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chive for November 12th, 2017

November 12, 2017: 11:33 am: bluemosesErudition

욘 포세의 “나는 바람”

: 11:19 am: bluemosesErudition

후세 다쓰지 묘비명 - “살아야 한다면 민중과 함께, 죽어야 한다면 민중을 위해.”

: 11:09 am: bluemosesErudition

1. 몰락의 에티카 _ “전복을 전복하는 전복 - 뉴웨이브 총론”

2. 언어와 비극 _ “안고安吾 그 가능성의 중심”

3. 근대문학의 종언 _ “1부 근대문학의 종언”

: 10:37 am: bluemosesErudition

하관. 광대뼈를 중심으로 얼굴의 아래쪽 턱 부분.

: 10:13 am: bluemosesErudition

시여, 물 만난 물고기의 무념무상한 놀이여 _ 시인 이성복 + 강정

여러 번 약속이 번복된 끝에(대구행 기차표를 예매했다가 1분만에 취소하기도 했다) 결국엔 일요일 오전 한적한 종로 거리에서 만나게 된 시인 이성복은 주섬주섬 메모해간 질문지를 채 펼치기도 전에 먼저 입을 열었다. 역광이 든 커피숍 분위기 탓인지 어스름한 공간의 작은 틈을 열고 들려오는 그 소리의 진원지가 처음엔 정면이 아닌 측후방인 줄로만 알았다. 정면엔 예의 등(燈)빛 같은 눈망울만 형형할 뿐, 난 잠깐동안 마주 앉은 사람이 누구인지 아득해졌다. 시인 이성복이라… 머릿속으로 곱씹어 본 그 이름이 생전 처음 만져보는 물질의 표면인 양, 으스스하게 깔깔했다. 그 느낌은 오랫동안 옷장 속에 방치해뒀던 옷을 꺼내 입는 것과도 같았다. 물질로서의 시인 이성복과의 두 번째 만남은 차갑게 언 시간의 각질 속에 담긴 온기를 확인하는 일에 다름아니었다.

“어느 순간 시를 쓰는 방법을 완전히 까먹어버렸어요. 도무지 어떻게 시를 썼었는지 기억이 안 나더라고. 하도 답답해서 주위 사람들한테 ‘대체 당신은 시를 어떻게 씁니까?’하고 물어 봤을 정도라니까. 그런데 내가 그렇게 물으면 황당해하는 게 대부분이고 심할 땐 기분 나빠하는 사람들도 있었어요. 시 좀 씁네 한다는 사람이 그런 식으로 물어보니까 ‘이 사람 누구 약 올리나?’ 싶었을 법도 하지. 헌데 정말이었거든. 도무지, 도통 시를 어떻게 써왔는지 알 수가 없었고, 내가 무엇을 쓰고 싶어하는지도 몰랐어.”

아침 일찍 동창들과 테니스를 치고 왔다는 시인(그는 감청색 트레이닝복 차림이었다)은 불과 몇 시간 전에 체득한 몸의 활기를 그대로 풀어내는 양, 활달하게 말을 이었다. 그 순간, 지하철 창밖으로 빠르게 스쳐 가는 어둠을 보면서도 시가 발생하는 지점과 글쓰기의 동력을 곰곰 헤아리고 있었을 시인의 모습을 상상했다. 요컨대 시인의 몸은, 그가 무엇을 하고 있든, 오로지 시와 만나는 접점을 향해 항시적으로 반응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건 사전에 염두에 뒀던 의미를 보여지는 물상들에 대입해 불러일으킨 예고된 파장이라기보다는 즉물적으로 몸을 자극하고, 자극 받은 몸이 반응하는 시의 운동에너지에 가깝다. 의외성을 필연성으로 바꾸는 그런 운동은 지난한 관찰과 집중을 요한다. 《달의 이마에는 물결무늬 자국》(열림원)을 읽으면서 떠오른 운동은 사방 벽을 맞고 튕겨 나오는 공을 맞받아 쳐내는 스쿼시였다. 물론, 시인이 테니스에 몰두하고 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고 내 멋대로 치환시킨 연상이다.

《아, 입이 없는 것들》(문학과지성사)을 출간한 지 넉 달만에 나온 이번 시집은 외국 시인들의 시구에 시인의 반응(또는, 덮어씌움?)을 일정한 형식 안에 자유롭게 담아낸 일종의 ‘별전(別傳)’이다. 이성복 시인은 외국 시인의 시를 읽고 떠오르는 이미지를 통해 자신이 잃어버렸던 시의 더듬이를 회복하는 작업을 계속했다고 한다. 야구에 비유하면 프리배팅에 전념했던 셈인데, 아무리 받아치라면서 슬슬 던져주는 공이라 해도 무조건 담장을 넘길 수는 없는 법이다, 배리 본즈든 맥과이어든.

