 // 맹인 안마사들도 아가씨들도 다 비번을 내서 고향에 가고, 그날은 나와 새로 온 김양 누나만 가게를 지키고 있었는데 // 이런 날도 손님이 있겠어 누나 간판불 끄고 탕수육이나 시켜먹자, 그렇게 재차 졸라대고만 있었는데 // 그 말이 무슨 화근이라도 되었던가 그날따라 웬 손님이 그렇게나 많았는지, 상한 구두코에 광을 내는 동안 퉤, 퉤 신세 한탄을 하며 구두를 닦는 동안 // 누나는 술 취한 사내들을 혼자사 다 받아내었습니다 전표에 찍힌 스물 셋 어디로도 귀향하지 못한 철새들을 하룻밤에 혼자서 다 받아주었습니다 // 날이 샜을 무렵엔 비틀비틀 분화장 범벅이 된 얼굴로 내 어깨에 기대어 흐느껴 울던 추석달
_ 손택수, 「추석달」, 『목련 전차』, 창비, 2006.
2수. 오 차장의 표현에 따르면 ‘문턱 주의자’, 넘어야 할 이유가 없는 문턱은 절대 넘어서는 법이 없으며 일단 넘어선 문턱에선 뒤를 돌아보지 않는다. … 장사꾼에게 돈을 대하는 태도는 인격에 다름 아니라고 생각하는 김부련 부장이다.
3수. 이런 회사에 들어오면 안 됩니다. 자기 실수가 보완되고 신중한 사수와 성실한 후임이 있는 그런 곳에 가야 합니다.
5수. 월급날, 월급을 줄 수 있다는 건 회사의 엄청나고 엄청난 성과야.
8수. 업무를 마쳤으면 바로 보낸 다음 말을 해줘야죠. 그래야 다음 일을 할 수 있잖아요. 혼자 갖고 있으면 어떡해요?
9수. 멸망한 아버지를 따라나선 기분이다.
12수. 내가 양해를 구해 달랬지. 모욕을 주랬어 임마! 넌 평생 이 회사 다닐 것 같애? 이 회사가 평생 너 책임질 것 같냐고! … 그런 과한 충성이 결국 자기 보신 아니고 뭐야 임마!
13수. 일할 땐 화내지마. 언제 저 사람과 손잡을지 몰라.
17수. 승리를 탐하면 이기지 못한다.
18수. 복거일이란 소설가의 ‘비명을 찾아서’란 책에 복식 부기에 대한 글이 나와. 복식 부기는 인류 역사상 무척 중요한 발명품 중 하나고 복식 부기에 의한 정확한 계산 없이 국제 무역에 종사하는 회사를 운영할 수 없다는 거지. 내연 기관의 발명에 맞먹는 중요한 사건이라고.
25수. 위기를 무기로 사용해.
27수. 이적의 수. 상대의 귀가 빨개질 정도로 충격과 부끄러움을 주는 묘수라는 말인데요. 일본 바둑 기사 인세키가 슈사쿠의 결정적인 묘수에 귀가 붉어졌다고 해서 생긴 말이에요.
29수. 자네 사장을 처음 만났을 때 누구나처럼 눈길 한번 주지 않았네. 그런데 그 양반이 다른 사람과 달랐던 건 절대 페이퍼만 보고 판단하지 않더란 거지. 주변 평도 들어보고 세금 잘 내는지 우편물도 확인해보고…
36수. ‘평범하다’라는 건 말이죠… 죽도록 살아도 티가 안나 꾸역꾸역 사는 모든 사람을 말한다구요.
37수. 세계무역기구(WTO) 산하의 국제무역센터(ITC)에서 Tarde Map이란 세계무역통계 조회 기능을 제공하고 있고 그 자료를 코트라가 ITC 측과 제휴를 통해 코트라 홈페이지에서 자료를 확인할 수 있게 했네요.
38수. 굴욕적 친구 관계가 늘 그렇듯, 김 전무는 호의를 상납하고 있었다.
