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chive for February, 2010

February 14, 2010: 4:36 am: bluemosesErudition

“교육은 사회의 변화를 추동하는 영향력의 작용과 그것의 수용을 매개하는 기제”이고, 학습은 영향력의 작용과 수용 사이에서 리더십과 팔로워십의 일치를 수반한다. 용례는 다음과 같다: Pedagogy(peda=child, gogy=leading), Andragogy(andro=man, gogy=leading). 교육을 리더십의 측면에서 고찰한 것은 옳았다. 소외를 낳는 외면의 학습과 수술 중 각성을 극복하는 내면의 구축을 감안할 때, 이제 고민은 ‘工夫를 제3의 학습으로 설정하느냐’에 있다. 그것은 學習이 아닐지도 모른다.

: 12:45 am: bluemosesErudition

0. “진리는 대결을 동반한다.” 딴지담임목사 Mishipat의 변증을 발췌, 정리한다.

1. 성경: “성경의 권위를 어디까지 인정하는가 하는 것이 수많은 이단과 사이비를 결정하는 기준이 된다.” “많은 이단들이 … 책 자체를 신성시한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라기 보다는 - 내러티브(설화구조)와 디스커스(강화 혹은 주석)로 구성된 - ‘하나님의 계시에 관한 책’”이다. “bible의 어원인 헬라어 biblos는 문자 그대로 ‘책’”을 뜻한다. “성경 중에서 정경으로 인정된 것과 외경으로 인정된 것의 기준은 다름 아닌 구속사”이다. “성경무오설은 성경을 기록하신 하나님의 뜻과 진리가 변하지 않고 반드시 이루어지며 그분이 계시하신 구속사가 성취된다는 것이지, 그 속에 쓰여진 글자 하나하나가 신적 권위를 지닌다는 것이” 아니다. _ 성경은 복음(Gospel) 즉, 구원의 언약(Old & New testament)을 기록한 책이다. 이것은 숭배의 대상이 아닌 신앙 지침서이다.

2. 헌금: “[자발적] 신앙에 따라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위해 예수님께서 명하신 대로 … 자신의 정당한 노력의 대가를 지출”하는 것이 헌금의 정신이다. 그러나 대개의 헌금이 “외부의 구제나 선한 일에 쓰이는 것은 고사하고 무리하게 올린 교회건물 건축 대출금 갚는데 허덕거리게 된다. 일례로 20억 정도만 대출해서 연 5% 정도의 이자로 원리금을 갚아 나간다고 생각해 보자. 보통 10년이나 20년 상환인데 … 한달에 최소한 수백만원 많게는 수천만원을 갚아 나가려면 온갖 명목의 헌금을 거둘 수 밖에” 없다. ”한국교회가 ‘대형교회=하나님의 축복’ 이라는 말도 안되는 공식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헌금문제 역시 해결될 수” 없다. “교회가 말도 안되는 건축 경쟁을 포기하고 … 천하보다 귀한 생명을 살리고 구제하는데 모든 총력을 기울여야” 한다.  _ 헌금은 ‘하나님을 향한 감사의 고백으로서 전하는 이웃사랑’(Thanks Giving)이다.

3. 교회: 세계 기독교 인구 12억 중에 ”불과 7백만에 불과한 개신교 인구를 가지고 있는 나라에서 세계에서 가장 큰 대형교회의 70%를 차지하고 있는 이 현상은 분명 특별”한 것이다. “대형교회는 - 무슨 일을 하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 그 자체로 이미 잘못된 것”이다. “우선 교회는 ‘무슨 일’을 하기 위한 단체가 아니라 … 성경의 가르침대로 살아가는 곳이다. 여기에 규모는 아무런 존재의의가 없다.” 선교는 사업이 아니다. “전도는 삶을 통한 자연스러운 결과이지 교회의 전략적 목표가 될 수 없다.” “케리그마(선포)의 교회, 그것은 예수님과 사도시대에서 마감”되었다. “이제 교회의 가장 큰 존재의 이유는 디다케(교육)”이다. _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것이며, 교회의 존재이유는 그것을 교육하며 실천하는 것이다.

