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흔히 사랑니라고 부르는 치아는 큰 어금니 중 세 번째 위치인 제3 대구치를 말하는데 구강 내에서 제일 늦게 나오는 치아입니다. 보통 사춘기 이후 17~25세 무렵에 나기 시작하는데 새로 어금니가 날 때 마치 첫사랑을 앓듯이 아프다고 하여 사랑니라는 명칭이 붙게 되었습니다. 또한 사리를 분별할 수 있는 지혜가 생기는 시기에 나온다고 하여 지치(智齒)라고도 합니다.”
“우리가 흔히 사랑니라고 부르는 치아는 큰 어금니 중 세 번째 위치인 제3 대구치를 말하는데 구강 내에서 제일 늦게 나오는 치아입니다. 보통 사춘기 이후 17~25세 무렵에 나기 시작하는데 새로 어금니가 날 때 마치 첫사랑을 앓듯이 아프다고 하여 사랑니라는 명칭이 붙게 되었습니다. 또한 사리를 분별할 수 있는 지혜가 생기는 시기에 나온다고 하여 지치(智齒)라고도 합니다.”
“왜 진보에게도 보수의 말이 더 잘 들릴까요? 그것은 공동체, 협력, 서로에 대한 책임보다 불안과 위험이 더 직접적으로 다가오기 때문입니다.”
교보문고에서 하태완의 <모든 순간이 너였다>가 종합베스트셀러 1위라 하여 펴들었다. 그리고 이내 닫았다.
“너의 가장 큰 문제점은, 사람을 너무 많이 믿어버리는 것과, 그 사람에게 네 모든 것을 보여주는 것과, 그 사람의 사소한 행동에도 흔들리는 것과, 너를 희생하면서까지 그 사람의 잘못을 억지로 감싸주고, 네가 아파하면서까지 그 사람을 놓지 못하는 것이다.”
“영적 폭행을 정의하면 ‘인간의 내면을 다치게 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지 못하게 하는 폭행’ 혹은 ‘강자가 약자에게 영적인 능력을 약화시키거나 해롭게 하는 결과를 낳게 하는 파괴적인 행위’다. 영적 능력이나 권위를 가진 사람이 영적인 능력을 필요로 하는 이에게 가하는 폭행이다. 영적 지도자가 특정한 목적을 위해 죄책감이나 압력을 통해서 복종케 하거나 조종하는 것을 말한다. 영적 폭행과 성폭행의 유사점은 피해자가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일방적인 강요로 죄책감에 사로잡히며 심한 후유증을 앓는다는 점이다. 의도적이지 않더라도 인도자가 각자의 믿음의 분량 이상으로 짐을 지울 때 일어나는 일이다.”
_ 최호진, <영혼의 밤>, 홍성사, 2016.
65. 네덜란드의 위대한 신학자 헤르만 바빙크는 삼위일체 교리야말로 전체 기독교의 “뿌리”이자 “심장”이라 고백했다. 한편, 동방 정교회의 존경받는 신학자인 다마스쿠스의 요한(675~750) 이후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의 관계는 “페리코레시스”라는 용어로 설명되어 왔다. 명사 페리코레시스는 “회오리”(돌개바람) 혹은 “회전”(빙빙 돌기)을 의미하며, 동사 “페리코레오”는 “빙빙 돌다”, “빙빙 돌며 춤추다”, “순환하다”, “껴안다”, “포용하다”의 의미를 지닌다. 성부, 성자, 성령은 각기 구별되는 위격적 존재인 동시에 서로 간에 페리코레시스적 순환을 통해 상호 침투, 내주, 환대를 행하신다. 즉 “삼위일체의 세 위격들은 서로 안에 ‘내주하고’ 서로에게 ‘침투하며’ 서로를 ‘둘러싸고’ 참으로 아름다운 신적인 춤 속에서 하나를 이룬다.” 요한복음의 저자는 이를 다음과 같이 아름답게 묘사한다.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같이”(요17:21)
83. “사랑하는 나의 아이야. 너는 지금 최선을 다하고 있지 않단다. 왜 너는 아빠에게 그 짐을 옆으로 옮겨달라고 부탁하지 않는 거니?” 그렇다. 그 아이가 할 수 있는 최선이란 다름 아닌 자신의 아빠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것이어야만 했던 것이다. 곧 자녀의 최선은 부모에게 부탁하는 것이다. 이처럼 기도란 피조물인 우리가 창조주이시자 우리의 어머니 같은 아버지, 아버지 같은 어머니이신 하나님으로부터 무한한 지혜와 능력을 마음껏 빌려다 쓸 수 있는 권리를 부여받은 것을 의미한다.
