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들의 한과 여경들의 추억이 담긴 그곳에 곧 세계 최대 규모인 765㎸ 고압 송전탑이 들어설 예정이다.”
“할머니들의 한과 여경들의 추억이 담긴 그곳에 곧 세계 최대 규모인 765㎸ 고압 송전탑이 들어설 예정이다.”
1JN 4:10 ESV
In this is love, not that we have loved God but that he loved us and sent his Son to be the propitiation for our sins.
“당혹스럽게 들릴지 모르나, 선거 그 자체는 민주적인 제도가 아니다. 애초 선거는 귀족정을 뒷받침했던 대표 선발 제도였고, 순수 제도론적 관점에서 보더라도 상층 편향적인 효과를 가진다. 투표자와 선출된 자 사이에 아무런 매개 없이 선거가 치러진다면 특출한 후보가 선호되고 그런 특출함은 교육과 재산 등의 이점을 통해 만들어진다. 엘리트(elite)라는 말이 선거(election)와 같은 어원을 갖게 된 것은 그 때문이다. 대의제 역시 그 자체로 민주적인 제도가 아니다. 대의제의 역사적 기원은 중세에 있다. 그렇기에 당시의 역사 속에서 삼부회나 신분의회와 같은 대의기구는 물론 선거를 통해 뽑히는 왕과 제후의 사례를 자주 볼 수 있다. 그런 대의제와 선거가 민주적인 제도가 된 것은, 귀족이 아닌 가난한 보통사람들도 자유롭고 평등하게 참여할 수 있는 권리를 갖게 되고 그 기초 위에서 자신들의 이익과 열정을 조직할 수 있는 결사체를 만들 수 있게 된 후였다.”
“정치가 결사체적 기반을 상실하고 개인화될수록 사회는 불평등해진다. 민주주의는 시민을 위한 시민의 정치를 하겠다는 사람이 많아져서가 아니고, 갈등하는 이해당사자들 사이에서 다원적 결사체들이 사회적 균형을 형성할 수 있을 때 좋아진다. 비정규직이든 빈곤층이든 그들이 향유해야 하는 결사의 자유와 교섭 능력이 좋아지는 것 없이, 제아무리 개인적 야심 없는 정치가를 선출하고 그들이 시민을 위한 행정을 펼친다 한들 사태가 개선되지는 않는다. 우리사회의 경험을 돌아보더라도, 그간 복지예산은 계속해서 늘었지만 빈곤과 불평등 문제는 악화됐다. 정규직으로의 전환 사례는 늘었지만 역설적이게도 비정규직 문제는 더 나빠졌다. 사회적기업과 협동조합 관련 제도도 확장됐지만 한국경제가 자유롭고 공정해지지는 않았다. 무상급식도 실시되고 학생인권조례도 만들어지고 대안학교나 혁신학교와 같은 실험이 있었지만 교육문제가 좋아진 것도 아니다. 아마 앞으로도 서민을 위하고 비정규직을 보호하고 빈곤층과 약자를 대변하겠다는 정치가들은 많을 것이다. 그러나 정책의 수요자로서 이해당사자들이 자신들의 요구를 조직할 권리는 강화되지 않은 채 정책의 공급자가 갖는 선의만 앞세워진다면, 그것이 온정주의일 수는 있어도 민주주의와는 관련이 없다. 온정주의는 오히려 권위주의의 다른 얼굴일 때가 많다.”
_ 도서출판 후마니타스 대표 박상훈(경향신문, 2014. 7. 7.)
“파커 파머(P. Palmer)는 객관주의적 인식의 구조를 ‘사실’, ‘이론’, ‘객관적’, ‘실재’ 등의 핵심 개념들의 희랍어 및 라틴어 어원 분석을 통해 체계적으로 설명한다. 첫째, ‘사실(fact)’이라는 말은 ‘만들다’라는 의미의 라틴어 ‘파케레(facere)’에서 온 말이다. 이 말은 모든 ‘사실’이 창조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인간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며, 인식주체인 인간은 사실들을 가지고 실재를 만들어 가는 창조자로 간주되며, 인간이 만든 사실들만이 실재로 여겨짐을 시사한다. 둘째, ‘이론(theory)’이라는 말은 ‘관중’을 뜻하는 희랍어 ‘theoros’에서 나온 말이다. 이 말은 앎의 대상이 ‘저쪽’ 무대 위에 있으며, 인식주체는 앎의 대상과 멀리 떨어져서 진리를 관조적으로 추구하는 관중 또는 관람자로 간주됨을 뜻한다. 셋째, ‘객관적(objective)’이라는 말의 라틴어 어원은 ‘…에 맞서다, …에 대항하다’는 의미를 가진다. 이것은 인식주체가 인식대상을 자신의 필요대로 조작하고 지배하는 적대적 관계임을 내포한다. 넷째, 지식의 판별 기준이 되는 ‘실재’라는 말의 어근은 재산, 소유물, 물건 등을 의미하는 라틴어 ‘res’이다. 이 말은 실재를 아는 것은 사물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고 그것들을 소유하고 지배하는 것이며, 인식주체는 인식대상을 조작하고 지배하고 소유하는 관계를 가지게 됨을 뜻한다.”
