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그 자는 주 업무를 오랜 기간 방치한다.
2. 당일, 그 자는 타인에게 해당 업무를 전가한다.
3. 선의를 갖고, 현장에 당도한 동료는 난처하다.
4. 동료는 당혹스런 상황에 대처하며 분노한다.
5. 그 자는 모든 상황이 정리될 무렵 나타난다.
6. 허위로, 공로를 가로챈 뒤, 웃는다.
7. 종국에 그 자는 천벌을 받을 것이다.
8. 주께서 실존하시기에.
* 악마에게 선의는 사치다. 2와 3의 단절을 택해야 한다.
1. 그 자는 주 업무를 오랜 기간 방치한다.
2. 당일, 그 자는 타인에게 해당 업무를 전가한다.
3. 선의를 갖고, 현장에 당도한 동료는 난처하다.
4. 동료는 당혹스런 상황에 대처하며 분노한다.
5. 그 자는 모든 상황이 정리될 무렵 나타난다.
6. 허위로, 공로를 가로챈 뒤, 웃는다.
7. 종국에 그 자는 천벌을 받을 것이다.
8. 주께서 실존하시기에.
* 악마에게 선의는 사치다. 2와 3의 단절을 택해야 한다.
“나는 세시봉 세대다. 그 음악프로그램에 나온 사람들 모두 또래의 음악인들이고 60년대에 서울에서 대학을 다닌 많은 젊은이들처럼 세시봉과 바로 건너편에 있던 클래식 음악실 르네상스를 왔다갔다 했다. 그러나 그들의 추억담을 들으며 감동과 재미를 못 느꼈다. 아물었던 상처가 덧나고 피가 흐르는 듯했다. … 세시봉에 감동을 느꼈던 젊은 세대들에게 말하고 싶다. 70년대를 기억하라고. 그 살벌했던 유신시대를, 세시봉 바깥세상의 노래 이야기를, 그때가 어떤 세상이었는지를.”(김선주)
“정당 이론에서 정당의 개수는 ‘그 사회의 갈등축+1개’로 본다. 즉, 갈등축이 하나면 양당제가, 갈등축이 두 개 이상이면 다당제가 출현할 가능성이 높다. 상충하는 이해관계 개수만큼 그를 대변하는 정당이 생기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 사회의 갈등축은 갈수록 분배 문제 하나로 모이고 있다. 기존 진보 정당에는 안된 얘기지만, 장기적으로 한국 정치의 골격은 다당제보다는 양당제로 갈 가능성이 높다”(박상훈)
“복지 정치가 복지 정책보다 먼저다. … 복지 제도에서 이익을 얻는 지지 블록을 다수파로 구축하는 것이 예산 계산기를 두드리는 것보다 먼저다. 이를테면 친환경 무상급식은 학부모 외에도 유기농 농산물을 다루는 농민과 유통업자를 지지 블록으로 묶어낸다. 의료에서도 보육에서도 이런 ‘이익을 얻는’ 블록을 형성해 다수 연합을 만드는 것이 최우선 과제다. 지금 우리는 노동자의 90%와 중소 자영업자 전체가 조직되지 않은 채 방치되어 있다. 복지를 매개로 해서, 이 층을 지지 블록으로 묶어내자는 거다. 이 지지 블록의 힘을 업고 국가 재정을 재구성해야 한다. 현재 재정 구조 내에서만 하자는 것도, 섣불리 증세부터 하자는 것도 현실적이지 않다. … 어떤 경우에도 한나라당이 쉽사리 무너지지 않는 것은 오랜 시간 이익을 공유하며 형성된 지지 블록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천안함과 연평도에 동반 침몰하지 않은 것 역시, 지난 10년 집권 동안 평화에서 이익을 얻는 ‘평화 블록’이 생겼기 때문이다.”(이철희, 민주당 전략기획위원회 부위원장)
“뇌과학과 인지과학은 이런 이론적 가정이 모두 틀렸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성은 물질에 기반을 둔 것으로 세상을 직접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뇌와 신체를 통해서만 세상을 인식한다. 이성은 프레임과 개념적인 은유(신체에 형성된 신경회로)를 사용한다. 이성의 작용에는 감정이 필요하며, 이성은 이기적인 목적뿐 아니라 감정적인 연결과 도덕적 가치도 추구한다. 그리고 언어는 외부세계를 직접적으로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뇌 속에 인식의 틀에 맞춰지는 것이다. … 유권자들 중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이중개념틀(bi-conceptual)을 가지고 있다. 다시 말해 이 사람들은 보수적 도덕체계와 진보적 도덕체계 모두를 갖고 있으며 사안에 따라 둘 중 하나를 적용한다. 이런 사람들은 ‘무소속(independent)’, ‘부동층 유권자(swing voters)’, ‘온건파(moderates)’, ‘중도파(the center)’ 등으로 불린다. … 보수적 언어를 사용하지 말라. 듣는 사람들의 뇌에 그들의 도덕체계를 활성화시키기 때문이다. 그들의 주장을 부정하려고 하지 말라. 그들의 주장을 더욱 강조하는 것이 될 뿐이다. 자신의 언어와 자신의 주장을 사용하라.”(George Lakoff)