90~91. ”간청함”으로 번역된 그리스어 “아나이데이아”(anaideia)의 뜻은 무엇인가? 전통적으로 이 단어의 뜻은 “끈질긴” 혹은 “용기 있는” 등으로 이해되었다. 이것이야말로 빵을 구하기 위해 이웃집 문을 두들긴 사람이 가지고 있는 위대한 덕목이었다. 그는 용기를 내어 이웃집을 찾아가 끈질기게 빵을 구했고 그 결과 한밤중에 찾아온 손님에게 줄 수 있는 빵을 구했다. 그러나 현대의 해석자들은 이 단어의 뜻을 달리 이해한다. 그리스어 “아나이데이아”(anaideia)는 부정하다, 무효로 하다란 뜻을 가진 접두어 “안”(an)과 “수치”를 의미하는 “아이데이아”(aideia) 혹은 형용사 형태인 “아이도스”(aidos)가 합쳐진 것이다. 따라서 “안-아이데이아” 곧 “아나이데이아”는 “수치가 없는” 또는 “수치를 당하지 않는”의 의미를 지닌다. 바꿔 말하면, “명예로운”이란 뜻이다. 중동 문화에서 사람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 중 하나가 수치를 당하는 것이다. 중동 사람들은 수치를 당하는 것을 죽음보다 더 못 견뎌한다. 그들은 자신이 명예로운 사람으로 알려지길 원한다. 한밤중에 찾아온 손님을 위해 이웃집 사람이 찾아와 빵을 요구하는데 이를 거절하는 것은 명예롭지 못한 일이다. 그것은 본인뿐 아니라 마을 전체에 수치가 되는 일이었다. 그래서 잠자리에 들었던 이웃집 사람은 자신과 명예를 지키기 위해 곤하게 누워 있던 자리에서 일어나 빵을 구하러 온 사람의 요구를 기꺼이 들어준다. 그는 명예로운 사람이었던 것이다. 먼 여행길에 찾아온 친구를 위하여 빵을 구하러 온 사람이 비록 한밤중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빵을 구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취한 행동의 절실함이나 그와 이웃 사이의 개인적 친소관계 때문이 아니라, 빵을 건네준 사람의 명예로운 인격 곧 신실한 성품 때문이다.
105. 성경에서 믿음의 기능은 믿는 자와 믿음의 대상을 하나로 연합시키는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어에서 “믿는다”를 뜻하는 동사 “피스튜오”는 본래 전치사를 동반하지 않는 단어임에도 불구하고 신약성경에 항상 전치사 “엔”(en)과 같이 나타난다. 영어 성경에서 믿는다를 의미하는 동사 believe가 항상 전치사 in과 같이 다니는 이유가 여기 있다(본래 believe는 전치사 없이 사용되는 동사임). 곧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과 연합하여 그분 “안에” 머물고 있다는 의미가 된다. 이렇듯 예수님에 대한 믿음은 우리와 그분을 하나로 연합시킨다. 그 결과, 예수 그리스도가 나의 자리에 오셔서 대신 형벌을 받으신 것처럼, 또한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자리에 서서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 함을 받는다(루터는 이를 가리켜 “즐거운 교환”이라 불렀다). 따라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죄를 용서받고 의롭다 함을 얻어 하나님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
126~127. 어린 시절, 집에서 할머니가 소위 영서라고 해서 집에 찾아온 사람들의 방언을 요상하게 생긴 글로 받아 적어 통변해주는 것을 자주 보긴 했지만 내가 직접 육성으로 통변을 받아보기는 처음이었다. 그날, 그곳에서 나는 난생처음으로 방언통변을 받으면서 너무나 당황했다. 사모님의 통변 내용이, 역시 내가 예상하거나 기대했던 것과 너무 달랐기 때문이었다. 여기서 그날 받은 방언통변 내용을 모두 소개할 수는 없다. (당시 통변 내용은 녹음이 되어 있으며 약 10분간 진행되었다.) 다만 대략적인 골자를 소개한다면 다음과 같다. “하나님께서 한국의 중장년 세대가 아닌 젊은 세대, 특히 10대들에게 관심이 많으시다. … 하나님께서 한국의 청소년들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경건하고, 사회정의에 힘쓰는 세대가 되길 원하시며 그 일을 인도할 수 있는 사람을 찾고 계신다. … 하나님께서 한국교회와 한국교회 지도자들이 한국의 젊은 세대가 죄 가운데 방황하고 고통당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영혼을 불쌍히 여기지 않고 그들을 위해서 아무런 일도 하지 않는 것에 대해서 슬퍼하신다. … 하나님께서 한국의 새로운 세대를 준비시켜 새로운 역사를 일으키실 것이다.”