홈런을 의식하면 어깨에 힘이 들어가고 허리가 비틀리면서 전체적인 중심이 흐트러져버린다. 본래의 힘을 그 자체로 두 배 이상 과잉투여할 경우 최소 열 배의 역효과가 일어난다. 그 때 발생하는 데미지는 심한 경우 홈런은커녕 더 이상 배트를 들 수 없게 만들 정도로 치명적일 수 있다. 문제는 스스로의 상태를 어떻게 항상적으로 만들어놓느냐는 것. 어떤 코스, 어떤 구질의 공이 들어오듯 자기 스윙을 유지하는 비결은 거기에 있다. 이건 비단 아시아홈런신기록을 코앞에 둔 이승엽만의 문제가 아니다. 사물과 말에 산몸으로 반응하고자 애쓰는 모든 시인들의 근본문제이자, 삶을 영위하는 모든 것들의 핵심이다.

“열 개 중 하나 정도 건져내는 거지. 그렇다고 나머지는 버리느냐 하면 그건 아니거든. 그 열 개만큼의 노력이 결국 한번의 입질을 불러오는 거니까. 그게 백 번이어도 마찬가지예요. 완성하고자 하는 강박, 시를 만들려고 의식하는 데서 이미 몸이 굳어지고 힘이 들어가는 거라. 지네를 예로 들어 볼까? 지네는 다리가 스무 개가 넘어요. 그런데 지네가 움직일 때를 봐. 그 많은 다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게 아주 신기해요. 그런 지네한테 누군가 ‘야, 넌 참 대단하다. 어떻게 그 많은 다리를 한꺼번에 움직일 수 있느냐’고 물었어. 그랬더니 지네란 놈이 그만 자리에 멈춰 서서는 꼼짝도 못하더란 거야. 그 지네처럼 자기가 잘 할 수 있는 거라도 그걸 더 잘 하려고 의식하게 되면 몸을 움직일 수가 없어지는 거예요.”

이번 시집에 실린 시들은 하나의 규칙 안에서 쓰여진 것들이다. 시인은 외국 시인들의 시구에 탄력 받은 자신의 심상과 언어를 한글 문서로 여섯에서 일곱 줄 안에 몰아넣었다. 임의로 정한 줄수를 넘길 경우엔 잘라내고 모자랄 경우엔 말을 덧붙였다. 그런데 시집을 꼼꼼히 읽다보면 그 규격(?)을 넘긴 시가 딱 두 편 발견된다. 그런 경우는 애당초 거기에 맞는 ‘폼’을 미리 정하고 한번에 갔다고 한다. 시인은 그런 걸 운동선수가 훈련하는 어떤 과정에 비유해서 설명했는데, 그게 무엇이었는지 구체적으로는 기억이 안 난다. 그 대목에서 녹음이 이상하게 뒤틀려버렸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휘발성 강한 비유를 내 멋대로 변형하길 즐기는 못된 습관 탓이 더 크다.

유추컨대, 다리에 모래주머니를 달고 뛰는 육상선수나 허리에 폐타이어가 매달린 줄을 묶고 백사장을 달리는 사람을 연상하면 틀리지 않을 듯하다. 고난을 자초한다고 해도 되겠지만, 그보다는 스스로를 부자유스럽게 만듦으로써 그 안에서 팽창하는 자유의 밀도를 더욱 생생하게 감득하려 했다는 게 더 옳을 것이다(경험해본 사람은 알겠지만 그 자유는 숨가쁜 고통만큼이나 몸과 마음을 일거에 비워버리는 짧은 법열을 전해준다. 그건 참 ‘아픈 자유’다). 그러면서 길러지는 건 한계를 수긍함으로써 한계를 (저도 모르게!) 넘게 되는 시의 내구력이다. 앞뒤 다 트인 자유라면 오히려 널브러지기 쉽다. 의도적으로 갇힌 상태에서가 아니라면 이쪽으로 되돌아오는 공을 받아칠 수도 없지 않은가. 사방으로 트인 곳에서 공은 아무데로나 날아가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그 공을 주우러 가는 길은 너무 멀고, 너무 무의미하다. 그건 놀이가 아니다. 시는 애초에 존재의 궁극을 들춰내는 고달픈 유희이지 않던가. 이 말 역시, 스쿼시에서 이어진 연상의 산물이다.