4. 구원: “예수님이 인간의 구원의 길이 되셨고 누구에게나 그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길이 열렸다는 기쁜 소식이, 예수 안 믿으면 이교도고 사탄이고 죽여야 할 대상으로 [해석하는 악한 교설로] 바뀌었다.” “예수=천국이 아닌 예수=구원”이다. “신구약 성경에서 나타나는 구원은 인간의 내면에 관련된 것이다. 자기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죄의 문제와 이로 인한 고통의 문제에서 건짐을 받는 것을 구원이라고 한다.” 한편 천국, 즉 “복음서에 나타난 하나님의 나라는 … 세상에 실현된 하나님의 나라”이다. “이는 구약의 율법의 정신을 그대로 계승”한다. “성도의 삶은 언제나 하나님을 사랑하고(섬기고) 이웃을 사랑하는(섬기는) 삶”이다. “구원의 길이 분명한 것과 [천국을 구현하는 도정이] 쉬운 것은 엄연히 다른 것”이다. “이땅에 살면서도 하나님 나라의 법칙대로 살면 그 사람은 이미 구원받고 천국(하나님의 나라)에 들어와 있는 것”이다. _ 그리스도인(Christian)은 예수를 따라 성경적 세계관에 의거하여 사는 이들을 지칭하는 용어이다.

5. 직분: “오늘날 목사를 제사장이라고 하는 것은 성경에 대한 완전한 몰이해에서” 비롯된 것이다. ”목사는 … 장로이면서도 - 목사는 [장로들의 모임인] 당회의 일원으로서, 당회장 직을 수행한다 - 특별히 가르치는 일에 특화된” 자이다(엡4:11, 딤전5:17, 딤후2:2). ”원어상 어원(헬 poimen)도 목사와 교사는” 동일하다. ”현재 교회의 직분은 계급”이다. 그러나 ”성경의 세계관, 즉 성경의 사회적 구조는 역피라미드” 형태이다. ”다른 사람들을 섬겨야 하고 존중해야 하며 특히 사회적인 약자들을 더욱 귀하게 대접하고 그들의 필요를 채워줘야” 한다. 그것이 “많은 것을 받은 사람들이 행해야 할 의무이자 … 특권”이며, “하나님께서 물질을 주시는” 이유이다. “현대 개신교회는 모든 권력화되고 제도화된 직제들을 다시 성경대로” 복원해야 한다: ”목사(가르치는 자), 장로(지도하는 자), 권사(권면하고 격려하는 자), 집사(구제와 봉사를 담당하는 자).” _ 교권주의 성행의 1차적 원인은 성경 - 특히, 교리 - 에 대한 신도의 무지에 있다.

February 13, 2010: 5:04 pm: bluemosesErudition

물질만능의 시대, 이 상투적 문구에 진정성이 절절히 배어있다. 가난한 자의 울음 섞인 하소연에 냉담해지는 것은, 그의 부유함이 또 다른 이를 눈물짓게 하리라는 심증 때문이다. 이 시대의 정신은 ‘탐욕’이다.

: 3:17 pm: bluemosesErudition

혼네(本音)와 다테마에(建前)는 막부시대 대중의 생존방식에서 연유한 사회적 행태라 하나, 비단 그들만의 생존방식은 아닌 듯 하다. 나 역시 그러하다.

가정환경에 대한 열등감과 ‘무언가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강박증 그리고 거머쥔 얼마간의 교만함이 어우러져, 패배의식이 감도는 우울한 정서를 못 견뎌하며 의례적으로 상대방을 만족시키고자 하는 호언을 일삼는다. _ 建前

간밤에 꿈을 꿨다. 전장에서 홀로 살아남기 위해 온갖 치졸한 짓을 마다 않는 나를 보았다. 아직도 가야할 길이 아득하다. _ 本音

: 2:36 pm: bluemosesErudition

“홍정욱. 노원병이었죠, 지역구가? 홍정욱이 이겼잖아요, 씨발. 그게 굉장히 상징적인 사건이잖아요. 평생 노동운동하시고 스타 정치인이셨고, 이쪽 진영에서는 유일한 최초의 스타 정치인이셨고, 대중적 인기도 굉장히 높고, 더구나 그쪽이 서민 거주지역이잖아요. … 그런데 홍정욱은 귀족이란 말이죠. 생긴 것도 그렇고, 실제 배경도 그렇고, 공부한 것도 그렇고. … 그런데 걔가 빵 나타났어요. 걔는 순전히 이미지 전쟁에서 이긴 거죠. 걔야말로 스포츠카를 타고 선글라스를 끼고 멋진 양복을 입는 것이 어울리는. 이를테면 아이들이 내가 성공하면 저렇게 되고 싶다는 롤모델에 가까운 친군데, 정반대에 있는 친군데, 맞붙어서 졌어요. 평생 노력해서 쌓은 것과 그 친구가 한 방에 이미지로 쌓은게 졌단 말이죠.”(김어준, <진보의 재탄생: 논객들, 노회찬에게 묻다>, 106쪽)