40수. 충분히 오래 생각했다면 남은 건 빠른 실행력뿐. 판단히 섰을 때 주저 없이 움직이는 건 오 부장의 장기였다. 그래서 정치한 영역을 배려하지 못해 애는 먹지만 좌고우면하지 않고 튀어나가는 게 오 부장이었다.
41수. 경험적으로 알고 있다. 쉽게 사람을 포기했을 때 데미지는 오히려 자신에게 온다는 걸. 회한과 한탄이 뒤섞여 스스로를 괴롭힌다는 걸. 누군가를 포기하고자 한다면 미련이 남지 않을 만큼 최선을 다 해야 한다. 그래야 선택에 책임질 수 있고 자신을 괴롭히지 않게 된다.
44수. 지금은 간판 사라져, 백업 못 받아, 언제 해 봤을지 모를 페이퍼 웤 해야 돼. 죽을 맛인 거지. 중소기업은 그냥 힘들어. 다 힘들어. 죄다 힘들어. 숨만 쉬어도 힘들어.
46수. 술 먹고 싶으니까 잘 될 수 있는 일도 고민하는 척하고 인간관계 풀 수 있는 일도 딱 쥐고 안 풀더라니까 … 그 옷 내일 되면 말끔해지잖소? 따끈한 밥상 나오고. 우리 김 선생 혼자 세상 걱정하는 동안 안식구는 거적 같은 옷 빨아서 이쁘게 개어놓고 속 푸시라고 콩나물이라도 넣어서 국 끓여 내오시잖아. 김 선생 지금 그거 술 막 막시면서 어디다 대고 화내는 거 있잖소? 그거 지가 지 못난 거 알아서 지한테 화내는 걸 옆에서는 다 알아서 뭐라 못하는 거요. 내 서방이고 애 아빠고 그런 사람이 죽겠다는데 죽어라 할 수 없어서 안 하는 거라고. 어디 김 사장이 이뻐서 그렇게 봐주는 줄 알아요?
47수. 갑도 호구 잡힌다. 똑바로 해라.
48수. 돈 주고 받는데 사연 풀고 그러지 맙시다. 돈에 사연 얹으면 한스럽지 않소.
49수. 허리는 숙일수록 돈으로 돌아온다고.
52수. 바둑 용어 중에 ‘회돌이’라는 말이 있다. 상대의 돌을 나쁜 모양으로 뭉치게 만들면서(응형凝形) 계속된 단수로 공격하는 기법. … 가령 ‘선의’로 포장된 몰아붙이기. … 오 부장은 선의를 듬뿍 뒤집어쓴 채 화가 나있다. (중략) 많고 많은 바둑 격언 중에 내가 제일 좋아하는 말이 뭔지 알아? ‘미생마는 동행하라.’ … 옆에 있어 주기 위해 가는 거야.
53수. 일을 처음 배울 땐 효율적, 편하고 쉽게 하는 방법을 찾지 말고 빈도를 높여 나가 봐. 여러 번 반복하는 거지. 반복하는 길을 찾아야 해. 거쳐야 할 프로세스가 많은 일을 해야 해. 그래야 조금 더 일을 잘 이해할 수 있어. 역설적으로 그게 가장 빠른 길이기도 해. 업무를 익히는. 사전을 들춰본 빈도와 실력은 비례한다잖아. 업무 외에도 회사에서 일을 잘 한다는 건 생활을 잘 해야 하는 거야. 일상적인 어떤 것. 외근 나갔더라도 가급적 회사에 꼭 들러서 마무리 점검하고 퇴근하라고.
55수. 모든 일에 계기가 되는 친구입니다.
57수. 거저 얻는 법이 없는 친구들이야. 기꺼이 귀찮게 일 해.
59수. ‘빈삼각은 우형이라고, 피하라고 말하지만 빈삼각을 둘 수 있어야 고수다.’ … 실체가 불분명한, 잡히지 않는 먼 곳에 대한 낭만적 상상을 ‘망상’이라 부를 수 있다면 그것에 우리를, 나를 ‘지금 여기’로 끊임없이 불러 앉혔던 것이다.
60수. 집에 있는 게 불안해서겠죠. 맘도 안 편하고. 때로는 몸을 힘들게 해서 정신적 스트레스는 피하려고 하잖아요. (중략) 조심해야 해요. 선의란 게 자칫 양쪽 모두에게서 욕을 먹을 수도 있어요.