1. “제 생각에는 ‘권력당’이라는 정당이 있습니다. 러시아어로 ‘파르차 블라스티’(권력의 정당)이라는 말입니다. … 권력당원의 조건은 권력의 가장 핵심에는 들어가지 않는 것입니다. ‘사카이야 다이치’처럼 각료가 되거나 또는 정부의 자문의원이 되면 권력당원에서 탈락할 위험성이 있지요. 권력은 어딘가에서 어느 새 교체되니까요. 권력에 비판적인 자세를 취하면서 항상 권력의 안쪽에 있는 것, 이것이 권력당원의 요건이라서 언제나 건설적인 비판자가 돼야만 합니다. 건설적 비판자라고 해도 반체제적이거나 좌익적이어서는 안 되지요. 제 생각에는 앵커이자 평론가인 ‘다하라 소이치로’는 진정한 권력당원입니다. 대단한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웬만큼 독특한 기법을 가지고 있지 않으면 권력당원의 당적을 유지할 수가 없기 때문이지요. 결코 비꼬는 게 아닙니다. 미디어와 정치를 연결하는 회로로서 권력당원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2. “개인적으로 가장 의구심이 드는 점은 요즘처럼 출판이 불황인 상황에서 혈액형으로 성격을 진단하는 책만은 매우 잘 팔린다는 것입니다. … 혈액형과 성격을 결부시키는 논의가 의미 없다는 것은 이미 검증된 사실이지요. 그런데도 정기적으로 혈액형 성격테스트 책이 나오고 있습니다. 미국, 중국, 한국에서도 마찬가지고요. 그러나 유럽에서는 나오지 않지요. 왜냐하면 유럽에서는 혈액형과 성격을 결부시키면 금세 나치즘으로 간주될 수 있으니까요.”
3. “헤결은 모순, 대립, 차이라는 개념을 구별하지요. 마르크스가 든 예이지만 자본가와 노동자 사이에 모순이 있어도 협동조합을 만듦으로써 … 해결할 수 있습니다. 대립은 한 편이 다른 한 편을 완전히 절멸시킬 때 해소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차이는 해소가 불가능합니다. 예를 들어 논쟁하는 상대가 ‘당신이 뭐라하든 이것은 내 취향이다’라고 해버리면 더 이상 논의가 진전될 수 없습니다. 취향은 차이니까요. 차이는 해소될 수 없기 때문에 어떻게든 자신의 입장을 정해야 합니다. 따라서 어느 쪽 입장에 서는가에 따라 세계는 다르게 보입니다.”
* 사토 마사루 : 1960년 도쿄 출생으로 일본 도시샤(同志社) 대학 및 대학원 신학부를 졸업했다. 1988년에서 1995년까지 7년간 러-일 대사관에 근무하면서 구소련의 정계, 재계, 학계에 걸쳐 폭넓은 인맥을 형성하여 주목을 받았다. 1998년에는 외무성 국제정보분석 제1과 주임분석관이 되어 일본 외교의 마지막 숙제라 불리는 북방 4개 섬 반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러-일 평화조약을 체결하는 과정에서, 개방적인 외교정책을 곱지 않은 시선으로 보던 일본 우익 세력의 역풍을 맞아 2002년 배임 및 업무방해 혐의 등으로 검찰 수사를 받고 구속된다. 치열한 법정 다툼과 일본 지식인들의 석방 운동에도 불구하고, 결국 징역 2년 6개월, 집행유예 4년 형을 선고받고 공직에서도 물러나게 된다. 하루아침에 공무원 신분에서 범죄자로 내몰리게 되자 그때부터 사회적인 발언을 거침없이 토해내기 시작한다. 그는 1심 판결 후 <국가의 덫>을 출간해, 자신의 혐의와 관련된 정치적 배경과, 부조리한 검찰, 대중을 선동하는 언론의 선정성 등을 폭로함으로써 일본 사회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킨다. 이후 활발한 저술 활동과 평론 활동을 펼치면서 일본 논단의 주요 인물로 떠오르게 된다. 저서로는 《국가의 덫》(마이니치출판문화상 특별상 수상) 외에 《자멸하는 제국》(신초 다큐멘터리상과 오오야 논피션상 수상) 《공리주의자의 독서 기술》 등이 있다.
