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chive for February, 2011

February 12, 2011: 2:03 pm: bluemosesErudition

그는 초췌했다 / 내 딸을 백 원에 팝니다 / 그 종이를 목에 건 채 / 어린 딸 옆에 세운 채 / 시장에 서 있던 그 여인은. 
 
그는 벙어리였다 / 팔리는 딸애와 / 팔고 있는 모성(母性)을 보며 / 사람들이 던지는 저주에도 / 땅바닥만 내려보던 그 여인은.
 
그는 눈물도 없었다 / 제 엄마가 죽을 병에 걸렸다고 / 고함치며 울음 터치며 / 딸애가 치마폭에 안길 때도 / 입술만 파르르 떨고 있던 그 여인은.
 
그는 감사할 줄도 몰랐다 / 당신 딸이 아니라 / 모성애를 산다며 / 한 군인이 백 원을 쥐어주자 / 그 돈 들고 어디론가 뛰어가던 그 여인은. 
 
그는 어머니였다 / 딸을 판 백 원으로 / 밀가루 빵 사들고 허둥지둥 달려와 / 이별하는 딸애의 입술에 넣어주며 / 용서해라! 통곡하던 그 여인은.

_ 장진성, <내 딸을 백 원에 팝니다>

: 12:37 pm: bluemosesErudition

“기초는 쉬워서 기초가 아니다. 중요하기에 기초다.”(이영우) _ EBS <공부의 왕도>(2011. 2. 11)

February 10, 2011: 3:50 am: bluemosesErudition

“마을공동체라고 하면 긴밀하고 친화력이 있는 집단처럼 보인다. 그러나 오래 전에 기다 미노루라는 필명으로 <미치광이 부락 주유 기행>(1948)이라는 책을 쓴 사람이 있다. 그 사람은 프랑스에서 공부한 인류학자였다. 이 책은 차별적인 단어를 쓴 제목 때문에 한때 배척되기도 했지만 한 번 읽어볼 만한 가치가 있다. 이 책은 그저 평범한 일본의 농촌을 우주인이 처음으로 보는 것처럼 관찰한 것이다. 그 중에서 인상에 남는 것은 농민 사이에 우정이라 할 만한 것이 없다는 것이다. 우정이 존재하기 위해서는 ‘자기’가 있어야 한다. 그러나 바로 그 ‘자기’가 없는 것이다. 중심은 ‘사회’고, 그들은 그것을 무서워한다. 그러므로 그들은 고립을 두려워해 사이좋게 지내지만 그것은 겉으로만 그럴 뿐이다. 근본적으로는 이기주의적인데도 ‘자기(에고)’는 없다(柄谷行人, 2000[2001]: 29).

* 키르케고르는 ‘차별적 사랑’의 어두운 면에 주목하였다. 차이는 사랑의 이유이다. “서로 달라서, 서로 필요하다.” 이것이 자기가 있되, 자기가 없는 우정의 근간이다.

February 9, 2011: 10:04 pm: bluemosesErudition

“한 우물을 파야 한다.” 그리고 “‘더 거룩한 일’로 부르심을 경계해야 한다. 그리스도인들이 한 우물을 파는 데 있어서 가장 큰 유혹은 하나님이 자신을 목회나 소매선교로 부르시지는 않았을까 하는 점이다. … 물론 학문의 영역에 있던 분들도 목회나 소매선교로의 부름이 분명하다면 전향할 수 있지만 그것이 전자는 덜 거룩하고 후자는 더 거룩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면 이것은 이교도적 이원론의 영향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학문의 제사장으로 부르신 사람들은 학문을 통해 선교하고 하나님 나라에 기여하는 것에 집중해야 한다. 그러면서도 다른 영역에 대한 호기심을 잃지 말아야 한다. 여러 우물을 파서는 안 되지만 이것이 다른 분야에 대한 흥미를 가지지 말아야 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대학이나 연구 기관에 이는 사람들은 인근 학과나 부서 혹은 자기 학과나 부서 내라도 다른 전공의 세미나가 열리면 부지런히 찾아가서 배워야 한다. 물론 그 분야에 대한 전문적인 식견이 없기 때문에 용어도 생소하고 내용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많겠지만 서론과 결론 부분에서 한두 개라도 건지면 된다.” _ 양승훈(2009). 그리스도인으로 공부를 한다는 것은. CUP. 249~250쪽.

* 어느 학생의 얄팍한 언급들이 무엇 하나를 지양하는 계기가 됐다. 박학다식의 표방, 그것은 방황이다. 한 주제에 천착한다.