61수. 일을 숙제검사 받듯 하면 안 되지. 자기가 가장 잘 할 수 있는 걸 신념을 갖고 밀어붙이는 거야.
62수. 종이 신문 읽어. 상사맨은 잡다하게 다 읽어야 해. … 사업할 때 돈 얘기만 하고 끝내는 사람 없다. 날씨 얘기로 시작해서 애들 교육 문제, 그 교육을 만드는 정치적인 문제, 정치적인 문화를 만든 사람들 문제 … 모든 게 다 사업과 관련한 이야기가 돼. … 온갖 잡다한 것들이 모여 그림을 만들거든.
63수. 모험을 하고 타개를 경험하지 않으면 정확한 계산이란 만들어질 수 없는 거야. … 전장에 많이 선 장수일 수록 두려움을 갑옷처럼 두르고 산단다. … 오 부장은 보류시킨 김 과장 아이템을 다시 살폈다. 자신의 판단과 결정을 재검토한 것이다. 두려움을 온몸에 칭칭 두른 백전노장.
64수. 밥 배부르게 먹고 가지 말어. 적당히 배가 비어있어야 눈에 총기도 비치고 좋아. (중략) 죄의식을 즐겨선 안돼… 이렇게 감정을 소진해선 안돼… (중략) 숫자로 만족시키지 못하면 선의는 금세 날아가 버린다. … 애초 선의는 없었다. 제안이 있을 뿐.
65수. 커다란 회사의 외피는 격랑 속에서 버티게 해 주었다. 그리고 그 외피를 벗은 순간. 어느 콘크리트보다 단단한 페이퍼의 세계가 펼쳐졌다. 어제 술자리의 친근함으로 페이퍼를 대하는 순간 은퇴를 앞당길 뿐이다.
67수. 대부분 수를 분석하는 것은 절대수를 찾기 위함이다. 꼭 둬야 하는 그 한 수. 상대가 따라두지 않으면 안 되는 그 수. 그래야 판을 주도할 수 있다. (중략) 연속성에 대해 받아들일 수 있는 최선의 기간, 마진율을 조정할 수 있는 최선의 매출액. 그 기간과 액수를 보면 온길이 보이죠. 온길이 어떤 회사인지, 어떻게, 언제까지 버틸 수 있는 회사인지.
69수. 배부르면 졸려요. 실수할까 봐 막 안 먹어요.
73수. 원 인터에서의 하루하루는 위, 아래, 좌, 우에 있는 사람들과의 관계로 채워졌다면 온길에서의 하루하루는 숫자 끝자리와의 사투와, 사기와의 싸움으로 채워졌다. (중략) 저 입사한 날 오 부장님께서 어떤 경우라도 무보 접수하고 일하라고 하셔서 해놨거든요.
74수. 꼭 사람을 의심하란 건 아니다만, 주변 사람은 주변 사람인 거지. 사업하는 사람에 대해 제대로 된 소리 들어보려면 같이 놀아 본 사람이 아니라 돈을 같이 나눠 본 사람 말을 들어 봐야 해. 동업자나 거래처나 아랫 직원이나 하다못해 은행 직원이라도. 동네 식당은 식당 입장에서 이야기하지 않겠어? 사기꾼이 꼴랑 밥값 떼먹고 도망 다니겠니? 저 사람이 올바르냐 묻는데 자린고비요라고 답하면 안 되는 것처럼 저 사람이 돈이 철저하냐 알고 싶은데 인정을 들여다보는 것처럼 허망한 것도 없는 것이지.
