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chive for July 7th, 2014

July 7, 2014: 4:03 pm: bluemosesErudition

“나는 여기서 세간에서 제기된 의혹 외에 김 후보자와 같은 교육학 교수로서 느끼는 교육학계의 문제를 엄중하게 짚고자 한다. 그가 교육부 장관 후보에 지명된 근거가 무엇일까를 곰곰이 따져본다. 그는 장관 후보자로서 신뢰를 보낼 만큼의 이렇다 할 학문적 지명도나 사회경험, 행정경력을 갖춘 것 같지 않다. 다만 한 가지 눈에 띄는 것은 그가 현직의 한국교육학회장이라는 사실인데, 이것이 후보로 지명되는 데 중요한 배경이 되었을 것이다. 모든 교육 관련 연구학회를 총괄하는 모학회인 한국교육학회의 회장이라는 직함은 그 자체로 교육계 최고의 학문적 권위를 드러낸다. 외부에서 이런 기대와 평가를 할 것임은 당연하고, 실질이 그러해야 한다. 그런데 김명수 후보자의 경우 학문적 지명도나 세간의 의혹 등을 전체적으로 고려할 때 학회장에 적합한 인물이었는가에 대한 의문부터 생긴다. 그가 어떻게 한국교육학회장이 되었고, 나아가 장관 후보자까지 오르게 되었을까.”

“이번 개각 인사 이후 일부 신문(경향신문 6월16일자와 조선일보 6월17일자)에서 중요하게 다룬 문제 중의 하나가 서울대 사대(교육학과) 마피아에 관한 것이었다. 현재 거론되는 장관 및 교육수석 후보자가 입각한다면 교육 관련 5대 권력기관장이 모두 서울대 교육학과 출신이 되는 상황에 의문을 품고, 그 배경으로서 그 학과의 마피아적 권력 접근 행태를 비판한 것이다. 기실 이들은 유사한 예를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의 끈끈한 동문 의식을 가지고 선후배가 이어가면서 권력기관을 잠식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 대표적인 국책교육연구기관인 한국교육개발원의 원장직은 마치 학과 부설 연구소장 자리마냥 이들 동문이 승계해 가는 것으로 유명하다. 그런데 이들이 권력기관에 접근하는 데 가장 든든한 발판으로 삼는 것이 한국교육학회장이라는 직이다. 한국교육학회의 역사는, 학회장을 지낸 서울대 교육학과 인맥들이 대거 장관급으로 입각해 간 사실을 잘 보여준다. 이에 이들에게 권력으로 가는 디딤돌로서의 한국교육학회장이라는 직은 결코 양보할 수 없는 자리가 된 것 같다. 수십년간 한국교육학회장직은 마치 서울대 교육학과 동문회장 자리인 듯 그 동문이 아니면 거의 접근할 수 없게 되었다. 몇 대에 걸친 전전직, 전직, 현직은 물론이고 차기직 회장도 그 동문으로 이미 세워져 있다. 차차기 회장 피선이 유력한, 10여명의 부회장 명단도 동문회 명부 수준이다.”

_ 연세대 교육학과 교수 황금중(경향신문, 2014. 7. 7.)

: 11:29 am: bluemosesErudition

1. 하나님의 뜻에 관한 두 권의 책이 있다. 하나는 Gerald L. Sitter의 The Will of God as a Way of Life: Finding and Following the Will of God이고, 다른 하나는 Henrry T. Blackaby의 Experiencing God: How to Live the Full Adventure of Knowing and Doing the Will of God이다. 양자 모두 하나님의 뜻을 알고 행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2. 제랄드 싯처의 “오늘, 여기서, 그분을 위해”는 “언제, 어디서나, 주님과 동행”으로 환언할 수 있는가. 블랙가비의 조언은 답변의 실마리를 제공한다. “당신은 경험만으로 인도되도록 자신을 방치해서는 안됩니다. 당신은 전통, 방법, 공식 등으로 인도되도록 허락해서는 안됩니다. 사람들은 대개 이런 것들이 쉽기 때문에 이런 것들을 의지합니다. 사람들은 자기 좋을 대로 일을 해놓고 모든 것의 책임을 하나님께 돌립니다.”

3. 우리는 시대의 한계 속에서 현재의 렌즈로 하나님의 뜻을 재단하고 추구한다. 이러한 입장에서 행하는 열심은 숨겨진 섭리의 실현이 아니다. 물론 “계획하는 것이 무조건 다 나쁘다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당신에게 원하시는 것 이상의 계획까지 세우지 않도록 조심하라는 말입니다. 언제라도 원하시면 하나님이 당신의 계획에 간섭하시고 진로를 조정하시도록 허락하십시오.”

4. 하나님의 뜻은 그것이 명시적이든 암묵적이든 언제나 이미 순종을 요청한다. 이것은 부단한 혁신이자 자기부인이다. 종종 하나님의 뜻을 언급할 때 일반계시 내에서의 자유를 강조하는 경우가 있는데 자의적 해석은 시정되어야 하며, 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 의지(will)와 기호(like)의 구별이 선행되어야 한다.

5. 선택에 방점을 두면 하나님의 뜻은 기호의 영역으로 환원되어 모호해지고 우리는 길을 잃고 만다. 다시 말하자면, 하나님의 뜻은 성서에 계시된 일종의 도덕률로 치부되고, 각자의 욕정이 시대의 자장 가운데 제 스스로 부여한 명분과 결합되어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뜻으로 올라선다.

6.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뜻? 이것은 치명적인 오류를 내포한 비문이다. 지향의 전환. 주체와 객체의 전도. 우리가 하나님의 뜻에 동참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무엇을, 어떻게’에 치중함으로써 나의 영광이 곧 하나님의 영광이요, 나의 영광을 하나님께 돌림으로써 소명에 부응하였다고 오인하게 된다.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뜻은 없다. 하나님의 뜻이 있고 각 사람에게 말씀하시는 바에 순종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관건이다.

7. 그럼 우리는 어떻게 그리스도인이 되어 가는가. 제랄드 싯처의 <하나님의 뜻>이 그 진정성에도 불구하고 역설을 모순으로 남겨 두었다면, 헨리 블랙가비의 <하나님을 경험하는 삶>은 모순이 역설이고 성화가 삶의 조정임을 자각하도록 인도한다.

: 1:56 am: bluemosesErudition

하나마나한 소리가 횡행하고 있다. 무언가를 읽지 않아도 아는 바를 어떤 것의 권위를 빌려 말하는 것은 위선이다. 텍스트의 진의와 본인이 추구하는 바를 동일시 하는 것은 오독 아닌가.

: 1:52 am: bluemosesErudition

부지중에 입 밖으로 새어 나온 것은 욕지기였다. 한 가지 비유. 내리막길, 사양산업. 수년 내에 업종전환이 불가피하다. 그러나 현상유지에 급급하다. 진정한 혁신에 이르지 못하는 미봉적 개혁에 머물러 있다. 여력이 없다. 자원확보, 기술개발 등이 절실하나 눈을 뜬 채 몰락을 맞이하고 있다. 여기서 울분이 치솟는다. 자기통제와 제어가 허물어진다. 전쟁 시 이상행동과 유사한 메커니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