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chive for January, 2018

January 26, 2018: 1:38 am: bluemosesErudition

어려서 나는 램프불 밑에서 자랐다,
밤중에 눈을 뜨고 내가 보는 것은
재봉틀을 돌리는 젊은 어머니와
실을 감는 주름진 할머니뿐이었다.
나는 그것이 세상의 전부라고 믿었다.
조금 자라서는 칸델라불 밑에서 놀았다,
밖은 칠흑 같은 어둠
지익지익 소리로 새파란 불꽃을 뿜는 불은
주정하는 험상궂은 금점꾼들과
셈이 늦는다고 몰려와 생떼를 쓰는 그
아내들의 모습만 돋움새겼다.
소년 시절은 전등불 밑에서 보냈다.
가설극장의 화려한 간판과
가겟방의 휘황한 불빛을 보면서
나는 세상이 넓다고 알았다, 그리고
나는 대처로 나왔다.
이곳 저곳 떠도는 즐거움도 알았다,
바다를 건너 먼 세상으로 날아도 갔다,
많은 것을 보고 많은 것을 들었다.
하지만 멀리 다닐수록, 많이 보고 들을수록
이상하게도 내 시야는 차츰 좁아져
내 망막에는 마침내
재봉틀을 돌리는 젊은 어머니와
실을 감는 주름진 할머니의
실루엣만 남았다.
내게는 다시 이것이
세상의 전부가 되었다.

_ 신경림, “어머니와 할머니의 실루엣”, 1998.

January 25, 2018: 9:26 pm: bluemosesErudition

“그것은 인간의 독선이 어떻게 파국을 가져오는지, 인간이 다른 인간을 이해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를 알려주는 텍스트이기 때문이다. 각자 옳다고 믿고 행동하는 것이 타인에게는 전혀 다른 의미로 받아들여지는 것이 일상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안나 카레니나’가 첫 문장부터 말하는 불행한 가정과 행복한 가정의 이야기는 그에 대한 힌트다.”

: 4:42 pm: bluemosesErudition

유이치로 안자이. 게이오기주쿠 대학 총장, 일본학술진흥회 이사장, 중앙교육심의회 회장 역임

: 12:43 pm: bluemosesErudition

“실패는 당연한 것이요, 필수적인 것이다. 실력이 탁월한 사람은 실패와 마음 편하게 공존하는 법을 터득한 사람이다. 탁월한 사람은 평범한 사람보다 더 많이 실패한다. 더 많이 시작하며 더 많이 시도하고 더 많이 공격한다. 통달은 언제나 실패의 산 정상에 조용히 앉아 있다.”(에릭 그레이튼스)

: 3:18 am: bluemosesErudition

“아버지가 그랬다 시란 쓸모없는 짓이라고. 어느날 아버지가 다시 말했다. 기왕이면 시작했으니 최선을 다해보라고. 쓸모없는 짓에 최선을 다하는 것, 이게 나의 슬픔이고 나를 버티게 한 힘이다.”(손택수)

January 24, 2018: 2:17 am: bluemosesErudition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

장님처럼 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
가엾은 내 사랑 빈집에 갇혔네

_ 기형도, 「빈집」, 『입 속의 검은 잎』, 문학과지성사, 1989.

January 23, 2018: 10:51 pm: bluemosesErudition

등한하다. 무엇에 관심이 없거나 소홀하다.

: 2:23 pm: bluemosesErudition

“What no eye has seen, nor ear heard, nor the heart of man imagined, what God has prepared for those who love him”— 1 Corinthians 2:9

January 22, 2018: 4:48 pm: bluemosesErudition

“내용이 나쁘려면 일단 내용이 있어야 합니다. 내용이 없는 글을 가지고 내용이 나쁘다고 비판하면, 존재하지 않는 것을 존재한다고 가정하는 오류를 범하는 겁니다.”(김영민)

: 4:24 pm: bluemosesErudition

창의성 계발에 왜 ‘쓰기’를 강조할까. 서울대 심리학과 박주용 교수는 철학자 베이컨의 말을 인용해 “독서는 완전한(full) 사람을, 토론은 준비된(ready) 사람을, 쓰기는 정밀한(exact) 사람을 만든다”며 “독서와 토론과 쓰기는 창의적 사고를 위해 갖춰야 할 기본”이라고 말했다. “글을 써봐야 생각이 정리되고 무엇보다 ‘내가 어디까지 정확히 알고 있는가’가 명확히 드러납니다. 말로는 안다고 하는 내용도 글로 옮기려면 어디까지가 한계인지 극명하게 나타나죠. 그제야 내가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을 명확히 파악하고 그때부터 새로운 생각, 즉 창의성이 발현하는 것입니다.”

‘창의성 교육을 위한 교수 모임’의 일원인 박 교수는 “대학 교육은 토론과 글쓰기 위주로 이뤄져야 한다”는 지론하에 본인 강의를 그렇게 하고 있다. 박 교수는 매주 수업 시간마다 학생들에게 다음 주에 토론할 주제를 제시한다. 예컨대 ‘대입 시험을 지능검사 시험으로 대체하면 어떨까’라는 주제와 함께 ‘사이언스’ 같은 잡지 기사 스크랩 등 관련 읽을거리를 준다. 정답이 있는 질문이 아니기 때문에 학생들은 며칠씩 고민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A4용지 한 장 정도로 답안을 작성해 온라인 강의 시스템에 올리면, 다른 학생들이 읽고 평가하는 방식이다. 모든 학생이 각각 임의로 배정된 다른 학생 서너 명의 글에 대해 평가를 남긴다. 박 교수는 “매주 쓰기 과제가 있으니 각 학생은 한 학기에 12~13장 분량의 글을 쓰는 셈”이라며 “암기 위주의 입시 교육만 받아온 우리 학생들에게 쉬운 과제는 아닐 것”이라고 말했다. 수업 당일에는 학생들이 3~4명 규모의 소그룹별로 토론을 벌인다. “타고난 지능에 의한 위계질서를 조장할 것”이라거나 “이미 우리 대학 제도가 그런 사회를 만들었다” 같은 갑론을박이 오간다. 박 교수는 학생들이 올린 글 중에 좋은 것 몇 가지를 수업 시간에 소개할 뿐이다. 이따금 학생 사이를 오가며 어떤 토론이 오가는지 귀를 기울이기도 하지만 개입은 최소한만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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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의 탄생>에서 로버트 루트번스타인은 말한다. “교육에서 ‘무엇’과 ‘어떻게’의 결별은 곧 어떤 것을 ‘안다’는 것과 ‘이해한다’는 것이 분리되는 결과로 나타난다. … 어떤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은 그것을 실제로 ‘어떻게’ 응용해야 할지를 모른다는 것이며, 그것을 ‘어떻게’ 다루어서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야 할지를 모른다는 것이다. 그들의 지식은 실로 허약하며 쓸모 없고, 교육적 실패의 결과물에 불과하고 겉만 번지르르한 학문적 성취의 외장일 뿐이다.” 하여 그가 인용한 고대 중국의 격언은 울림이 크다. “나는 듣고 잊는다. 나는 보고 기억한다. 나는 행하고 이해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