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chive for May 25th, 2018
“문제는 그때까지 ‘내신 부풀리기’나 ‘특목·자사고 유리’ 문제를 해결할 방안을 찾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교육부는 2011년 이후 아직도 마땅한 방법을 찾지 못했습니다.”
“각종 인물사전에 소개되어 있는 인촌의 이력은 화려하다. 1891년 전북 고창에서 태어나 일제강점기와 해방 그리고 한국전쟁을 전후한 공간을 살면서 3.1운동에 참여하고, 동아일보와 고려대학교라는 지금도 내로라하는 굴지의 언론과 대학교를 설립하거나 중흥시켰고, 경성방직을 세워 일제하 민족자본의 축적을 도모했으며, 해방 후에는 정계에 투신하여 신탁통치반대운동을 지도하고 한국민주당과 민주국민당 등의 창당을 주도하여 부통령에까지 올랐다가 이승만의 재집권 책략에 항거하여 그 직을 사임하였다. 이런 삶은 당대인들에게 인정받아 1955년 작고하자 국민장으로 장례가 치러졌으며, 1962년에는 건국공로훈장도 추서 받았다. 누가 보더라도 선이 굵은 생을 살았던 그의 이런 삶이 근래 심하게 요동치고 있다. 일제 말기 행한 친일 행적 때문이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실려 있는 관련 내용을 간추리면 이렇다. 1937년 중일전쟁의 정당성을 선전하는 경성방송국 라디오 시국강좌를 맡았고, 국방헌금 1,000원을 헌납했으며, 강원도의 춘천과 철원 등지를 돌며 일제에 동조하는 시국 강연을 했다. 다음 해인 1938년에는 국민정신총동원연맹 발기인으로 참여하여 이사가 된 후 활동을 펼쳤고, 1939년에는 경성부에 있는 중학교 이상 학교장 자격으로 같은 단체의 참사를 맡았다. 이어 1941년에는 국민총력조선연맹의 이사 및 평의원에 선임되었고 흥아보국단 준비위원회 위원 및 경기도위원과 조선임전보국단 발기인 등으로 참여하였다. 그러면서 한편으로 조선의 젊은이들을 상대로 일제의 징병 참여를 독려하는 글을 조선총독부 기관지격인 〈매일신보〉에 여러 번 실었고, 학도지원병 입소식에 직접 참가하여 축사도 하였다.”
“그의 친일 행적이 시대적 질곡을 헤쳐 나가기 위한 차선의 선택이었는지 아니면 자발적 부역이었는지는 궁극적으로 그만이 아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