“평생 노동운동하시고 스타 정치인이셨고, 이쪽 진영에서는 유일한 최초의 스타 정치인이셨고, 대중적 인기도 굉장히 높고 … 평생 노력해서 쌓은 것과 그 친구가 한 방에 이미지로 쌓은게 졌단 말이죠.” (= 나 이렇게 대단한 놈인데, 사람들이 안 알아준다.) 자기연민이 “자만심의 또 다른 표현“이라는 것, 비로소 이해가 되었다. 고맙다, 노회찬과 논객들. 그런데, 非文의 방치는 편집 의도인가?

: 3:21 am: bluemosesErudition

‘긍정의 힘’은 존재하는가? 그렇다면, 어떻게 그것이 가능한가?

: 2:38 am: bluemosesErudition

“하늘에 속한”(고전15:49), “마음의 눈을 밝히사”(엡1:18),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롬8:13)

February 11, 2010: 3:59 am: bluemosesErudition

길을 잃었다고 여겼다. 아니었다. 애초 그런 것은 없었다. 토대를 닦지 않았었다. 기초를 마련하자.

February 8, 2010: 9:10 pm: bluemosesErudition

1-1. 진보좌파 진영은 “서민들이 한나라당을 더 많이 찍는다며, 이들을 ‘존재를 배반한 의식’의 소유자이자 ‘계급배반 투표’를 일삼는 존재로 규정하기까지 했다. 그러면서 한국 정치를 바로 잡으려면 계급배반 투표를 일삼는 이 서민들부터 정신 차려야 한다는 명제가 힘을 발휘해 왔고, 서민의 뜻을 제대로 대변하지 못하는 정치에 대해서는 그만큼의 면죄부가 주어졌다. 그렇다면 한국의 서민들은 정말 ‘존재를 배반한 의식’의 소유자이자, ‘계급배반 투표’를 일삼는 존재인가.”

1-2. “문제는 계급배반 투표가 아니라 투표할 이유 자체를 만들어 주지 못하는 정치에 있는 것이다. 이 점은 특히 가난한 사람들이 투표를 할 경우 선택할 가능성이 높은 정당이 이들을 제대로 대변하지 못하고 있다는 아픈 성찰이 필요한 대목이다.” “아파트가 많고 주택 소유자가 많은 부자 동네는 열심히 투표를 하고 대개 한나라당을 찍는다. 아파트가 적고, 무주택자가 많은 가난한 동네는 투표를 잘 안 하지만 하게 되면 민주당을 찍는다.”

1-3. “셋방 사는 사람들은 2년도 채 살지 못하고 떠나니까 내 동네라는 관념이 생길 수 없고, 따라서 지방선거든 총선이든 지역에서 벌어지는 선거에는 관심이 없다. 하지만 아파트와 자기 집을 가진 사람들이 많은 동네는 아파트 값을 올려줄 것이라고 믿는 후보를 찍기 위해 열심히 투표장에 나오게 된다.” “서울과 경기에 집을 한 채 또는 그 이상 소유하고 있다는 것이 갖는 정치적 의미는 그야말로 엄청나게 중요한 것이다.” 

1-4. “어느 정당이 가장 잘 소통하고 있나? 한나라당이다. 자신을 지지할 가능성이 높은 부자들과 중상층 유권자들을 투표장에 더 잘 불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어느 정당이 가장 지지자를 만족시키지 못하고 있나? 민주당이다. 민주당을 지지할 가능성이 높은 중하층 내지 서민들을 투표장에 불러내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진보 정당들은 어떤가? 아직 정당으로 인정 못 받고 있다. 어느 계층으로부터도 뚜렷한 지지를 받고 있지 못하고 있다. 민주노동당 또는 진보신당은 동네별 특성과 지지율 사이에 뚜렷한 상관관계가 없다. 진보 정당은 자신만의 지역 기반 갖지 못한 채 유동하고 있다.”(손낙구, <대한민국 정치사회 지도: 수도권편>)