75수. 거래처에 신세 지는 것도 조심해야 하지만 개인적 신세와 일을 구분 못하면 사업하기 힘들지. (중략) 큰돈 사기치면서 이런 잔돈푼 챙기겠느냐 하겠지만 서류로, 숫자로 대하는 거래처와 얼굴을 대면하는 회사 앞 음식점은 다를 것이다. 욕을 먹어도 더 아픈 사람이 있는 법이다. … 진짜 사기 치고 튀는 거라면 마지막 인사하기 위해서라도 올 테고, 피치 못할 사정 때문에 도피한 거라면 주변인들한테 오해받기 싫어서라도 올 거고, 큰일이 아닌, 정말 갑자기 생긴 문제로 거래처에 문제를 일으킨 거라면 다른 것까지 문제 되지 않게끔 원래 하던 대로 돈 갚으로 올 거야. 문제가 터지면 정신 못 차리고 나몰라라 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문제의 사이즈가 커지지 않게 다른 것들을 그대로 유지하려는 강한 의지력이 있는 사람도 있지. … 내가 좋을 때만 인간관계 맺는 게 아니잖아. 대체로 평판이 좋다는 건 의지력이 강한 사람일 확률이 높은 거지.
77수. 남의 고통을 빌어와 반성하고 치유하는 일은 얼마나 혐오스러운가. 하지만 삶에서 그것만큼 정확한 교과서도 없는 법이다. 남의 고통에서조차 배우지 못한다면 무엇으로 배울 수 있겠는가.
78수. 수십 번… 수백 번… 아마 마음속에서 수천 번… 헛손질, 헛발질을 하고서야 마음 깊이 받아들였다. 아버지의 죽음을… 마지막이었던 그 날. 세상이 잿빛이었던 그 날. 아빠가 너무 보고 싶었다. 혼나고 싶은데 혼날 수 없었다. 그래서 스스로 혼내야 했다. 아주 많이.
79수. 그렇게 떨쳐내려던 기억이 다시 소환됐다. 동정심 때문에, 연민 때문에, 동질감 때문에… 아니, 자리보전한 가족을 돌봐야 하는 나머지 가족의 지리한 미래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도움을 받으면 받는 사람대로 도움을 주면 도움을 주는 사람대로 고마워하기도, 보람을 느끼기도 궁색하다. 하는 행위에 마음을 얹지 않는 것. 무심한 일상이야말로 그들이 껴안아야 할 삶의 비극이다.
81수. 장그래 역시 그랬다. 숫자에 집중하고 문서의 완결성에 누구보다 신경 쓰는 편이었다. 일의 마무리 역시 남에게 떠넘기는 법이 없는 한그루의 전범이었다. 그런 장그래 역시 상사에 몸 담으며 변화했다. 숫자에 집중하고 문서의 완결성을 높이며 일의 마무리를 챙기는 모든 행위는 일을 잘하려 할 때 필수적인 요소다. 선택이 있을 수 없다. 그냥 기본이다.
84수. 수백 마디 말이 목에 걸린 한 사장은 눈물만 흘릴 뿐이었다. 자신만 멀쩡했다면 다 괜찮았을 일이 치부처럼 들춰지고 있다.
84수. 가속이 붙은 사고에 내 생각을 맡겨서는 안 된다. 그것은 나의 판단이 아닌 가속의 결과일 뿐이다. 문득문득 멈춰야 한다. 스스로의 생각을 재고하는 것이야말로 정확한 판다의 기초인 것이다.
86수. 잘못을 공유하며 끈끈한 친구가 되어갔다.
87수. 개인적인 일이라면 퇴근해서 처리하지. 괜히 남아서 일하듯 보이면 남들도 강박 생겨.
88수. 아무리 거대한 시스템 안에 하더라도 결국 일은 사람이 하는 거죠. 요즘 많이 느끼고 있어요. 리스크 중에 인적 리스크가 제일 큰 것 같아요. 그걸 보완하기 위해 내규를 세우고 데이터를 만드는 건데 아무리 그래도 잘못을 못 따라가죠. 잘못과 실수가 얼마나 창의적인지.
89수. 그렇게 어려우시다니 드릴 말씀이 없네요. 그러하니 이 계약은 그만 접었으면 합니다. 서로 피해를 나누는 일은 말아야죠.
89수. 도장 찍힌 서류 없이는 한 걸음도 안 걸을 테니까.
