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입사하자마자 조감독으로서 제일 처음 맡은 일 때문에 바로 그만두기로 결심했다. ··· 선배 조감독들이 그만두겠다는 나를 열심히 만류하면서, 작품도 이런 작품만 있는 게 아니고 감독도 이런 감독만 있는 게 아니라며 달래주었다. 결국 나는 두 번째 일부터 야마모토 가지로 감독이 이끄는 팀에 들어가게 됐고, 거기서 선배들이 말한 대로 작품도 감독도 가지가지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 나는 카메라 옆의 감독 의자에 앉아 있는 야마 상 뒤에 서서 ‘드디어 여기까지 왔구나’ 하는 감회로 가슴이 벅차올랐다. 야마 상이 지금 하고 있는 일, 그것이야말로 내가 정말 하고 싶은 일이었다.”(167쪽)
“내가 편집에 대해 야마 상에게서 배운 것은 이루 다 헤아릴 수가 없다.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편집을 할 때는 자신의 일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하다는 점이다. 야마 상은 고생해서 찍은 자신의 필름을 마치 가학증 환자처럼 잘랐다. ··· ‘저렇게 자를 거면 뭐하러 찍었지?’ 하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 나도 같이 고생한 필름이니까 잘리는 건 가슴 아팠다. 하지만 감독이 고생을 하건 조감독이 고생을 하건, 아니면 카메라맨이나 조명 담당이 고생을 하건, 그런 일은 관객이 알 바 아니다. 중요한 건 군더더기 없이 충실한 영화를 보여주는 것이다.”(187쪽)
“야마 상은 배우들을 정중하게 대했다. 나는 가끔 엑스트라의 이름을 잊어버려서, 그들이 입고 있는 옷 색깔로 부르곤 했다. “거기 빨간 아이”, “잠깐, 거기 파란 양복” 그러던 어느 날 야마 상에게 지적을 받았다. “구로사와 군, 그러면 안 돼. 사람에게는 이름이란 게 있다네.” 물론 나도 그 정도는 알지만 워낙 바쁘니까 이름을 알아볼 여유가 없을 뿐이었다. 하지만 야마 상은 지시를 내리고 싶은 배우가 있으면 그 사람이 엑스트라라도 “구로사와 군, 저 사람한테 가서 이름 좀 알아봐주게”라고 했다. 내가 그 사람의 이름을 야마 상에게 알려주면, 야마 상은 그때서야 그 엑스트라에게 지시를 내렸다. “OO씨, 두세 걸음 왼쪽으로 가주세요.” 자기 이름이 불린 무명 배우는 몸 둘 바를 모른 채 감격했다.”(190쪽)
* 구로사와 아키라(지음), 김경남(옮김), «자서전 비슷한 것», 모비딕, 20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