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chive for June 2nd, 2010

June 2, 2010: 9:24 pm: bluemosesErudition

0. “주변 사람들은 모두 알고 있는데 그만이 모르고 있는 상태에서 파멸을 향해 가는 것, 그것은 희극이다.”

1. “헤겔은 어느 부분에선가 세계사에서 막대한 중요성을 지닌 모든 사건과 인물들은 말하자면 두 번 나타난다고 지적하였다. 그러나 그는 한 번은 비극으로, 다음 번은 희극으로 나타난다고 덧붙이는 것을 잊었다. 당똥 대신에 꼬시디에르가, 로베스삐에르 대신에 루이 블랑이, 1793~1795년의 산악당 대신에 1848~1851년의 산악당이, 삼촌 대신에 조카가 나타난다. 그리고 브뤼메르 18일의 재판이 나온 정세에서도 동일한 현상을 볼 수 있다.”

2. “모든 죽은 세대들의 전통은 마치 꿈 속의 악마처럼, 살아 있는 세대들의 머리를 짓누른다. 그리고 살아 있는 세대들이 자기 자신과 사물을 변혁하고 지금껏 존재한 적이 없는 무언가를 만들어 내는 데 몰두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바로 그 때, 바로 그러한 혁명적 위기의 시기에, 그들은 노심초사하며 과거의 망령들을 주문으로 불러내어 자신에게 봉사케 하고, 그들에게서 이름과 전투 구호와 의상을 빌린다. 그리고는 이 유서 깊은 분장과 차용한 대사로 세계사의 새로운 장면을 연출한다.”

3. “하나의 시대착오, 일반적으로 인정된 공리들에 대한 하나의 명백한 모순, 세계 전람회에 출품된 하찮은 구체제인 오늘날의 독일의 체제는 자기 자신을 신뢰한다고 여전히 착각하고 있으며 세상 사람들에게 이와 동일한 착각을 요구하고 있다. … 현대적 구체제는, 그 현실적 주인공들이 죽고 없는 세계 질서의 희극 배우에 지나지 않는다. 역사는 철저하고, 낡은 등장 인물을 무덤으로 보낼 때에 많은 국면들을 통과한다. 세계사적 등장 인물의 최후의 국면은 그것의 희극이다. 아이스킬로스의 묶여 있는 프로메테우스에서 이미 한 번 비극적으로 치명적 부상을 입은 바 있는 그리스의 신들은 루키아노스의 대화편에서 또 한 번 희극적으로 죽어야 했다. 왜 역사의 진행이란 이러한가? 인류로 하여금 자신의 과거와 즐겁게 이별하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우리는 이 즐거운 역사적 사명을 독일의 정치적 세력들에게 요구한다.”

4. 지방선거 하루 전인 어제 오후 대장내시경 검사를 받았다. 앞으로 어찌 살아야 할지 고민하다 ‘임을 위한 행진곡’을 추억하며 <화려한 휴가>를 보았다. 답답한 마음에 일단 <싸움의 법칙>을 숙독해야지 싶었다.

5. “철학이 회색에 회색을 칠한다면, 생의 한 형태는 노후한 것으로 되어 있으며, 회색에 회색으로써는 생이 갱신될 수 없고, 다만 인식될 뿐이다. 미네르바의 올빼미는 어둑어둑한 황혼에야 날개를 편다.” 

6. “1991년에 소련이 현실적으로 붕괴한 후에야 비로소 깨닫게 된 것은, 오히려 소련이라는 존재에 의존하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소련의 붕괴로 구좌익이 치명적인 타격을 받았다고 이야기됩니다. 이제까지 신좌익은 소련이나 구좌익을 비판하면 됐습니다. 즉 신좌익은 소련이나 구좌익에 의존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이 붕괴할 것 같지 않았기 때문에 편안했습니다. 그것을 비판하면, 뭔가 하고 있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눈앞에서 그것이 붕괴하자 더 이상 그런 태도를 취할 수 없었습니다.”

7. “<아사히신문>에서 진정한 공산주의는 현상을 지양하는 운동이기 때문에 소련이 붕괴했다고 해도 전혀 문제될 게 없다”고 하였지만, “점점 깨닫게 된 것은 그 같은 태도로는 해결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부정의 부정’을 계속 해간다고 해도 어떤 이념이 없다면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그처럼 말하는 마르크스에게 실은 공산주의라는 이념이 있었습니다. 그는 억지로 실현하는 것과 같은 설계적인 이념을 부정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공산주의라는 이념을 부정한 것은 아닙니다. 이것을 어떻게 설명하면 좋을지를 나는 칸트에게서 배웠습니다. … 한편 헤겔의 체계는 이념이 최종적으로 실현되고 있기 때문에 구성적 이념과 같습니다. 이런 헤겔을 유물론적으로 해석하고 앞으로 실현되는 것으로서 공산주의를 놓습니다. 이것이 통속적 마르크스주의입니다.” 

8. “철학자들은 세계를 다양하게 해석해왔을 뿐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세계를 변화시키는 것이다.” “인간은 사태와 교육의 산물이며, 그에 따라 변화된 인간은 사태와 변경된 교육의 산물이라는 유물론적 학설은 사태가 바로 인간에 의해 변화된다는 것과 교육자 자신도 교육되어야만 한다는 것을 잊고 있다. 그런 까닭에 그 학설은 사회를 두 부분으로 나누게 되는 데, 그 중 하나는 사회를 넘어서 있다(예를 들면 로버트 오웬의 경우). 사태의 변경과 인간 활동의 변경의 일치는 변혁적 실천으로만 파악될 수 있고 합리적으로 이해될 수 있다.” 

9. “나는 원래 체계를 싫어하며 체계를 만들려고 한 적도 없습니다. 그러나 사회구성체를 교환양식의 상호부조적 접합으로서 보게 되자 체계적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실제 이것을 생각하기 시작했을 때, 나는 헤겔의 작업을 다시 생각했습니다. <법철학 강의>를 말입니다. 헤겔의 변증법적 체계는 자본주의 경제에서 시작하여 국가, 네이션에 의해 통합되어 가는 순서로 되어 있습니다. … 헤겔은 관념론적이고, 또 네이션을 최상위에 두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네이션, 국가, 자본의 상호의존적 관계를 파악하고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내가 자본=네이션=국가를 교환양식의 결합체로 생각하게 되었을 때, 그것이 어떤 의미에서 헤겔과 가까워지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또 헤겔 비판을 다시 한 번 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 12:13 am: bluemosesErudition

“이 어려운 시기에 …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공동체 구성원 모두가 머리를 맞대고 고민했어야 했다. 그런데 경영진이 택한 것은 가장 손쉬운 길, 효율성에 기댄 일방적인 구조조정이었다. 그 순간 우리가 그동안 우리교육을 통해 ‘사람은 이렇게 살아야한다’고 주장하였던 모든 내용은 우리교육 스스로에 의해 부정당했다. (중략) 우리는 우리 사회 곳곳에서 진보와 가치의 이름으로 퇴행이 판치는 것을 아프게 목격하고 있다. 우리 사회에서의 퇴행은 수구보수들의 공격에 의해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우리 내부에서부터 무너지고 있다. 특히 최근 출판계에서는 가장 신자유주의적인 방식으로 진보의 담론이 소개되고 소비된다. 성찰의 언어가 소비의 아이템으로 전락하고 있으며 가슴 아프게도 진보 매체와 출판계가 여기에 편승하고 있다. 우리는 우리교육 사태가 바로 이런 퇴행의 한가운데에서 일어난 가장 상징적인 사건이라고 주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