“과학은 믿을 만한 지식의 전형으로 간주된다. 왜 그럴까? 대다수 사람들이 과학자가 사용하는 ‘특별한’ 방법을 그 이유로 들 것이다. 과학자들은 ‘과학적’ 방법을 엄격하게 적용하여 연구를 수행하기에 그 결과가 참임이 보장된다는 것이다. 대표적인 과학적 연구방법으로는 귀납법과 가설연역법이 거론된다. 귀납법은 여러 사실을 다양한 조건에서 관찰한 후, 이를 조심스럽게 일반화하여 귀납적 지식을 얻는 방법이다. 이에 비해 가설연역법은 특정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가설을 세운 후, 그 가설로부터 연역되는 새로운 현상을 관찰이나 실험으로 검증함으로써 가설의 진위를 결정하는 방법이다. 귀납법과 가설연역법은 분명 과학 연구에서 널리 사용되는 방법이긴 하다. 하지만 이 두 방법이 과학의 진리성을 보장해 준다고 보기는 어렵다.”
“우선 귀납법은 아무리 엄밀하게 적용되더라도 시간과 공간적 제약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오랜 기간 하얀 고니만 보아왔던 유럽 과학자들은 흰색을 고니의 ‘본질적 속성’이라고까지 생각했다. 마찬가지 이유로 우리도 고니를 백조라 부른다. 하지만 지구상의 보다 넓은 지역을 탐색하던 유럽인들은 호주에서 까만 고니를 목격하게 되었고 ‘검은 백조’가 형용모순이 아님을 그제야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
“가설연역법도 사정은 다르지 않다. 19세기 초 과학자들은 빛이 아주 작은 알갱이의 집합인지, 호수에 던진 돌이 일으킨 물결 같은 파동인지를 두고 논쟁을 벌였다. 이때 빛의 입자설을 지지하던 푸아송은 빛이 파동이라면 완벽한 원반에 정면으로 빛을 비추면 생겨나는 까만 그림자의 정중앙에 밝은 빛의 점이 나타나야 함을 지적했다. 푸아송은 이런 말도 안 되는 현상이 빛의 파동설로부터 연역된다는 사실이 파동설이 거짓임을 증명한다고 생각했지만, 정작 이 ‘푸아송 점’은 아라고의 실험에 의해 관찰되었고 동시대 과학자들은 이를 빛이 파동임을 입증한 ‘결정적 실험’으로 간주했다. 하지만 현대 물리학에 따르면 빛은 고전적 의미의 파동도 아니고 입자도 아니다. 대신 측정 상황에 따라 파동적 성질과 입자적 성질을 번갈아 보여주는 기묘한 양자적 실체이다. 결국 훌륭한 가설연역적 방법으로 확립된 빛의 파동설조차 진리성을 보장받을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과학을 믿을 만하다고 믿는 근거는 과학적 방법이 과학의 진리성을 보장해주기 때문일 수는 없다. 그 근거는 엄밀하게 검증된 증거를 통해 과학자들이 서로 경쟁하는 주장의 신뢰성을 공동체적 평가를 거쳐 결정한다는 사실에서 찾아야 한다. 과학자들은 특정 주장을 받아들이기 전에 반드시 경험적 증거나 이론적 증거를 요구한다. 물론 증거를 평가하는 과정에서 개별 과학자는 오류를 범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오류는 (거의 대부분) 다른 과학자의 날카로운 검토 과정에서 걸러지게 된다. 그렇기에 과학지식은 근본적인 수준에서 ‘사회적’이다. 과학지식은 천재적 과학자의 뛰어난 마음의 산물이라기보다는 제시된 여러 증거를 학문 공동체가 상호비판을 통해 엄정하게 평가함으로써 얻어진 ‘집단지성의 산물’이다. 과학이 믿을 만한 이유는 그것이 항상 참이기 때문이 아니라 힘들게 수집되고 치열하게 검토된 증거에 의해 지지되기 때문인 것이다.”
“과학을 믿을 만하게 만들어주는 특징이 ‘증거기반 집단지성’임을 이해하고 나면, 과학은 참/거짓이 너무나 명백하기에 과학자들 사이의 논쟁은 이전투구일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나 어차피 과학자들도 잘 모르는 내용이니 각자가 알아서 결정하면 그만이라는 생각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 알 수 있다.”
_ 한양대 과학철학 교수 이상욱(경향신문, 2014. 7. 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