153. 성경은 두려움이 가장 큰 죄라고 가르친다. 성경에서 가장 빈번하게 언급되는 계명은 “두려워하지 말라”다. 우리는 성경이 간음이나 폭력이나 도둑질이나 욕설이나 사기와 같은 죄를 가장 많이 언급할 것 같이 생각하지만 실제로 성경이 가장 엄중하게 요구하는 계명은 두려움을 버리라는 것이다. 우리는 왜 인생을 살면서 두려워하는가?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지 못하고 있다는 말과도 일맥상통한다. 진정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 그래서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어떤 상황에서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하지만 반대의 경우에 나타나는 가장 현저한 증상은 작은 일에도 큰 두려움을 느끼는 것이다. …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으리라”(요일 4:18).
171~172. 자신이 신학교에 입학해서 본격적으로 성경을 공부해보니, 이전에 토요일마다 성령께서 불러주시던 설교문에 틀린 부분이 굉장히 많다는 것을 깨달았단다. N 전도사는 이 말을 하면서 쑥스럽게 웃었다. 사실, 이런 현상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 성령의 은사란 것이 초역사적인 것이 아니라 구체적 시공간 안에서 몸의 경험을 입고 살아가는 인간 존재를 통과하여, 그 몸의 특질을 지니고 현시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N 전도사의 경우 비록 영문학 분야에서는 상당한 전문지식을 쌓았을지라도, 신학 분야에서는 교회 현장에서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전통적이고 대중적인 가르침 이상의 지식이 없었기 때문에 비록 성령께서 불러주시는 설교문이라 할지라도 그 안에는 인간의 오류와 오해 - N 전도사가 갖고 있던 오해와 편견 - 가 담길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194~196. 용서와 관련하여 한 가지 더 살펴볼 말씀이 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2:3에서 이렇게 말한다. “내가 너희에게 알리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고 하지 아니하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중략) 브루스 윈터는 고대 지중해 세계에서 사용된 anathema X 형태와 비슷한 의미를 지닌 문구들을 살핀 후, 이런 문구들의 경우, 저주하는 자가 부르는 신이 능동 주어이며, 저주하는 자는 이 신더러 자신이 지목하는 자에게 저주를 내려달라고 요청하는 의미라고 지적했다. 이 저주들을 사용한 정황은 주로 운동경기, 사랑, 상업, 소송 같은 것인데, 어떤 식으로든 상대방을 무력하게 만들어 저주를 요청한 사람이 적절한 성공을 거두고 승리자가 될 수 있게 해달라는 것이 핵심이다. 이런 주장에 따르면, 구문상 “예수”가 주어이고 “저주”가 목적어이며, “내리다/선언하다/행하다”라는 동사가 숨어 있다는 결론이 나온다. 그렇다면 anathema Iesous는 “예수가 저주를 내려주시길”이란 뜻이 된다. 쉽게 말해,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의 지위와 능력을 이용하여 다른 사람을 저주하는 기도나 말을 해서는 안 된다. 그럼에도 얼마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개인적 감정이나 복수심에 불타, 대적기도 혹은 결박기도란 미명하에 자기와 원한관계에 있는 사람에게 예수님께서 저주를 내리시길 위해 기도하고 있는가? (겉으로는 영적 싸움을 빙자해서 실제로는 육적 싸움을 벌이는 일이 얼마나 많은가?!) 하지만 바울은 이런 기도는 성령을 받은 그리스도인이라면 결단코 해서는 안 되는 일이라고 못 박고 있다. 오히려 예수님을 자신의 참된 주님으로 고백하는 성령의 사람이라면, 주님 되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세상의 구원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내어주시고 또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들까지도 조건없이 용서해주신 것처럼, 주님의 모범을 따라 같은 길을 걸어야 한다. 그것이 성령을 받은 증거다. 따라서 우리의 기도가 진정으로 성령의 통치 아래 행해지고 있다면 거기에는 용서가 빠질 수 없다.