 

2-1. 저자 인터뷰: “부자들이나 가난한 사람들이나 모두 계급투표를 한다. 투표를 하지 않는 사람들은 투표를 하지 않음으로써 자신들의 정치적 의사를 표현하는 셈이다. 투표율이 낮은 동네의 정당 지지도를 보면 한나라당 지지율이 상대적으로 낮다. 이게 의미하는 게 뭐겠나. 한나라당은 싫지만 그렇다고 민주당을 찍고 싶지도 않고 자신들을 대변할 정당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가난한 사람들이 왜 한나라당을 지지하는가, 그런 고민도 많았지만 이번 조사 결과 이는 사실과 다른 것으로 나타났다.” “누구나 자신의 이해관계에 따라 투표한다. 이기적인 동기, 그게 바로 현실정치다.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이 쇠락하고 있는 건 이들에게 아무런 동기부여를 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이정환)

2-2. 주요 논평들: 1) 최장집: “이 책은 주거형태, 주택소유를 중심으로 한 한국 사회 자산구조의 변화와 지역적 분포를 전체적으로 알 수 있게 해준다. … [그로 인해] (신자유주의 이후 나타난) 사회경제적 변화가 어떤 투표행태로 연결되는지를 알 수 있게 됐다.” “전체 국민의 55%, 셋방 사는 국민의 80%가 한 집에 5년 이상 살지 못하고, 절반 이상은 최소 2년에 한 번씩 이사를 다닌다. 이것은 한국 사회가 정상적인 사회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인간은 한 장소에서 일정기간 정착해 살면서 공동체도 형성하고 인간관계도 맺는다. 인간의 심미적 정서의 원천이 주거환경이다. 그런데 주거환경이 이렇게 변했으니 한국 사회가 정신적으로 불안정할 수밖에 없다. 이웃은 언제나 타인이다. 정상적인 사회구성이라고 말할 수 없다. 위험한 사회구조다.” 2) 조기숙: “손씨의 자료는 기존 통념으로 인식되던 ‘계급배반’ 투표를 정면으로 뒤집는다. 손씨는 이에 대해 기존 통념의 근거자료는 주로 여론조사이고, 그것은 표본이 1000명 정도이기 때문에 근본적 한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해석했다. 하지만 모집단이 아무리 커도 표본추출만 제대로 이루어진다면 1200명 정도의 표본으로도 여론조사는 충분히 신뢰할 만한 분석결과를 낳는다. 전수조사의 결과가 표본에 의한 연구결과와 통계적으로 달라질 가능성은 오차범위 내에서만 존재한다.” “집합자료에 기반하여 저소득층이 한나라당보다 민주당을 더 찍는다는 주장은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참조

2-3. 관련 촌평들: 1) “오늘 아침 신문에서 제일 재미있게 읽은 기사. ‘계급투표’는 제대로 이루어지고 있었는가에 대한 이야기.” _ chemistryofus 2) “계급의식에 따르는 투표는 제대로 이루어지고 있다고 봅니다. 문제는 그 계급의식이 현실, 혹은 가능성과 전혀 괴리된 환상의 계급의식이란 거죠.” _ breal96 3) “한쪽은 철저히 계급투표를 하고, 다른 편은 지치고 바빠서 투표를 잘 안하거나 자신의 계급에 맞는 정당을 잘 몰라서 흐리멍텅한 투표를 한다는 게 문제 아닐까요?” _ marishin 4) “전 착시가 있다고 봐요. … ‘내 자식도 저렇게 될 수 있다’라는 … 자신들의 이상향(?)에 표를 던지는 것이 아닌가 싶을 때가 많습니다. 철저히 계급 투표하는 자들은 어쩔수 없구요.” _ breal96 5) “저는 그게 ‘계급배반’ 투표라기 보다는 ‘상위계급 지향’ 투표라는 생각이 듭니다. 한국사회 우경화 메커니즘을 분석하는데 아파트만으로 부족하다는 생각도.” _ gaudium … 2/4)에 따르면, 대중의 정체성은 기득권의 멘털리티와 다를 바 없다. 5)는 ‘계급배반’을 ‘상위계급 지향’으로 정정하고, 3)이 제한적 분석이라 촌평하였다. 만약 3)을 고수한다면 - “손낙구의 <<대한민국 정치 사회 지도>>의 분석이 맞다고 치면” - “핵심적인 처방은 ‘토지제도’에 촛점을 맞추어야 하는 건가.” _ gaudium