: 12:39 am: bluemosesErudition

1. “여러분은 오직 개인이 나타내는 것과 또 그가 그것을 나타내는 방식을 볼 뿐이다. 그것은 꼭 무대에서와 같다. 그러나 막이 내리면, 왕을 연기한 자와 거지를 연기한 자 등등은 모두 같다. 모두 똑같은 배우들이다. 죽음에 이르러서 현실이라는 무대의 막이 내릴 때 … 그럴 때 그들은, 또한, 모두 하나이며, 그들은 인간들이다.” “오호라, 현실의 삶에서 우리는 차이점이라는 겉에 입은 외투를 너무 단단히 여미고, 그 결과 그 외투가, 평등성이라는 내면의 영광이 지속적으로 바깥에까지 빛나야 하는 데도 결코 빛나지 않거나 또는 아주 드물게 빛나기 때문에, 자신은 겉에 입은 외투라는 사실을 철저히 은폐하고 있는 것이다.”(151~152)

2. “키르케고르는 죽음이 인간의 연극을 끝장낼 때, 시간의 막이 내려오고 영원의 진정한 삶이 베일을 벗을 때, 그때 우리는 우리가, 벌거벗은 진리 안에서, 보이는 그대로, 우리 모두 하느님 앞에 서 있는 모습으로, 본질적으로 평등하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157) “영원한 삶에 의해 성취되는 수평화는 우리의 가장 고귀한 공통분모, 하느님 앞에서의 각 개인의 감할 수 없는 존엄성을 가리킨다. 대중에 의해 초래된 균질적 평준화에 대한 키르케고르의 경멸은 훨씬 심오한 또는 훨씬 고귀한 평준화와는 구별되어야 하거니와, 여기에서는 우리의 외부 환경이 무엇이든 간에, 우리는, 우리 각자이고, 단독으로 취해졌으며, 절대적으로 평등하다 - 하느님 앞에서.”(154) “키르케고르는 기본적으로 ‘차별적 사랑’과 ‘명령받은 사랑’을 구분한다.”(158)

* “소금은 좋은 것이다. 그러나 소금이 짠 맛을 잃으면, 너희는 무엇으로 그것을 짜게 하겠느냐? 너희는 너희 가운데 소금을 쳐 두어서, 서로 화목하게 지내어라.”(마가복음 9:50) _ 이웃사랑의 방안은 우리 가운데 소금을 쳐 두는 것이다. 키르케고르가 암시하는 ‘절망의 도약’은 길이 아니다. 빛의 성향(dispositivo)을 자아내는 소금이라는 장치(dispositif)에 관해 탐구한다.

February 8, 2011: 10:52 pm: bluemosesErudition

1.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여러분이 알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힘에 겹게 너무 짓눌려서, 마침내 살 희망마저 잃을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우리는 이미 죽음을 선고받은 몸이라고 느꼈습니다. 그렇게 된 것은, 우리 자신을 의지하지 않고 죽은 사람을 살리시는 하나님을 의지하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고린도후서 1:8~9)

2. 은송림 이후 ‘수술 중 각성’을 극복 방안을 찾던 중에 임한 하나님의 교훈은 다음과 같다: 종복은 말이 없다. 침묵의 섬김이 절실하다. 치밀한 조치를 통해 상황을 통제하기 원하나, 이는 불가하다. 변인은 바다의 모래알 보다 많다. 기도의 또 다른 존재 이유가 여기에 있다. 첫째는 영혼이 쓸려가지 않기 위해, 둘째는 진리를 관철시키기 위해. 결국 두 가지 모두 세파에 휩쓸리지 않고 주를 따르기 위함이다. 요컨대 순종이 관건이다.

3. “우리는 흔히 하나님의 뜻이 아닐 수도 있는 일에 대해서조차 떼를 쓰고 간절히 기도하여 자신의 뜻을 관철시키는 것이 좋은 기도라고 생각한다. 또 많은 경우 그렇게 할 것을 권장하기도 한다. 성경에서 하나님의 뜻을 돌이킨 기도의 예로 히스기야의 기도를 많이 언급한다. 히스기야가 곧 죽게 될 것이라는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에 히스기야는 눈물로 하나님께 간주하여 15년의 생명을 연장받았다. 더욱이 하나님께서는 히스기야의 병을 낫게 하신다는 확증으로 그의 요청에 따라 해시계에서 해의 그림자를 십 도 물러가게 하는 이적을 보이셨다(왕하 20:1~11). 하지만 그 후 히스기야는 바벨론에서 온 사자에게 자신의 보물고와 군기고의 모든 것을 자랑하며 보여주는 큰 실수를 저지른다. 그리하여 비록 히스기야 때에는 유보되었지만, 궁극적으로 바벨론에 의해 나라가 망하게 되는 단초를 제공했다. 더군다나 그의 생명이 연장되어 아들 므낫세가 태어났다. … 히스기야의 생명 연장은 결국 유다 백성들을 55년간 악한 왕 므낫세의 통치 하에서 신음하게 했다.”(이용규, 2010: 48~49)

: 9:36 pm: bluemosesErudition

문화적 병폐를 치유하는 것은 사람을 세우는 일이기에 ‘연극에서 교육을’ 추구하고, 인간의 도야는 인지-정서-심동의 총체적 변혁과 연계되기에 ‘교육에서 연극을’ 지향한다. 양자의 연합은 치유 즉, 인격의 성화를 목적으로 한다.