- “공부를 할수록 머리가 나빠진다고요?”(다치바나 다카시)
- “국가공무원시험이나 사법시험을 서너 번씩 보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봅니다. 일정한 시간 동안 책상에 앉아 기억한 것을 일정한 시간에 종이 위에 재현하는 것은 우리 뇌의 기능 가운데 기억력과 조건반사 능력밖에 사용하지 않는 거죠. 한 분야에서 지나치게 오랫동안 그런 과정을 반복하다 보면 머리가 나빠집니다. 입시공부에 너무 많은 시간을 들이다 보면 머리가 나빠져서 그 틀을 벗어날 수 없게 됩니다. 외무성에도 4~5년씩 시험 준비를 하다가 합격해서 들어온 외교관들은 쓸만한 사람이 한 명도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독서의 위험성을 논한 쇼펜하우어의 <독서에 대하여>를 읽어두면 좋습니다. 쇼펜하우어 자신은 대단한 독서가였지만, 독서가 지나치면 좋지 않다고 이 책에서 거듭 경고합니다. 독서한 다음에는 생각하는 행위가 필요한데, 책을 너무 많이 읽다 보면 생각할 시간이 줄어들어 오히려 머리가 나빠진다는 것이죠.”(사토 마사루)
<꿈꾸는 다락방>, <스물일곱 이건희처럼>, <여자라면 힐러리처럼> 등을 출간한 이지성의 <리딩으로 리드하라>(부제: 세상을 지배하는 0.1퍼센트의 인문고전 독서법)를 감명깊게 읽은 이가 적지 않은 듯 하다. 목차는 아래와 같다.
1. 개인, 가문, 나라의 운명을 바꾸는 인문고전 독서의 힘
- 21세기 대한민국 국민에게 금지된 것
- 역사 속 초강대국들이 쉬쉬해온 비장의 무기
- 국력 신장을 위한 일본의 국가적 프로젝트
- 법조인 130명 vs. 전과자 96명
2. 리더의 교육, 팔로어의 교육
- 하버드 교수도 열광한 카를 비테식 ‘다른 교육’
- 장한나는 왜 하버드 철학과를 선택했을까?
- 소문난 삼류 학교 시카고 대학이 노벨상 왕국이 된 사연
- 물음표 교육을 살려야 천재가 산다
- 논술을 위한 인문고전 독서는 하지 마라
- 행복한 천재를 만드는 인문고전 독서교육
3. 자본주의 시스템의 승자가 되는 법
- 런던 빈민가의 접시닦이, 세계 금융의 황제가 되다
- 최초의 철학자는 최고의 투자가였다
- 자본주의는 인문학 전통에서 만들어졌다
- 전 세계 0.1퍼센트 부자들은 인문고전을 읽는다
4. 인생경영, 인문고전으로 리드하라
- 당신이 이병철, 정주영 이상의 인문고전 독서가가 된다면
- 알렉산더 대왕과 세종대왕의 공통점
- 세계 최고의 경영인들을 매혹한 ‘소크라테스식 대화법’
- <손자병법>, 읽은 ‘척’ 말고 제대로 읽어야 하는 이유
- <논어>에 이르는 16가지 길
- 지금 당신은 어떤 책을 읽고 있는가?