“난 주로 테니스 가지고만 생각을 했었는데, 강형 말 듣고 보니 테니스보다는 외려 스쿼시에 더 가까운 것 같네, 시가. 테니스는 상대도 있고, 날아오는 공도 그만큼 정반사지만, 스쿼시는 완전 난반사거든. 살면서 시가 다가오고 그 입질을 받아 첫 문장을 쓰고, 첫 문장이 가는 대로 가다가 만나게 되는 이미지들도 모두 난반사잖아? 내가 이 시집의 첫 시에서 ‘시의 첫 구절에 무엇이 들었는지 우리는 모른다.’(〈무엇을 말하고 싶었는지 모른다〉)고 말했는데, 사실 그 문장조차도 내가 의도했던 게 아니에요. 그저 하나의 문장이나 이미지에서 어떤 말이 튀어나온 것뿐이라고. 정해진 한계나 조건이 있고 그 안에서 계속 반복하다 입질이 오는 순간 시가 저 스스로 얘기를 푸는 거지. 그거 일일이 따라잡고, 의미 부여하고 하다보면 다 놓쳐요. 잡히더라도 엉터리로 망가져 있을 테지.”

이성복에게서 사람들은 카프카를 떠올린다. 꼭 그렇게 보지 않더라도 짙은 눈썹에 크고 깊은 눈동자와 날렵한 하관을 마주하면 외모부터가 카프카랑 많이 닮았다는 소문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이번 시집에서도 카프카의 문장은 제법 인용된다. 그건 인터뷰할 때도 마찬가지다. 시인은 말한다. 중요한 건 그저 글쓰기 자체라고.

크고 강렬한 의미를 선동하거나 도발하려는 문구는 시집의 어디에서도 발견할 수 없다. 그저 일상에서 경험한 어떤 ‘입질’(외국 시인의 시구는 그러므로 시인에게 주어진 하나의 미끼다)에 관한 자연스런 반응으로 시인은 삶의 한 순간을 시라는 족자에 말끔하게 걸어뒀을 뿐이다. 때문에 삶을 이겨내는 특출한 잠언과 극적 감동을 미리 상정하고 시집을 펼쳤다간 실망할 지도 모른다. 시인은 누구나, 늘, 볼 수 있고 경험할 수 있는 풍경들을 단촐한 언어로 마름질해놓았다. 그걸 찬찬히 따라가다가 이성복의 시에선 도저히 훔칠 수 있는 문장이 발견되지 않는다는 걸 새삼 알게 된다. 특정한 문장을 아무렇게나 도용한다면 그건 사람의 몸에 지느러미를 떼어 붙이는 것과 다를 바 없다. 극도로 힘을 뺀 상태에서 요리조리 물의 흐름대로 몸을 움직이는 물고기를 어찌 사람이 따라잡겠는가. 그렇다. 《달의 이마에는 물결무늬 자국》은 물고기가 다른 물고기를 만나 물결의 흐름을 증폭시킨, 물 만난 물고기의 힘찬 요동이다. 제대로 된 물고기를 낚고 싶다면 몸이 물이 되도록 물의 흐름에 전신을 맡기는 수밖에 없다. 물결의 움직임이 몸을 휘어잡고 두리둥실 이끌고 갈 때까지.

“좋은 인터뷰는 그 자체로 훌륭한 문학작품이에요. 얘기가 잘 통하는 사람, 그런 걸 인터뷰이라 그러던가? 여하간 그런 사람이 있다면 재미있게 인터뷰를 해서 그걸 책으로 묶을 수 있었으면 좋겠어. 서로 말을 들려주고 받다 보면 서로의 반응에서 또 다른 사유의 영역이 생겨나거든. 그 사람의 말에 의해서나 내 말에 의해서나 서로의 느낌이 이리저리 옮아가면서 다른 것들을 깨닫게 되는 거예요. 내 쪽에서 일방향으로 공을 치는 게 아니라 그쪽에서 쳐내는 공을 맞받아치면서 다른 생각, 다른 자세가 나오는 거지. 그런데 우리나라엔 그런 인터뷰 기록이 거의 없어요. 인터뷰는 너무 가볍다, 중요하지 않다 생각하는 거지.”

마개만 열면 시원스레 쏟아지는 맛깔스런 술과 같은 얘기들. 이성복 시인은 딱히 타점이 정해지지 않은 이런저런 얘기들을 흘려놓으며 녹음 테이프를 오로지 자신의 육성으로만 가득 채웠다. 타이밍을 놓친 채 어설픈 추임새만 넣고 있는 내 목소리는 변방의 북소리처럼 시인의 육성 뒤로 자꾸 떠밀린다. 그럼에도 이 글은 시인의 말에 반응하는, 그리하여 다른 지평을 자꾸 넘보는 필사자의 본능에 의해 상당 부분 걸러진 채로 세상에 나선다. 그러니 이건 시인이 부어놓은 기름에 내 멋대로 질러버린 불과도 같다. 이 불에 데일 자, 과연 어떤 흉터를 속으로 감추며 그만의 입김을 내뱉을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