 

3-1. 경우의 수를 감안하여 상술한 논의를 갈무리하자. ㄱ) ‘계급배반’ 투표가 존재했는가? ㄴ-1) 있었다면, 서민층은 기득권과 정치적 지지가 대동소이한 것으로 간주할 수 있다. ㄴ-2) 없었다면, 대중의 정치적 성향은 뉴타운 건설경기에 조응하여 부동산 자산 소유 여부에 따라 기득권과 서민층으로 양분된 것으로 해석된다. ㄴ-1)과 ㄴ-2) 모두 일리 있는 가설이다. ㄴ-1)은 [총론적 측면에서] 전 국민을 소득 10분위로 구분한 뒤 지지 정당을 일별하면 ‘계급배반’ 현상을 일반화 할 수 있다. ㄴ-2)는 [각론적 측면에서] 동네별 거주민 현황을 고찰하면 - 비록 월소득이 많을지라도 - 주거 지위 내지 부동산 계급에 따른 [탈정치화된] ‘투표성향’을 확인할 수 있다.     

3-2. 논점은 “계급투표 vs. 계급배반”에 있다. 양자 모두 타당성이 있다. 어찌하여 정면으로 상충된 입장이 공존할 수 있는가? 자의적 해석에 의거한 불명료한 부분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로 ‘계급에 대한 정의’이다. 손낙구가 지목하는 계급은 ‘부동산 계급’이다. 수도권 지역에 부동산을 소유하고 있다면 지대가 낮은 지역에 거주할지라도 - 부자가 아닐지라도 - 서민이 아닌 기득권이다. 이러한 관점을 따른다면 ‘계급투표’가 옳다. 반면 지위와 소득을 기준으로 계급을 구분한다면 - 실업자와 비정규직의 수만 감안하더라도 - ‘계급배반’의 주장이 우세하다. 兩是論을 거부하기에 재질문한다. 손낙구의 조사결과에 의하면 “가난한 자는 왜 이명박을 지지하는가”라는 반문이 성립되지 않는가? 다시 말해, 대중은 철저히 자산에 근간하여 투표하였는가? 그렇다면 대중의 ‘우경화’는 담론적 허상이고, 실상은 서민유권자의 지역연계성 약화에 따른 ‘탈정치화’인가?

 

4-1. 부동산에 근거한 손낙구의 계급투표론을 비판한다. 손낙구의 조사결과는 역설적으로 계급투표가 아닌 계급배반을 반증한다. 제17대 대선에서 절대 다수의 서민은 기득권의 대표를 선택하였다. ‘왜 가난한 자는 이명박을 지지하는가’라는 문구가 적시하듯 우경화는 부인할 수 없는 현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손낙구는 지역구를 기반으로 구획된 총선과 지방선거를 사례로 들어 계급투표를 주장하였다. 일견 타당하다. 이 기준에 따르면 강남의 32평형 고급 아파트 세입자인 전문직 고소득자는 서민이고, 강북의 15평형 연립 주택 소유주인 저학력 비정규직 내지 생계형 자영업자는 기득권이다. 뉴타운 개발은 자가 소유주에게 호재이기에 그것을 집단적으로 추진하는 정당에 투표하는 것은 일리가 있다. 다만 한 가지 재고할 점은 ‘재입주율이 저조한 - 그리하여 교외로 밀려나는 - 영세 원주민이 과연 기득권인가’ 하는 것이다. 손낙구는 현실정치는 이권정치라는 가설을 전제한 채 방대한 조사를 실시하였고, 그 결과를 자신의 입론인 계급투표에 따라 배열하였다. 그로 인해 실리적 측면에서 계급투표도, 계급배반도 아닌 “서민층의 기득권 지향”이라는 학술적 의의를 부각시키지 못하였다. 만약 해당사항을 의문시하였더라면, 대중이 치명적인 도덕적 결함에도 불구하고 이명박 후보를 대통령으로 선출하였던 원인을 경제윤리적 차원에서 파악하는데까지 나아갈 수 있었을 것이다.