5. 인문고전 세계를 여행하는 초보자를 위한 안내서
- 부끄러워하지도 좌절하지도 말자
- ‘나’와 ‘너’와 ‘우리’를 위한 인문고전 독서
- 공감 100퍼센트 인문고전 독서 노하우
- 달동네 셋방에서 천재와 만나다
- 당신이 인문고전에 대해 오해하는 것들
6. 세상을 지배하는 0.1퍼센트 천재들의 인문고전 독서법
- 리딩으로 리드하라 1. 온 마음으로 사랑하라
- 리딩으로 리드하라 2. 맹수처럼 덤벼들어라
- 리딩으로 리드하라 3. 자신의 한계를 뼈저리게 인식하라
- 리딩으로 리드하라 4. 위편삼절(韋編三絶), 책이 닳도록 읽고 또 읽어라
- 리딩으로 리드하라 5. 연애편지를 쓰듯 필사하라
- 리딩으로 리드하라 6. 통(通)할 때까지 사색하라
- 리딩으로 리드하라 7. ‘깨달음’을 향해 나아가라
- 인문고전 독서를 시작하는 모든 이를 위한 ‘자경문(自警文)’
* 2011. 2. 13. 기준 알라딘 Sales Point가 82,595이다. 암담하다. “인문고전 독서”의 이유가 무엇인가. 그간 ‘문학동네’에 갖고 있던 호감이 일시에 방류되었다.
Precariat: precarious proletariat
1. 탈숙련화에 반하여, 구상과 실행의 일치를 모색한 브레이버맨의 <노동과 독점자본>은 뷰러웨이의 <생산의 정치>에 의해 논박된다. 후자는 노동과정이 아닌 고용관계에 주목하여, 불가피한 자발적 복무의 동인을 분석한다. 여기에 고든, 에드워즈, 라이크가 공저한 <분절된 노동, 분할된 노동자>는 사회적 축적구조론의 관점에서 단위 생산양식을 규율하는 체제의 변천을 고찰함으로써, 노동통제는 노동과정과 고용관계, 그리고 일개 사업장을 상회하는 축적구조에 의해 다층적으로 구축됨을 논증한다.
2. 구상과 실행을 통합한 ‘싸이버타리아트’가 언제 어디서나 업무에 종사할 수 있는 오늘날, 작금의 노동통제(혹은 HRD/M)는 어떠한 방식으로 이뤄지고 있는가. 그것은 [서비스업 전면화에 따른 과도한 감정노동에 기인한] 프리케리아트의 자기계발(특히 감정코칭)로 정리할 수 있겠다.
- 신앙 : Norman Vincent Peale, Robert Schuller, Joel Osteen “긍정의 힘”
- 이성 : Martin Saligman “긍정심리학”
- 성공 : Rhonda Byrne “시크릿”
3. 비판은 쉬우나 대안이 어렵다. 예컨대 <자유의 의지, 자기계발의 의지> 따위의 글들이 그렇다. 일개 소시민의 생존대응을 진보의 얼굴로 폄하할 수 있는가. “우리를 불행하게 만드는 장애물을 만나면 우리는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장애물을 변하게 하든지, 아니면 우리 자신이 변화해야 한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세상은 우리를 위해 그들 자신을 절대로 변화하려고 하지 않는다. 따라서 현재가 불만족스럽다면 우리 자신이 먼저 변화해야 한다. 우리의 생각이 긍정적으로 변화한다면 행동이 달라질 것이고, 행동이 달라지면 그에 대한 세상의 반응도 달라질 것이다.” “윌리엄 제임스는 이렇게 주장했다. ‘사람은 행복하기 때문에 웃는 것이 아니라, 웃기 때문에 행복하다.’ 정말 기막힌 발상이다. 영문도 모르고 울다 보면 왠지 슬퍼지고 슬퍼지면 더 심하게 우는 것처럼 신체의 말초적 반응이 감정을 유도한다는 그의 이론을 ‘정서의 말초설(peripheral theory of emotion)’이라고 한다. … 인상을 찌푸리고 있으면 만사가 못마땅해 보이고 억지로라도 행복한 미소를 짓고 있으면 기분이 좋아질 수밖에 없다. 이처럼 표정에 따라 감정상태가 달라진다는 심리학 이론을 안면 피드백 이론(facial feedback theory)이라고 한다.”(이민규, 2008: 8, 125~128)
4. “하루에 30분도 기도하지 않는 혁명가가 만들 세상은 위험하며, 혁명을 도외시하는 영성가가가 얻을 수 있는 건 제 심리적 평온 뿐이다.” “그게 제가 하고 싶은 모든 이야기의 결론입니다.”(지승호/김규항, 2010: 214~215) 대증요법을 초월한 영적 실재성을 과시하는 것, 그리스도인의 관건이다.