276. 나는 개인적으로 2013년에 각종 방언통변과 예언 및 환상을 통해서 하나님의 성령께서 수십 번 반복해서 확증하신 대로, 장차 이 나라의 젊은 세대들 가운데 남북의 화해와 연합을 위해 힘쓸 하나님의 뒤한 일꾼들이 등정할 것이라 믿는다.
308.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는 우리의 존재와 삶이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 속에 있을 때 정상적으로 작동한다. 삶과 윤리가 빠진 기도는 미신이요 주문일 뿐이다. 바꿔 말하면, 우리가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유지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기도가 무용지물이란 뜻이다. 따라서 기도응답을 방해하는 것에는,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파괴하는 일체의 것이 다 포함된다. 곧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의 교만한 마음과 삶의 태도,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지 못하는 것, 정욕 및 탐욕의 노예가 되어 사는 것, 다른 사람을 미워하고 해코지하는 것, 음란한 삶 등이 모두 포함된다. 우리가 성령을 거슬러 살며 이런 행실을 청산하지 못할 때 우리가 드리는 기도는 하나님께 상달되지 못한다. 특별히 우리가 열심히 기도를 해도 응답이 지연되는 가장 큰 원인 중 하나가 “혈기”에 있다는 점을 말하고 싶다. 야고보서 저자는 “사람이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함이라”라고 했다(약 1:20).
335~336. 교회사에 등장했던 위대한 믿음의 사람들은 한결같이 기도의 사람이었다. 하나님의 손에 붙들려 쓰임 받은 사람들 중 기도를 게을리했던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다. 찰스 시므온은 새벽 4시부터 아침 8시까지 네 시간을 기도했다. 존 플레처는 종종 온 밤을 지새워 기도했으며 항시 간절하게 기도했다. 그는 “자기 방의 벽을 기도의 숨결로 얼룩지게 했다.” 조셉 얼라인은 매일 아침 8시까지 기도하기 위해 새벽 4시에 일어났다. 그는 자기가 일어나기도 전에 신문배달부가 신문을 돌리는 소리를 들으면 “아, 부끄러운지고! 내 주께서 저 사람의 정성보다 못한 대접을 받으시다니!”라고 외치며 탄식하곤 했다. 페이슨은 하도 오랫동안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바람에 그가 엎드려 기도하던 마루에 홈이 파일 정도였다. 종교개혁가 루터는 이렇게 말했다. “매일 아침 두 시간을 기도하지 못하면 그날은 마귀가 승리한다. 나는 일이 너무 많아 매일 세 시간씩 기도하지 않고는 배겨날 수 없다.” 존 웨슬리는 매일 새벽 4시에 기도를 시작했다. 웨슬리의 전기 작가는 이렇게 썼다. “웨슬리는 기도를 다른 어떤 일보다도 중요하게 생각했다. 웨슬리가 기도를 마친 후 얼굴에 광채가 나는 것처럼 평온한 얼굴을 하고서 골방에서 나오는 것을 보았다.” (중략) 다음과 같은 아도니람 저드슨(미국 최초의 선교사, 버마에서 사역)의 말을 새겨들을 필요가 있다. “할 수 있는 대로 일을 잘 조정해서 매일 여유있게 두세 시간을 하나님께 기도하고 하나님과 교제하기 위해서 그렇게 하라. 단순히 경건의 연습을 위해서만이 아니라 은밀히 하나님께 기도하고 하나님과 교제하기 위해서 그렇게 하라. 이따금씩 어떤 날은 일과 회사에서 손을 떼고 한적한 곳에 가서 영혼을 들어 하나님께 바치도록 하라. 한밤중에 일어나 밤의 고요와 어둠 가운데서 이 신성한 일에 시간을 냄으로써 하루를 시작하라. 동트기 시작하는 시간에도 이 신성한 일을 하라. 오전 9시, 12시, 오후 3시, 6시, 밤 9시에도 그같이 하라. 굳게 결심하고 밀고 나가라. 이 기도생활을 유지하기 위해서 실제로 할 수 있는 것들은 모두 희생하도록 하라. 시간이 짧다는 것을 생각하고, 일과 회사에 휘둘려 당신의 하나님을 빼앗기지 않도록 하라.
_ 김요한, <지렁이의 기도>, 새물결플러스, 20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