90수. 어떻게 질 것인가. 분명 돌을 던져야 할 때 던지지 못하는 것도 기사로서 수치이고, 좀 더 모색하지 않고 쉬이 돌은 던지지 못하는 것도 수치이고 승부가 끝났는데도 상대의 실수를 집요하게 유도하는 것도 수치이고 최후의 순간까지 역전의 기회를 노리지 않는 것도 수치이다. 어떻게 질 것인가. 어떻게 져야 다음 대국을 기약할 수 있을 것인가.
91수. 장그래 같이 신중하고 꼼꼼한 사람은 좀 더디게 성장하거든. 그래서 진급이 잘 안 돼도 눈에 안 띄어. 미안할 일이 적어지는 거지.
91수. 고민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말이야 고민 자체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더라고. 고민하는 자기 자신을. 꽤 뿌듯한가 봐. 신중해 보이고 사람이 깊어 보이고… 안 그래도 돼. 나는 못하고 진까 걔만 할 수 있는 일이라면 걔가 하면 되지. 장그래는 장그래가 잘 하는 일하면 돼. 애들 같은 고민 쥐고 있다간 성장 못한다. 나이 먹은 사람만 꼰대인 거 아냐. 애늙은이. 그것도 꼰대의 기본기 중에 하나라고. 경쾌하게 살아.
92수. 대답할 때는 말 끝 잘라먹지 말고. 끝까지 확실히 말해. 온길의 회사 사람들, 거래처 사람들 이름하고 직급, 제대로 기억하고, 꼭 이름에 붙여서 불러. 일하던 서류 널려놓고 퇴근하지 말고 다음날 기분 좋게 깔끔하니 정리하고 퇴근해. 흥이 나는 자리여도 네 시간 됐으면 일어나고 불편하고 어려운 자리여도 지켜야 하는 자리면 끝까지 앉아 있어. 도와주시면 무턱대고 거절하지 말고 감사히 받고 꼭 인사드리고. 남 도움 주는 것도 쉬운 일 아니지만 남 도움 제대로 받는 건 더 쉽지 않은 일이다.
_ 윤태호, 미생 시즌2 1부.
“인삼의 붉은 열매인 ‘진생베리’가 뜨고 있다. 몸에 좋은 사포닌 성분이 뿌리보다 열매에 3배 이상 많은 것으로 알려지면서다. ··· 진생베리는 희귀한 열매다. 1년 중 7월 하순경 단 1주일간만 열린다. 인삼의 영양이 가장 풍부한 4년생일 때 수확한다. 재배수량이 적고, 하루 안에 열매가 시들어버리는 특성 때문에 자연 상태로는 보관이 어렵다. 이런 희귀성 때문에 예로부터 황실이나 귀족 등 일부 특권층의 건강식품으로 활용돼왔다. 일본 궁내청은 나루히토 황태자 부부의 건강을 위해 진생베리를 바쳤으며, 당나라에서는 궁중 전용차로 즐기기도 했다.”
갈애. 혹은 애갈. 매우 좋아하고 사랑함. 번뇌에 얽혀서 생사를 초월하지 못하는 범부가 목마를 때 애타게 물을 찾듯이 색욕, 재물욕, 음식욕, 명예욕, 수면욕의 다섯 가지 욕망에 애착함
“한국에 대학이 급증한 건 1995년 김영삼 정부 시절 대학 설립 기준이 바뀌면서부터다. 그전까지 4년제 대학을 세우려면 최소 33만m²의 학교부지와 부지 비용 외에 1200억 원 이상의 재원 등이 있어야 했다. 하지만 당시 교육부는 ‘백화점식 종합대학 일변도에서 벗어나 특성화된 대학이 필요하다’며 인가 기준을 확 낮췄다.”
“2024년이면 사학연금 전체 수입의 16%가 줄어든다. 이 시기는 한 해 출생아 수가 처음으로 50만 명 밑으로 떨어진 ‘저출산 세대’(2002년생 이후)가 4년제 대학 4학년까지 진학하는 때다. 저출산 여파로 정원 미달 사태가 속출하면 4년제 대학 73곳, 전문대 52곳이 존폐 위기에 처할 것으로 보인다. 만약 이 대학들이 문을 닫으면 교직원 약 4만 명이 실직 위기에 놓인다. 현재 14만 명인 사립대 전체 교직원 10명 중 3명이 내던 연금액(2850억 원)이 사라지는 셈이다.
