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위 하나님의 연합에 참예하는] ‘성화’에 부합하는 공동체의 명칭은 ‘교회’이다. “교회론”을 참고할 것.
[삼위 하나님의 연합에 참예하는] ‘성화’에 부합하는 공동체의 명칭은 ‘교회’이다. “교회론”을 참고할 것.
업무 중에 유난히 투덜거림이 늘었던 까닭 중 하나는, 밥상머리에서 불평불만하는 그네들의 풍경 때문이었다. 체화는 햇빛에 노출된 피부와 같다. 무심코 있으면 검게 탄다.
일은 행복을 부차적인 것으로 만든다. 본말전도를 지적한 파킨슨의 법칙이 탁월하게 반영된 영단어는 “바쁨”(business)이다.
* “In Swedish, the word for business is ‘narings liv’, literally, nourishment for life.”
“1954년 경남 마산 출생으로 서울대 불문과를 나와 같은 학교 대학원에서 알베르 카뮈 연구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현재 울산대 불문과에 재직하고 있으며, 옮긴책으로 <폭력과 성스러움> <희생양> <까뮈1, 2> 등이 있다.”
0. EBS 공사 창립 10주년 다큐프라임 <이야기의 힘> 3부작(PD 이연규) _ 질적 혹은 문헌연구가 존립할 수 있는 이유는 내러티브에 있다.
1. <시학>에 따르면, 뜬금 없는 기계장치인 ‘데우스 엑스 마키나’(Deux ex Machina)는 관객과 소통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이야기 밖에 있기 때문이다. 내적 정합성이 충족되지 않는다면 작품은 관객을 흡입할 수 없다.
2. <메카로 가는 길>의 객석은 왜 둔감한가. ‘무너진 일상의 균형을 회복하려는 욕망의 분투 과정’(Robert Mckee)이 이야기라면, “미시와 거시, 서정성과 사회성이 조우하는 일상의 역사를 극적으로dramatic 재현할 때, 관객은 개인의 고민과 시대의 고민을 별개의 것을 분리하지 않는다. 의식화, 다시 말해 동기부여란 이런 것이다.”
3. 부당한 고통에 관객은 연민을 느끼고, 그러한 사태가 자신과 무관하지 않다고 판단할 때 대중은 공포를 경험한다. 이 지점에서 허구와 현실의 경계는 무너진다(참고: 스웨덴 공영방송 SVT 2008년작, 인터랙티브 드라마 <마리카에 관한 진실>). 각성된 무능의 애절함이 증폭된 상태에서 무엇이 카타르시스를 선사하는가.
4. 르네 지라르의 “욕망의 삼각형”은 주체-중개자-대상으로 구성된다. 주체에게 중개자는 대상에 이르는 도약의 발판이다. 중개자란 인간 혹은 비인간 행위자이고, 이(것)들과 - 파종과 수확의 복선을 통해 - 관계를 형성해 나가는 맥락이 또한 이야기일테니, 역경을 극복하며 팔로워십을 구축해나가는 과정이 카타르시스의 통로라 할 수 있다.
5. 팔로워십이 ‘마음을 하나로 엮는 공동의 끈’인 것을 유념한다면, 공감의 뿌리는 어디에 있는가. <미러링 피플(Mirroring People: The New Science of How We Connect With Others)>의 저자 마르코 야코보니에 의하면 거울뉴런(Mirror Neurons)은 “남의 행동을 보는 것만으로도 자신이 그 행동을 할 때와 똑같이 반응하는 신경세포”로서 “영화 속에서 연인들이 키스를 하면, 그들의 머릿속에서 그렇듯, 우리들의 뇌에서는 똑같은 거울뉴런이 흥분한다.” 만약 “거울뉴런이 없다면, 사람들 사이의 공감이란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 “인간은 거울뉴런을 통해 상대의 마음을 자동적으로 모사하며, 더 나아가 공감하게 된다.”
* ‘실천’(Praxis)하는 ‘공동체’(Community)에 변혁의 길이 있다.
“모든 것이 이야기 안에서 해결되어야만 관객을 몰입시킬 수 있다. 이것이 3천년 간 변하지 않는 극의 원리이다.” 임석진의 <정신현상학> 번역이 신통치 않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는 기계장치의 신(Deux ex Machina)으로 주역, 도덕경, 장자, 화쟁사상 등을 각주로 수백 차례 호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