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chive for August 14th, 2014

August 14, 2014: 11:52 pm: bluemosesErudition

“1870년대 후반에 탄저병은 프랑스 전역에서 수많은 가축, 축산농민, 수의사, 위생학자를 괴롭히던 치명적인 전염병이었다. 이 병은 지역별로 숱한 변이를 보였기 때문에 세균과 같은 단일한 원인과는 무관한 것으로 보였고 따라서 실험실 과학과는 연관이 없다고 흔히 믿었다. 그러나 파스퇴르는 탄저병이 발생한 농장에 임시 실험실을 차려 농민과 수의사에게 정보를 얻고 이를 자신의 실험과학 언어로 번역하였다. 그리고 농장에서 채취한 탄저균을 파리의 실험실로 가져와 본격적으로 분리 배양하는 실험에 착수하였다. 그는 이미 약화된 닭콜레라 배양균이 백신의 역할을 한다는 점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비슷한 방식으로 만든 탄저균 백신을 동물에게 주사하여 병독성의 다양한 변이를 실험실에서 모방하고 통제할 수 있게 되었다. 마침내 1881년 파스퇴르는 농업협회의 후원으로 푸이 르포르 마을의 농장에서 많은 사람들과 언론이 지켜보는 가운데 탄저병 백신의 공개 시연을 열었고 결과는 파스퇴르가 예상했던 대로 대성공이었다. 푸이 르포르의 야외 실험이 성공했던 것은 사람들에겐 기적처럼 보였지만 사실은 실험실과 동일한 조건(소독·청결·보존·주사 동작·타이밍·기록 등)을 단순히 농장으로 확장시킨 덕분이었다. 이 실험 이후 탄저병을 해결하고자 하는 모든 집단들에게 다음과 같은 확신이 생겨났다. ‘만일 당신의 가축들을 탄저병으로부터 구하고 싶다면 파리에 있는 파스퇴르의 실험실에 백신 플라스크를 주문하라.’ 이에 따라 탄저병 백신이 공급되는 상업적 회로 비슷한 것이 파스퇴르 실험실에서 프랑스 전역으로 확산되었고 정부의 통계기구는 탄저병의 전국적 감소를 도표로 기록했다. 이 사례 연구는 파스퇴르의 위대함을 찬양하려는 것이 아니라, 과학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많은 이질적인 행위자들(탄저균·가축·농민·수의사·위생학자·언론·정부 등)이 과학자의 실험실과 연결되고 이를 통해 구축된 공고한 이해관계의 동맹이 있어야 한다는 점을 보여주려는 것이었다. 그리고 탄저병 백신을 둘러싼 이 행위자-연결망이 구축되기 전과 후의 프랑스 사회는 상당히 다르기 때문에 사회 역시 연결망 구축의 원인이 아닌 결과라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이다.”

: 11:35 pm: bluemosesErudition

“파리는 중세 도시의 모습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좁은 길들이 미로같이 얽혀 있어서 파리 시민들은 만성적인 교통 체증에 시달렸고 루브르궁과 같은 역사적 건물들은 무질서하게 건축된 허름한 건물들에 포위되어 그 위용을 나타내지 못했다. 상수도와 하수도 체계의 부재와 녹지 부재는 생활 상의 불편이었을 뿐만 아니라 전염병 창궐과 같은 심각한 위생 문제를 야기했다. … 런던에서 젊은 시절을 보냈던 나폴레옹 3세는 예전부터 파리의 재건설을 생각해왔고 황제의 자리에 오르자마자 새로운 파리 건설에 착수했다. 그는 1853년 파리 지사 자리에 오스망 남작(Baron Haussmann)을 임명하고 파리의 도시 구조 개혁을 명하였다.”

: 11:16 pm: bluemosesErudition

“로스트로포비치의 경우 종래의 관념을 뒤엎는 연주로 유명했다. 실험적이고 개성적인 연주에 높은 점수를 줄 것 같은데 어떤가?”

“실험적인 연주란 없다. 양심적인 연주자라면 무대 위에서 감히 실험을 하지 않는다. 실험이란 표현 자체가 연습실에서 땀 흘리면서 오랜시간 고민한 연주자의 노력을 축소시키는 것이다. 개성은 오랜 고민과 재능에서 나오는 결과물이다. 연주의 진정성과 완벽함은 어느 무대에서든 드러날 수밖에 없다.”(장한나)

: 11:08 pm: bluemosesErudition

퀸 엘리자베스(벨기에 브뤼셀), 쇼팽(폴란드 바르샤바), 차이코프스키(러시아 모스크바)

: 10:45 pm: bluemosesErudition

COL 3:23-24 ESV

Whatever you do, work heartily, as for the Lord and not for men, knowing that from the Lord you will receive the inheritance as your reward. You are serving the Lord Christ.

