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커다란 학교에서 사안을 뭉개지 않고 적절한 시기에 관련된 이들에게 명확히 말하는 법을 배우고 있다.
하나님의 커다란 학교에서 사안을 뭉개지 않고 적절한 시기에 관련된 이들에게 명확히 말하는 법을 배우고 있다.
악은 선의 부패로 인한 그것의 결핍이다. 성 아우구스티누스에서 칼 바르트, 더 나아가 C. S. 루이스에 이르기까지 견해가 일치한다. 어찌하여 선에서 악이 파생하는가. 성경은 교만을 지목한다. 즉, 신이 되고자 하는 인간의 욕망. 얄궂게도 초인 사상이 맨 앞에 신의 죽음을 선포하는 까닭은 여기에 있다. 민망한 일이다. 무수한 저들에게 《죄와 벌》을 권한다.
그리하여 룻은 밭으로 나가서, 곡식 거두는 일꾼들을 따라다니며 이삭을 주웠다. 그가 간 곳은 우연히도, 엘리멜렉과 집안간인 보아스의 밭이었다. 그 때에 마침 보아스가 베들레헴 성읍에서 왔다. 그는 “주님께서 자네들과 함께 하시기를 비네” 하면서, 곡식을 거두고 있는 일꾼들을 격려하였다. 그들도 보아스에게 “주님께서 주인 어른께 복을 베푸시기 바랍니다”하고 인사하였다.
“굳이 단 하나의 보험만 가입할 수 있다고 가정한다면, 전문가들은 실손의료보험을 첫 손에 꼽는다. … 만약 조금 더 여유가 있다면, 가족력 등을 감안해 특정 암보험이나 뇌질환 등을 보장하는 보험에 가입하는 것도 좋다.” ”실손보험은 실비 개념으로 의료비 등을 보상해 주는 보험이고, 암보험은 병에 걸린 이후 치료비가 아닌 생활 자금을 보전해 준다고 보면 이해가 쉽다.”
분당은 어떤 명분으로도 정당화될 수 없었습니다. 분당을 통한 개혁신당론의 핵심 아이디어가 힘센 새 친구를 얻기 위해 그 자가 싫어하는 옛 친구를 버리자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당신을 비롯한 신당 추진파는 ‘망국적 지역주의’의 해소를 정치적 명분으로 내세웠지만, 당신들이 그 거룩한 명분의 실현을 위해 고른 길은, 얄궂게도, 영남패권주의에 사실상 굴복하고 영합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과정을 노무현 대통령은 방조하거나 북돋우거나 지휘했습니다.
돌이켜보면, 지금 제1야당의 지지부진함과 내분의 뿌리가 바로 2003년의 민주당 분당이라는 것이 또렷이 드러납니다. 분당 뒤에 뭘 크게 잘못했다기보다 분당 자체가 문제였던 겁니다.
분당이 아니었다면 호남과 노무현 대통령 사이가 지금처럼 데면데면해지지 않았을 것이고, 분당이 아니었다면 대한민국 여당과 제1야당의 주류가 모두 영남패권주의 세력으로 채워지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분당이 아니었다면, 당신이 광주에서 새정치민주연합 후보와 대결하며 ‘호남정치’의 복원을 내세울 일도 없었을 것입니다.”
당신이 2003년 민주당 분당을 사과하지 않는다면, 저는 당신의 ‘호남정치’를 신뢰할 수 없습니다. 분당의 가장 참혹한 결과는 호남 유권자들을 친노 영남패권주의 세력의 인질로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당신은 호남 유권자들에게, 그리고 이 나라 민주주의 세력에게 깊이 사과해야 합니다. 당신이 주도한 그 분당 때문에, 호남 유권자들은 노예의 도덕을 내면화해야 했습니다. 선거 때마다 친노가 주류인 새정치연합에 몰표를 주지만, 새정치연합 주류는 영남패권주의를 버릴 생각이 없습니다. 호남 유권자들에게 돌아오는 것은 비웃음뿐입니다.
_ 고종석, 천정배 의원께(경향, 2015/12/21)
도덕은 어디서 오는가. 이 물음과 씨름하며 칸트는 종교와 절연했고 프로이트는 종교로 귀환했다.
종교는 철학의 끝에서 시작한다. 종교란 무엇인가. 그것은 실재의 표상에 대한 해석일까.
“It does not simply give as much, or keep as much distance, as possible without feeling burden. If God only loved us sensibly, there would be no incarnation and no cro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