* ‘듬직이’의 서울교대 대학원 입학을, 주께 진정 감사드린다. _ 2011. 2. 11(금)

: 5:06 pm: bluemosesErudition

1. “자아는 내 경험의 역사가 만들어가는 스토리텔링이 아닐지. 스토리는 내가 만들 나름. 그래서 인문학이 필요할께지.” “고등사고는 반사적 행동에 브레이크를 거는 것! 자극뉴런의 신호에 대해 즉시 반응하는 건 하등동물의 흔적. … 자극을 제어하고, 모으고, 묶고, 종합평가해서 반응하려면 시간이 걸리는 법. 이걸 ‘생각’이라고 하지 않을까?” “자극과 반응은 주로 무의식 경로를 통해 이루어지지만 ‘wait a minute’을 외치는 생각은 의식의 테이블 위에서 이루어짐. 학교학습의 대부분은 무의식적 자극들을 의식의 테이블 위로 옮겨 놓는 특징을 가지지 않을까?” “학습을 탐색할 때 ‘자아’와 ‘의식’이라는 두 키워드에 주목할 필요가 있는데 … 내가 볼 때 지금까지의 교육연구는 이 두 개념을 성공적으로 이해하지 못한 것 같다.”(100718)

2. “빈대 잡으려다 초가삼간 태운다는 말은 곧 지금의 학교 내신제도를 두고 하는 말이다. 점수 부풀리기를 막기 위한 상대평가 제도는 1등급을 제외한 나머지 학생들에게 깊은 좌절감과 절망감만 심어준다. 해도 안되는 것을.”(100720) “양극화로 치닫는 우리 사회는 중산층 살리기. 1등만 알아주는 우리 학교에서는 중간층 살리기. 4~5등급 아이들이 존중받는 학교문화가 필요하다. 중간층 아이들을 위한 특별교육 프로그램이 필요하다. 그들이 곧 우리 사회 중산층이 될 것이기 때문에.”(100825)

3. “2009년 교육과정 개정 및 2014년 수능 개정이 교육계를 또 한번 들쑤셔놓고 있습니다. 밀실기획과 MB식 밀어부치기가 거의 4대강 사업을 능가합니다. 특히 영수를 제외한 모든 교사들이 허탈감을 느끼고 있습니다.” “대학들이 남아돈다는데, 정말 대학 수준의 고등학교를 만들어서 우리 아이들을 보낼 수는 없을까요. 과목도 골라서 듣고, 수준 높은 강의도 듣고, 캠퍼스도 거닐고 말이지요. 고등학교는 이제 칼리지 개념으로 확 바꿔버렸으면. 투자도 왕창 하고.”(101113)

* 문득 ‘제한된 합리성’(Herbert Simon)과 ‘인지적 무의식’(George Lakoff)이 연상되었다.

: 4:52 pm: bluemosesErudition

기분파는 간사하다.

: 4:38 pm: bluemosesErudition

“위대한 지도자가 자신들을 구원해줄 것이라는 생각을 정치철학 용어로는 ‘결단주의’라고 하는데, 이는 정치적 행위가 개개인의 일상에서 멀어져서 무력감을 느낄 때 흔히 발생합니다. 자신의 의지에 따른 행위로 정치를 바꿀 수 없다고 느낄 때, 정치가 더 이상 직접적인 접촉을 통해서 이루어지지 않고 일종의 볼거리로 전락할 때, 사람들은 결단주의에 빠져 메시아를 기다립니다.”(강유원, 2010: 150) _ Karl Schmitt(1934)《Über die drei Arten des rechtswissenschaftlichen Denkens》

* 무력감에 침륜해 있을 때, 결단주의 외에 무엇을 추구할 수 있을까. “시편은 좌절을 몰아내는 방법을 말합니다. … 비결은 하나님의 보좌를 바라보는 것입니다.”(배영진, 2011. 02. 06) 결단주의가 ‘기계장치의 신’(Deux ex Machina)에게 현실의 지양을 호소한다면, 복음주의는 구조와 행위를 주관하시는 그리스도께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