: 9:43 pm: bluemosesErudition

“그는 부귀와 명예가 보장된 오페라의 길을 거부했다. 그는 당시로서는 가장 위험하고 새로운 세 가지 험난한 길 – 그러나 쇼팽이 아니면 그 누구도 갈 수 없었던 길 – 을 선택했다. 첫째는 오페라가 아닌 소품을 자신의 주무기로 택했다는 것, 둘째는 오케스트라를 버리고 단 한 대의 피아노만을 택했다는 것, 그리고 셋째는 극장이 아니라 몇 사람의 소수정예 관객만을 위한 살롱을 무대로 택했다는 것이다.”(박종호)

: 9:26 pm: bluemosesErudition

“마키아벨리에게 역사란 자신의 처세술을 조명하기 위한 일종의 사례 모음집이었다.”(Mark T. Gilderhus)

: 9:16 pm: bluemosesErudition

“평소에는 자기들 잇속이나 차리던 기업이나 단체에서 기껏 단발성 이벤트 및 이미지 쇄신 차원으로 사업을 기획한 후 ‘좋은 취지’만을 내세워 사람들에게 재능기부를 강요하는 것은 참으로 볼썽사납다. 누군가에게 재능기부를 요구하려면 당신 혹은 당신의 단체가 그에 걸맞은 자격을 갖춰라. 평소에 자기 잇속이나 챙기고 비정규직 고용을 일삼던 사람이나 기관에서 갑자기 ‘재능기부’ 운운하면 우습지 않겠나.”

: 12:35 am: bluemosesErudition

“제1차 오일쇼크는 중동전쟁과 중동지역 정세 불안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1973년 시리아의 이스라엘 침공으로 시작된 제4차 중동전쟁은 이집트, 시리아가 주축이 된 아랍 연합군과 이스라엘의 전쟁이었죠.제4차 중동전쟁이 발발하고 열흘 뒤인 1973년 10월 16일 페르시아만의 6개 석유수출국들은 석유수출국기구(OPEC) 회의에서 원유고시 가격을 17% 인상한다고 발표했습니다. 그리고 17일 이스라엘이 아랍 점령지역에서부터 철수하고 팔레스타인의 권리가 회복될 때까지 매월 원유생산을 전월에 비해 5%씩 감산하기로 결정했다고 발표했습니다. 이는 중동전쟁에서 석유를 정치적인 무기로 사용할 것을 선언한 것이었죠. 선언 이후 배럴당 2.9달러였던 원유(두바이유) 고시가격은 4달러를 돌파했습니다. 3달 뒤인 74년 1월엔 11.6달러까지 올라 2~3개월 만에 무려 4배나 원유가격이 폭등했죠.”

 ”우리나라의 경우, 1973년 3.5%였던 물가상승률은 1974년 24.8%로 수직 상승했고, 성장률은 12.3%에서 7.4%로 떨어졌습니다. 무역수지 적자폭도 크게 확대(10억 달러→24억 달러) 됐습니다. 당시에는 산업구조가 경공업에서 에너지수요가 많은 중화학공업으로 전환되는 시점이었기 때문에 충격은 더 컸죠. 1975년 성장률은 6.5%로 더 떨어졌고, 물가는 24.7%의 고공비행을 이어갔습니다.”

“세계 석유 공급의 15% 수준을 점하고 있던 이란은 석유의 전면 수출금지 조치를 취했습니다. 여기에 석유업자들의 매점매석과 투기성 시장조작까지 횡행하면서 국제 석유시장은 급격히 혼란에 빠져들었죠. 1978년 12월 호메이니 주도로 이슬람 혁명을 일으킨 이란은 전면적인 석유수출 중단에 나서자 배럴당 13달러 대였던 유가는 20달러를 돌파하기에 이르렀습니다. 1980년 9월 이란-이라크 전쟁으로 30달러 벽이 깨졌고, 사우디아라비아가 석유무기화를 천명한 1981년 1월에 두바이유는 39달러의 정점에 도달했습니다.”

“제2차 오일쇼크에 대한 선진국들의 충격은 1차 오일쇼크 때보다 적었지만, 우리나라 경제는 반대였습니다. 대내적으로 10·26 사건과 1980년 정치혼란이 겹치면서 1980년의 실질성장률은 경제 개발 이후 처음으로 마이너스를 기록했죠. 물가상승률은 무려 28.7%에 달했고 실업률도 5%를 넘어섰습니다. 1981년 성장률이 6%대로 높아졌지만 기술적 반등 수준이었으며, 물가는 여전히 20%를 웃돌았습니다. 우리나라 경제의 피해가 다른 나라들에 비해 컸던 이유는 제1차 석유파동 이후 경제 체질 개선이 이루어지지 못하고 중화학공업 확대 정책에 중점을 둔 것이 원인이었습니다.”

: 12:23 am: bluemosesErudition

한 순간의 실수, 돌이킬 수 없는 해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