4-2. 어떻게 이와 같은 사태에 직면하게 된 것인가? 한국사회 우경화 메커니즘은 무엇인가? “사회의 교육에 의거한 대중의 학습은 ‘사회의 교육적 기능’을 강조하는 1차적 학습과 ‘교육의 사회적 기능’에 중점을 둔 2차적 학습으로 이루어진다. 1차적 학습이 ‘사회화’로 지칭되는 구조적 배치에 대한 [소극적] 적응이라면, 2차적 학습은 구조적으로 각인된 성찰적 반응으로서 사회화 속에 설정된 이상적 존재 양식을 추구하는 [적극적] 지향을 내포한다. 1998년부터 2007년까지 전개된 한국사회 우경화 과정을 일별하면 다음과 같은 학습 메커니즘을 확인할 수 있다: ①외환위기 손실의 권위적 배분에 따른 구조적 빈곤의 편중된 사사화(私事化) 속에서 ②김대중 정부의 노동ㆍ복지 정치로 인한 공적 연대의 해체와 ③신용불량 사태에서 파급된 사적 유대의 와해는 대중을 자기 의존적 ‘개인’으로 환원시켰다. ④대중은 각개약진의 생존전략을 억압적으로 채택하였으나, ⑤부동산 가격 폭등 앞에서 자기계발에 의한 자산격차의 만회는 요원한 일이었고, ⑥이로 인해 한국사회에 속한 절대 다수의 대중은 노무현 정부의 금융허브 정책이 견인하였던 재테크 열풍에 편승하게 되었다. ⑦노동하는 주주로서 대중은 기업의 자산가치 증대를 옹호하는 최고경영자와 의사결정을 공유하는 가운데, ⑧동일한 심성구조(mentality)를 내면화함으로써 최고경영자의 관점에서 제 조직을 재편하는 기업사회를 지향하였다. ⑨대중은 기업사회의 가치를 정당화하는 과정에서 이해에 종속된 윤리인 ‘유용한 정의’(practical justice)를 새로운 윤리로 수용하게 되었고, ⑩그 결과 제17대 대선에서 기득권의 심성으로 도덕성 시비를 외면하고 경제적 기대(illusion)에 투표하는 비판적 지지를 단행할 수 있었다.”

 

5. 손낙구의 정리에 의거할 경우, 유동성이 높고 뉴타운 재입주율이 저조한 ‘(재개발이 달갑지 않은) 서민’ 거주지는 파란 색이 아닌 붉은 색을 지지해야 한다. 과연 그러한가? 주지하다시피 2008년 노원(병)의 거주민은 민노당의 ‘노회찬’이 아닌 한나라당 ‘홍정욱’을 선택하였다. 물론 해당 본문 - 저자의 노고 - 을 면밀히 검토해야겠지만, 여기에 통계 분석의 맹점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대중이 지향하는 바, 추구하는 삶을 간과하고 있다. 서민이 정치권에 요구하는 것은 “집을 한 채 또는 그 이상 소유”한 기득권으로의 편입이며, 그것을 가능케 하는 정당이 대중에게는 [인간다운 삶을 보장하는] 진보 정당이다. 따라서 향후의 과제는 ‘대중의 입장 내지 이권을 대변하는 진보 정당의 대두’가 아니라 ‘대중의 심성구조 내지 사회윤리가 어떻게 변형되었는지를 규명하는 메커니즘 연구’일 것이고, 바로 여기에 민중이 ‘아편’을 외면하게 된 사연도 숨어있을 것이다. “사회적 통념과는 달리 부유층의 종교 편향성은 천주교가 가장 심하다. 부동산이 부를 대표하는 ‘부동산 계급사회’ 대한민국에서 부동산과 학력이 나란히 같은 길을 걷는 건 이상할 게 없다. 그러나 종교의 길도 같다는 건 슬픈 일이다. 가난할수록 절대자의 위로도 받지 못하고 있다는 것인데, 왜 가난한 사람들이 종교적 결속이 낮은지, 천주교가 상대적으로 부유한 사람들의 종교가 되고 있는지 본격적인 연구가 필요하다.”

: 6:25 pm: bluemosesErudition

“문제는 오타쿠와 사귀고 싶어하는 일본 여자들이 거의 없다는 것이다. 미팅 자리에서 애니메이션이나 피규어 이야기 꺼내는 순간 장내는 얼어 붙는다. 일본어로 ‘히쿠(引く)’라고 표현하는데 몸과 마음이 순간적으로 강렬하게 뒤로 빠진다는 의미에서 나온 말이다.”(박철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