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소극적] 타인의 인정이 없을지라도, 신앙의 열정이 사그라들지 않는가?
2. [적극적] 타인의 박해가 있을지라도, 신앙의 열정이 사그라들지 않는가?
1. [소극적] 타인의 인정이 없을지라도, 신앙의 열정이 사그라들지 않는가?
2. [적극적] 타인의 박해가 있을지라도, 신앙의 열정이 사그라들지 않는가?
0. M. S. C.: 대상 X에 관한 Multi-dimensional, Structural, Creative Thinking
1. “사물의 외양과 본질이 직접적으로 일치한다면 과학은 모두 불필요할 것이다.”(Marx, K.) “정통 마르크스주의는 마르크스의 연구결과를 무비판적으로 인정하는 것을 뜻하지 않으며, 이러저런 주장에 대한 ‘믿음’이나 어떤 ‘신성한’ 책의 해석을 뜻하지도 않는다. 마르크스주의적 문제에서의 정통성이란 오로지 방법에만 관련된다.”(Lukács, G.) 그렇다면 복잡한 현실을 어떻게 파악할 것인가?
2. Roy Bhaskar에 따르면, 존재는 다층적이다. 진리 혹은 진실을 규명하기 위해서는 외양에서 본질을 향해 육박해 들어간 뒤, 다시 본질에서 현상으로 귀환하는 [즉자대자적] 현상학적 해석학 내지 변증법적 역사 유물론이 요청된다. <자본론>의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3-1. 1차원에서 4차원으로 사유에 대한 사유: f(x) > f(f(x)) > f(f(f(x))) > f(f(f(f(x)))). 자본주의 사회의 인간 소외 > 자본의 생성, 유통, 축적 > 화폐 교환 > 상품 거래.
3-2. 4차원에서 1차원으로 구조적 사유 전개: f(f(f(f(x)))) > f(f(f(x))) > f(f(x)) > f(x). 상품 거래 > 화폐 교환 > 자본의 생성, 유통, 축적 > 자본주의 사회의 인간 소외.
4. 연구가 ‘탐구’와 ‘해설’로 구성된다면, 탐구는 [3-1의] 고차원으로 추상화되며, 그것의 결과를 제시하는 해설은 [3-2의] 저차원으로 구체화된다.
5. 이상의 논의를 확장하면, 우리의 사유를 Habitus(혹은 Desire) > Illusio > Agencement > Paradigm 순으로 층화할 수 있다. 1차원이 습속에 종속된 반응이라면, 2차원은 습속을 당연시하는 상식에 대한 질의이고, 3차원은 상식을 구성하는 체제의 고찰이며, 4차원은 당대의 역사적 조망이다.
Ph. D. Dissertation on SAMSUNG Republic
“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는 것을 지켜보면서 그것을 들여다보는 프리즘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여기서 삼성의 문제를 찾게 되었다. 삼성은 민주주의를 무력화시키고 형식화시키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이 논문은 크게 △서론(1장) △이론적 자원과 기존 연구 검토(2장) △삼성의 국가 및 시민사회 지배 전략(3장) △저항블록의 응전과 ‘대자본 헤게모니와 공존하는 형식적 민주주의 체제’의 형성(4장) △결론(5장) 등 총 5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논문의 3장 “삼성의 국가기구 지배전략과 국가기구 내 기업권력 거점지화”의 일례로 다음을 거론할 수 있을 듯하다. “노무현 전 대통령 취임 전 열린 팀장회의에서 노무현 정부의 명칭에 관한 안건이 올라왔다. ‘참여정부’가 좋겠다고 의논이 모아졌는데, 실제 공식명칭이 됐다.”(146쪽)
1. “천천히 살겠다고 하면서도 / 빠른 세상이 익숙해져있는 나는 / 그의 밤을 사고 있다.” 밤으로 밀려나는 자들을 [본의 아니게, 당연시 하며] 학대하는 낮의 노동자. ‘화이트와 블루’의 대결 구도는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신분 차별을 교두보 삼아 ‘낮과 밤’의 주종 관계로 악화되었다. 이것이 자본가 때문인가?
2. 노동자는 “회사의 윗대가리들이 도적떼나 조폭의 수준을 능가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 회사에 취업하고자 혼신을 다하여 경쟁한다. 노동자의 일상은 노동자에 의해, 노동자를 위하여 생태에 역행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우리가 싸워야 할 대상은 MB 정부, 삼성 공화국 뿐만이 아니다. 궁극적으로는 자본에 영합하는 주체를 변혁해야 한다.
3. “이 글에서 주목할 점은 구조가 아닌 주체에 집중하고 있다는 것이다. 즉, 변화하는 사회 구조 속에서 실질적으로 행동하는 주체인 민중들이 어떤 식으로 반응하는지에 주목한다. 구조의 모순을 이야기하기는 보다 쉬워 보인다. 그러나 구조의 모순에만 그칠 경우에는 해결책도 간단하다. 구조를 바꾸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왜 구조를 바꿀 수 없을까?”
“전교조는 실은 운동조직이 아니라 노동조합이잖아요. 사회가 워낙 보수적이다보니 급진적인 운동조직 노릇을 하는 시절도 있었지만, 노동자가 노동조합에 가입하는 건 당연한 일일 뿐이죠. 진보적인 않은 교사를 전교조에서 내보낼 수도 없고 진보적인 교사만 가려 뽑을 수도 없죠. 그래서도 안 되구요. 전교조 전체를 대상으로 운동성을 되살리려는 시도보다는 전교조는 노동조합으로 두고 진보적인 교사운동조직이 새롭게 만들어지면 좋겠다는 생각입니다.”(김규항) _ 교사를 통한 사회개혁이 요원하였던 까닭은, 전교조의 참교육이 진보적인 ‘이권 홍보’였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