19~21. 니체가 설명하는 십자가 사건의 의미를 생각하자. 그 설명에 따르면, 인간들 모두에게 죄의식과 양심의 가책을 불러일으키는 신의 목소리가 내면화되기 위해 먼저 신이 인간의 손에 죽어야 했고 이를 통해 어떤 탕감할 수 없는 채무관계를 확립해야 했다. 맑스에 따르면, 황금이 상품의 질서를 장악하는 일반적 등가물(화폐)의 위치에 오르기 위해서는 스스로 사용가치를 버려야 했다. 스스로 상품의 자격을 부정하는 조건에서만 황금은 상품 일반의 척도로서, 등가적 교환의 질서를 정초하는 형이상학적 실체로서 다시 태어날 수 있었다. 프로이트에게서도 마찬가지다. 아버지가 아들들의 세계에 입법자로 군림하기 위해서도 죽어야 한다. 이상적 인간으로서 아버지가 행사하는 권위는 부친살해 뒤에 따라오는 후회 속에서, 아들들의 애도 속에서 탄생한다. 초월적인 것은 모두 장례행렬 끝에서 성립하는 것이다. (중략) 근대적 주체는 점점 더 자신의 자연적 조건을 제거해갔고, 이를 통해서 사물의 질서를 벗어나고자 했다. 근대적 주체는 점점 더 자신을 추상화해갔고 선험화했다. 그것은 자연의 중력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자발적으로 자연적 중량을 해소해가는 과정, 곧 유령이 되어가는 과정이다. 그런 유령화를 댓가로 데까르뜨적 자아는 자연 위에 군림하는 입법적 지위에 올라설 수 있었고, 이 세계를 통일하는 권력을 차지할 수 있었다. 헤겔이 말하는 것처럼, 그런 권력의 정점에서 자아는 어떤 공허한 끈이 된다. “추상적인 존재자인 이런 자아는 주체성으로서 동시에 상이한 여러 이름들을 지배하는 권력이고, 이 이름들의 계열을 자신 속에 고정하고 확고한 질서 속에 보존하는 공허한 ‘끈’(band)이다.” 이름의 질서, 그리고 그것이 대신하는 사물의 질서는 자아라는 공허한 끈에 의해 형성되고 조종되는 어떤 그물을 닮았다. 세계가 어떤 집이라면, 그것은 어떤 거대한 거미집이다. 유령화된 자아의 모습은 끊임없이 실을 분비하는 거미를 닮았다. 세계는 거미 같은 자아의 실로 두루 묶인다. 자아는 이름과 이름을 묶는 끈(copula), 사물과 사물을 엮는 계사(繫絲)이다. 자아는 어떤 존재론적 계사(繫辭)이다(앞으로 ‘계사’는 많은 경우 繫絲와 繫辭를 동시에 의미한다). 이 계사 안에는 사물들은 질서를, 단일한 통일성을 얻는다. 그러나 그런 것을 얻기 위해서 무엇을 잃어야 하는가? 그것은 사물들이 ‘원래’ 가지고 있던 유대 또는 종속 관계이다. 자연의 상태에서 사물들을 묶어주던 끈, 가령 유적 일반성을 잃어버려야 한다. 사물들은 자아의 계사 안에서 재편되기 위해서 기존의 관계망에서 벗어나 고립된 개체가 되어야 한다. 그런 조건에서만 자아의 계사적 권력은 대상 일반에 무차별하게 뻗어갈 수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계사로서의 자아는 두 가지 모습을 취한다. 자아는 사물들을 편성하던 자연적 연줄을 끊어내는 동시에 자신이 뽑아낸 실로 사물을 다시 엮어내는 권력이다. 자아가 어떤 ‘공허한 끈’이라면, 그 끈은 푸는 동시에 묶고 이완하는 동시에 수축하는 이중적 운동의 실마리다. 자아는 끊기와 잇기를 거듭하는 계사인 것이다.