5. “우리 신앙의 문제는, 우리가 지은 죄를 용서받을 정도로만 회개하려 할 뿐, 우리의 믿음이 하나님 나라를 실제로 경험하게 하는 데 충분하지 않다는 것을 회개하려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회개는 방향 전환을 의미한다. 특별히 내 생각의 방식과 세상을 보는 방식에 대한 전환을 말한다. 즉, 예수님의 관점이 내 안에 들어와 작동하지 않는 것은 마땅히 회개해야 할 핵심 사안인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야 할 중요한 문제는, 베드로가 스스로 노력해서 믿음을 키울 수 있었던 것은 결코 아니라는 사실이다. 베드로의 노력만으로는 파도와 물결에 대해 그리고 죽음의 위협에 대해 그 자신의 시각을 바꿀 수 없었다. 자신의 믿음을 아무리 쥐어짜내어 믿는다고 고백하고, 자신이 물 위를 걷는 상상을 아무리 해봐도, 그것이 그가 실제로 물 위를 걷게 하는 믿음으로 작용하는 것은 아니다. 많은 경우 오늘날 크리스천들에게 믿음이란 ‘바라는 대상에 대한 열망’이라고 인식되어 있다. 즉, 어떤 대상에 대해 열심을 가지고 떼를 쓰며 간절히 매달리는 것이 믿음 있는 행위로 이해되어 왔다. 특별히 한국의 신(神) 개념에는 그런 요소가 많다. 예를 들어 우리는 ‘지성(至誠)이면 감천(感天)’이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우리가 정성을 다해 빌고 구하면 하늘이 감동하여 우리가 원하는 소원을 들어줄 것이라는 생각이다. 즉, 우리가 받고 받지 못하는 문제가 우리의 노력과 정성 여하에 달려 있다는 신념이다. 그러나 이런 개념의 믿음은 예수님이 의미하시는 믿음과는 전혀 다른 것임을 보게 된다. 상상과 생각을 전환하려는 노력, 인간적인 열심을 가지고 신념을 다지는 것과 예수님이 말씀하신 ‘믿음’은 전혀 다르다. 더 나아가 현대 교회는 현대 심리학의 영향 아래, 긍정적인 사고방식을 ’믿음’과 대체하려는 움직임을 보인다. 그러나 긍정적인 사고방식은 믿음과는 별개이다. 긍정적인 사고가 하나님과의 만남 그리고 하나님의 개입을 반드시 전제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긍정적 사고를 강조하는 주장은 개개인 안에 적극적이고 밝게 사고하는 경향성이 있느냐를 문제의 관건으로 본다. ‘나 자신’이 주체가 된다. 그러나 믿음은 하나님과의 만남을 전제로 한다. ‘하나님’이 주체가 되신다. 믿음은 위로부터 오는 것이지, 우리가 쥐어짜고 노력해서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다.”(이용규, 2010: 127~129)
1. “라브리는 인생의 비바람을 잠시 피해 갈 수 있는 영적 오두막입니다. 본래 라브리란 말은 불어로 원두막, 쉼터, 피난처란 뜻인데, 산이나 들에서 풀을 뜯어먹던 양들이 폭풍과 비바람을 만났을 때 잠시 쉬어 가는 곳을 의미합니다. 현대에 와서는 버스를 기다리며 비바람을 피해 가도록 정류장에 세워져 있는 조그마한 대피소를 말하기도 합니다. … 그런 의미에서 라브리는 로뎀나무나 아둘람굴처럼, 자신이 처한 인생의 문제와 더불어 씨름해야 하는 곳입니다. 만약 인생의 문제로부터 도피하려고 라브리에 찾아온다면 그것은 큰 실수입니다.”(276)
2. “라브리는 정직한 질문에 정직한 대답을 탐구하는 공부방입니다. 라브리는 인생의 모든 문제에 대해 기독교가 대답을 줄 수 있다고 믿으며, 우리는 세계관 전쟁 혹은 사상의 전쟁에 직면해 있다고 믿습니다.”(277)
3. “라브리는 사랑과 진리를 실험하는 공동체입니다. 라브리는 수양관이 아닙니다. 라브리는 영육이 편히 쉬는 곳이기는 하지만 휴양소는 아닙니다. 특히 라브리는 기도원이 아닙니다. 기독교인들끼리 옹기종기 모여서 경건의 훈련이나 기도하는 곳과는 전혀 다릅니다.”(278)
4. “라브리는 유럽의 영적 문제에 맞서기 위해 시작되었습니다. 라브리는 세계 제2차 대전이 끝난 10년 후인 1955년에 설립되었는데, 그때의 시대적 상황은 한마디로 종교적인 공황기였습니다. 즉 유럽 전체가 전쟁의 후유증을 앓고 씨름하던 때였는데, … 반지성적인 분위기가 팽배했습니다. 당시의 교회는 실존주의 신학의 영향을 받아서 감정적이고 체험적인 신앙을 중시하고 합리적인 기독교 신앙을 무시했습니다.”(279)
