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물 속에 사는 하마는 자기 배가 가득 차면 그 많은 물을 두고도 더 이상 마시지 않듯이, 정글의 왕인 사자도 배가 부르면 더 이상 사냥을 하지 않듯이, 우리도 자신이 가진 것에 대해 만족할 줄 알아야 합니다. 족함을 아는 것이 부자입니다.”(지성스님의 <知足> 전문)
2. 衆生이 머물고 있는 체제에 대한 無知(참고: 자본주의의 지정학). 윤리란 각성만으로 전환될 수 없다.
1. “물 속에 사는 하마는 자기 배가 가득 차면 그 많은 물을 두고도 더 이상 마시지 않듯이, 정글의 왕인 사자도 배가 부르면 더 이상 사냥을 하지 않듯이, 우리도 자신이 가진 것에 대해 만족할 줄 알아야 합니다. 족함을 아는 것이 부자입니다.”(지성스님의 <知足> 전문)
2. 衆生이 머물고 있는 체제에 대한 無知(참고: 자본주의의 지정학). 윤리란 각성만으로 전환될 수 없다.
0. 나의 주장: ‘반동적인 영향력의 작용과 수용’의 비합리성 사이에는 양자를 인과관계로 매개하는 학습기제가 배태되어 있다.
1. 논지 전개를 일별하면 다음과 같다: 구조적인 빈곤, 공적 연대, 사적 유대, 개인, 재테크, 최고경영자, 기업사회, 윤리변형, 비판적 지지.(cf. ‘기업사회의 전조’와 ‘강자와의 동일시’의 배치 조정)
2. 욕망의 정의를 묻는 것이 아니다. 관건은 ‘어떤 욕망인가’이다. 재테크에 열광하고, 최고경영자를 좇는 욕망.
3. 서민이 서민과 연대하지 않고 오히려 적대하는 이유는 품위를 지킬 수 없도록 만드는 다층적 경쟁구조에서 기인한다.
4. 진정한 교육은 “영혼을 변화시키는 힘”이다. 즉, 새로운 전망을 이식시키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전망을 창출하는 것이다.
5. ‘논의’는 쟁점에 대한 문제제기에서 시작하여, 점층적으로 용어정의를 구축해가자.
“폴 새뮤얼슨(1915~2009)은 대공황을 겪으면서 케인스 경제학에 눈을 떴고, 힉스 및 프리드먼과 학문적인 논쟁을 했으며, 모디글리아니와 솔로를 후배 교수로 영입하고, 스티글리츠와 머튼을 제자로 길러냈다. (케인스만 빼고 이들 모두는 노벨 경제학상을 받았다. 물론 새뮤얼슨이 이들 중 제일 처음 받았다.) … 그가 후배 경제학자에게 주는 메시지는 몇 가지로 나름대로 정리해 볼 수 있다. 우선 그는 논의의 엄밀성을 대단히 강조했다. 제약식이 있는 극대화의 충분조건과 관련하여 힉스의 조건이 정밀하지 않음을 논증한 것이 대표적인 예다. 엄밀하지 않은 논의는 정신적인 체조에 불과하며 그런 경제학자는 제대로 된 경주는 하지 않은 운동선수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가 우리에게 주는 보다 중요하고 보편적인 메시지는 지적 호기심에 대한 끊임없는 추구다. 그는 호기심이 미치는 곳이면 어김없이 경제학의 로직을 적용했고 또 그 결과로 수많은 정리와 이론들을 만들어 냈고, 현대 경제학의 아버지라는 칭호를 얻게 됐다. 물론 다방면의 주제에 대해 엄밀성의 조건을 충족하면서 의미 있는 결과를 만들어 내기란 쉽지 않다.”(전성인, 홍익대 경제학과 교수)
Taisei Hōkan: The restoration of Imperial Rule
“사카모토 료마(坂本龍馬, 1835. 1. 3~1867. 11. 15)는 도사번(土佐藩)의 향사 아들로 태어났다. 열네 살 되던 해, 에도(江戶)의 한 도장에서 검술을 익히며 왕정복고와 서양문물을 거부하는 존왕양이(尊王攘夷) 주의자들과 만나기 시작하면서 세상에 눈을 뜨기 시작했다. 검술을 익히고 고향으로 돌아간 료마는 존왕양이를 실천하기 위해 결성된 도사근왕당(土佐勤王黨)에 가담하여 친서양파인 가쓰 가이슈(勝海舟)를 죽이기 위해 다시 에도로 향했다. 그러나 “일본은 외국의 발달한 지식과 기술을 배워야 한다”는 가이슈의 설득에 큰 감동을 받게 됨으로써 그의 제자가 되고, 그의 영향으로 무역의 필요성을 느껴 고베(神戶)에 해운무역회사를 설립했다. 후에 이 해운회사는 해군지원대로 바뀌어 운영되었다. 1866년에는 대립관계에 있던 사쓰마번(薩摩藩)과 조슈번(長州藩)의 동맹을 이끌어내고, 그 이듬해에는 마침내 막부(중앙)와 번(지방)을 통일시켜 천황에게 국가 통치권을 돌려준 역사적인 사건 대정봉환(大政奉還)을 성사시키게 된다. 이 사건으로 일본은 약 675년 동안 지속되었던 봉건시대가 막을 내리고, 메이지유신을 통해 중앙집권적 근대국가로 나아갈 수 있는 도약의 발판을 마련하였다. 하지만 1867년 11월 15일 친구인 나카오카 신타로(中岡愼太郞)와 함께 막부의 한 순찰대에게 습격을 받아 교토에서 33살의 나이로 암살되고 만다. 시골의 하급무사에서 격변의 시기에 시대의 중심으로 들어가 일본을 변화시킨 사카모토 료마. 도쿠가와 이에야스, 오다 노부나가와 함께 일본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인물로 꼽히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