29~31. 근대적 주체는 이중적 의미의 병리적 상태에 빠져 있다. 먼저 근대적 주체는 나르씨시즘에 젖어 있다는 점에서 병리적이다. 근대적 주체의 유래가 성적 에너지의 승화에 있다면, 그 승화가 있기 위해서는 먼저 대상으로 향하던 성적 에너지가 자기애적 리비도로 변형되어야 한다. 자기 자신으로 향하는 성적 에너지가 충분히 모인 다음에야 승화가 가능하기 때문에 그런 전환이 앞서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전환이 “승화에 이르는 보편적인 길”이며, 그래서 “모든 승화는 자아를 매개로 발생한다.” 따라서 근대적 주체가 있고 나중에 나르키소스적 주체가 있는 것이 아니다. 근대적 주체는 처음부터 나르키소스적 주체의 아들일 뿐이다. 다른 한편 근대적 주체는 본성상 파괴적이고 공격적이라는 의미에서 병리적이다. 왜냐하면 근대적 주체의 유래가 자기애적 에너지의 승화에 있다면, 그 승화는 죽음충동의 공격성을 중화하는 에로스의 성적 에너지를 고갈시키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아는 정체성이 커지고 계사적 권력이 강해질수록 날로 파괴적인 성향을 띠어가게 된다. 승화 - 우리는 앞에서 이것을 유령화라는 말로 표현했다 - 를 통해서 초월론적 차원으로 도약하는 근대적 주체가 배타적일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여기서 자신의 입법적 권위와 규칙에 어긋나는 타자를 공격하면서 쾌감을 느끼는 가학증적 증세까지 예상된다. 그러나 근대적 주체는 가학적일 뿐 아니라 피학적일 수 있다. 주체 안에 준동하는 죽음충동의 파괴력이 주체 자신으로 향할 수 있기 때문이다. 승화는 “자아이상이 강제적 의무에서 볼 수 있는 가혹하고 잔인한 성격을 취하게 되는” 최초의 원인이고, 자아가 초자아로부터 치명적 학대를 받을 수 있는 가능성을 낳는다. 프로이트는 주체의 이런 피학적 자기학대 가능성에서 도덕적 규범의 원천을 본다. 후에 라깡이 칸트와 싸드를 한자리에 놓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양심의 가책, 죄의식, 칸트의 정언명법으로 대변되는 도덕적 원칙 등이 주체의 그런 내향적 공격성에서 발생한다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근대적 주체에 대한 프로이트의 비판적 함축을 끌어낸다면, 그 주체는 어떤 치명적 폭력에 마주선 방어적 주체이다. 단지 자신의 내부에서 오는 폭력에 대해서만 그런 것이 아니다. 주체는 외부세계에 대해서도 방어적이고 반응적이다. 주체가 자신의 안과 밖에 대해 맺는 모든 관계는 그 근본에 있어 능동적이라기보다 반동적이다. 가령 칸트가 말하는 의식의 선험적 형식은 어떤 방어 메커니즘이다. 이런 시각이 잘 드러나는 것은 <쾌락원칙을 넘어서> 4절이다. 여기서 프로이트는 의식의 생물학적 기원과 유래를 가장 단순한 형태의 유기체에 해당하는 미분화된 소포(小胞)를 가지고 설명한다. 이 소포는 강력한 에너지로 넘실대는 외부세계의 한가운데 매달려 있다. 그 에너지는 소포가 생명을 유지할 수 있는 자양분이지만, 그것이 초래할 강력한 자극은 소포를 파괴할 수도 있다. 그러므로 여기서 “살아 있는 유기체에 대하여 자극의 수용보다 훨씬 중요한 것은 자극에 대한 방어”라는 일반적 명제를 끌어낼 수 있다. 이 방어를 위해서 소포가 갖추어야 하는 것은 어떤 ‘방패’이다. 소포는 자신의 일부를 죽요서 그런 방패를 만드는데, 그것이 외피다. 외부의 자극을 수용하는 동시에 방어하는 이 표면의 외피는 진화과정을 거쳐 감각기관으로 발전한다. 그리고 이 감각기관이 다시 진화하여 의식체계가 성립한다.
_ 김상환, <니체, 프로이트, 맑스 이후>, 창비, 20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