5. “현재 활동하고 있는 라브리는 … 여덞 개의 합숙연구원과 두 개의 자료센터입니다. 합숙연구원은 스위스, 영국, 네덜란드, 스웨덴, 미국 사우스보루와 로체스타, 한국, 캐나다 등입니다. 자료센터는 호주와 독일에 있습니다.”(281)
6. “라브리의 기본적인 실제 운영원칙은 단순합니다. 실존하시는 하나님의 실재성, 하나님의 성품, 특히 그분의 사랑과 공의,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으로 형제된 사람들 사이에 초자연적으로 회복된 인간관계의 실재성을 과시하는 것. 이것이 라브리 사역의 목적이요, 핵심 정신입니다.”(283)
7. “라브리는 재정 후원을 요청하지 않는다고 말씀드렸는데, 그 이유는 우리가 거만하거나 교만해서가 아니라 사람들에게 손을 벌리고 도움을 호소하기 보다는 하나님의 실존을 믿고 그분의 능력을 과시하고자 하는 것 때문입니다. 그러나 재정 후원을 요청하지 않는다고 해서 우리의 필요를 라브리 가족들에게 숨기거나 알리지 않는다는 말은 아닙니다. … 이런 운영 원칙은 라브리의 존재 의미를 확인하는 시금석이 될 수도 있고 … 하나님이 더 이상 사용하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라브리가 불필요하게 존속하는 사태를 막기 위한 것이기도 합니다. 계속해서 재정적인 필요가 채워지지 않고, 학생들이 찾아오지 않고, 일을 함께 하려는 간사들도 없고, 사역에 대한 아무런 비전과 소망도 없고, 열심히 일하지만 열매가 없다면, 그때는 인위적으로 라브리를 유지시키려고 노력하기보다는 폐쇄하는 것이 옳다고 보는 것입니다.”(287~288)
* 성인경(2007). <라브리의 운영 정신>, <<부드러운 칵테일을 좋아하는 친구에게>>, 꿈을 이루는 사람들.
“쓰레기 같은 문화는 다 불타 버리겠지만, 좋은 문화는 종말에 불타 버리지 않고 하나님 나라에서 영원히 남습니다(계14:13, 벧후3:10). 이런 말씀을 믿고 카이퍼(A. Kuyper)는 네덜란드의 수상이 되어서 정치적이고 교육적인 일을 많이 했습니다. 그는 ‘개인적으로 이룩한 문화적 업적은 우리의 것이며 새 땅에서도 상실되지 않는다’는 믿음이 있었습니다.”(성인경, 2007: 255)
“솔로몬이 죽고 르호보암이 왕위를 이었을 때 유다를 제외한 열 지파는 여로보암을 자신들의 왕으로 옹위하여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이를 다윗과 솔로몬 시대의 통일왕국과 구별하기 위해 우리는 북이스라엘이라 한다. 북이스라엘은 총 19명의 왕을 거쳐 호세아를 끝으로 주전 722년 앗시리아에 의해 멸망한다. 안타까울 정도로 북이스라엘의 모든 왕은 악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앗수르는 북왕국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의 도구였다. 남왕구 유다는 총 20명의 왕을 거쳐 시드기야를 끝으로 주전 586년 바벨론에 의해 멸망당하고 말았다. 유다의 왕들 중 몇은 선하다는 평가를 받았으나 대다수는 역시 악하여 하나님을 슬프게 만들었고, 결국 바벨론이 심판의 도구가 되어 땅과 왕과 성전을 다 잃고 말았다. 처절한 실패였다. 이 약간의 성공과 전체적 실패의 이야기가 열왕기상하와 역대상하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는 그들을 완전히 버리지 않았다. … 발흥하는 페르시는 제국이 주전 549년 메데와의 통일을 이루고 주전 539년에는 바벨론을 정복하고 말았다. 페르시아의 고레스는 바벨론과는 차별성을 보이는 정책을 펴는 가운데 주전 538년 칙령을 내려 유대인들의 귀환을 허락했다. 모든 것을 다 잃었던 이들은 자기 땅으로 돌아와 성전을 짓고 성벽을 보수하며 율법을 회복할 수 있었다. 하나님의 섭리 내지는 기적이었다.” _ 유승원(매일성경, 2011. 01+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