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폭력 저항. 비폭력은 무저항을 의미하지 않는다. 무저항주의는 오역이며 바보짓이다.
비폭력 저항. 비폭력은 무저항을 의미하지 않는다. 무저항주의는 오역이며 바보짓이다.
13일 시교육청에 따르면 지난 7월8일부터 8월7일까지 고려고에 대해 특별감사를 실시한 결과 학사 운영과 학생 평가를 파행 운영한 것으로 나타났다.
먼저 3학년 지필고사 2차 ‘기하와 벡터’는 수학동아리에 배부된 유인물 중 5문항이 출제돼 이미 재시험이 실시됐다. 또 2018학년도 1학년 지필고사 ‘수학’의 경우 ‘절대등급(상·하)’에서 8문항, 토요논술교실 유인물에서 1문항이 출제된 것이 확인됐다. 이 문항들의 경우 방과후학교 ‘수학 최고급반’에서 교재로 사용된 의혹이 불거져 수사 의뢰할 예정이다. 특히 수학 교과의 경우 2017~2019학년도 학생들이 본 시험문제 중 난이도 높은 197개 문항을 조사한 결과 150개 문항이 문제집, 기출문제와 완전히 일치했다. 국어 교과도 2018~2019학년도 평가 문항을 조사한 결과 16개 문항이 완전 일치하거나 부분 일치해 평가의 공정성이 훼손된 것으로 파악됐다. 다만 해당 문제들이 특정 학생에게 사전에 제공되었는지는 확인되지 않았다. 서술형 평가의 경우 채점기준표를 문항 출제와 함께 사전 결재해야 하지만 해당 학교에서는 학업성적관리위원회에서 채점기준표를 채점 이후 결재하도록 한 사실도 드러났다. 교사가 채점기준 없이 자의적으로 채점을 진행했고, 이로 인해 동일 답에 다른 점수를 부여하거나 근거 없는 부분 점수를 주기도 했다. 특히 정답을 오답 처리하는 등 공정한 평가를 위해서 결코 있어서는 안 되는 채점오류가 다수 발견돼 감사 기간 중 해당학교에 시정 조치를 요구했다.
최상위권 학생들을 특별 관리한 정황도 드러났다. 1·2·3학년 모두 성적순으로 우열반을 편성 운영했으며, 기숙사 운영에 있어서도 사회적 통합대상자와 원거리 통합 대상자에 대한 고려 없이 성적우수 학생을 기숙사생으로 선발했다. 성적우수자들로 구성된 기숙사 학생들에게는 일반 학생들은 선택권이 없는 과목별 방과후학교, 자율동아리, 토요논술교실까지 연계해 심화된 교육활동을 특혜 제공했다.
교육과정도 파행 운영됐다. 대학입시에 유리하다는 이유로 학생들의 과목 선택권을 제한해 생명과학Ⅰ, 물리학Ⅰ, Ⅱ를 필수로 지정 운영했다. 다른 일반계 고등학교에서는 소수 학생만이 선택하는 물리학Ⅱ를 자연계열 전체 학생이 이수하게 해 최상위권의 내신 성적에 유리하게 작용했다. 또 ‘논술’교과와 ‘창의적 체험활동(진로활동)’을 영어와 수학으로 수업한 사례도 적발됐다.
시교육청은 특별감사 결과를 토대로 학교 관리자들을 중징계(교장 파면·교감 해임) 요구했다. 또 관련 교사 48명에 대해서는 비위 정도를 감안해 징계 및 행정처분을 요구할 계획이다.
“너무 은밀히 구조적으로 이뤄지다보니깐 일상적인 감사로는 발견하기가 어려워요.”
00. “무릇 훌륭한 시인은 ‘자유의 생산자’이자 ‘용서의 소비자’라는 것이 김도언의 생각이다. 그런데 자유롭다는 것은 세상을 이겼다는 것이고 용서한다는 것은 자기를 이겼다는 것 아닌가. 김도언이 그런 시인을 유독 경외한다는 것은 그가 그렇게 되고 싶어 한다는 뜻이고 또 아직은 그리 되지 못했다는 뜻이다. 바로 이것이다. 그가 세상과 자기를 다 이기지 못해 여전히 괴로워한다는 것. … 그래서 김도언의 산문은 지는 법이 없다. 완결된 인간은 자기를 좋아하는 사람을 기다리지만, 진행 중인 인간은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을 찾아다닌다.”(신형철)
24. “흔히 생각하는 글쟁이들이 다 집안 사연 많고, 어렸을 때 불우하고 그렇다고 생각하는데, 그게 우리나라만 그런 거예요. 그래서 농담으로 내가 소설가가 소설을 잘 쓰려면 많은 걸 먹어봐야지, 어렸을 때. 어렸을 때 먹은 게 별러 없는데 무슨 소설을 쓰냐. 심지어 가난해야 글 잘 쓴다고 하는데, 뭘 먹은 게 있어야 소설을 쓸 거 아니냐고 하죠. 외국 같은 경우에는 셰익스피어가 기점이야. 자본주의화나 근대화되면서 돈벌이도 좀 있고, 먹고살 걱정을 좀 덜하고 이래야 글 좀 쓴다고 하지. 나처럼 든든한 원군인 아내가 있거나. 맨날 부부싸움 하면서 그게 되나. 우리나라는 그런데 그게 아직도 강해요. 나는 그런 친구들한테 그건 너희가 근대화가 덜 되서 그렇다고 하지.”(김정환)
27. “그게 근대화라니까. 그래서 내가 서정주를 무시하는 게 아니라 그건 근대 이전의 시라고 하는 거예요. 거기에는 먹고사는 문제가 없어요. 그래서 서정주를 좋아하는 건 좋은데, 괜히 흉내 내려고 하다가 지금이 어느 시대인지도 모르는 이야기, 서정주만 못한 시를 쓰게 된다는 거지. 김소월도 마찬가지예요. 그 사람도 자살해버린 사람이잖아. 끝까지 살려고 노력한 사람 이야기가 아니라는 거야. 김소월 시에 사는 이야기가 어디 있어.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이거 사는 이야기가 아니잖아.”(김정환)
28. “근대화야. 근대화. 음풍농월이 없잖아. 사는 이야기고. … 김수영 때문에 근대화될 뻔했는데. 요새는 김수영 존경하는 사람은 많고 극복하려는 사람이 없어서 그게 문제지.”(김정환)
31. “죽는 사람의 그때 그 심정이 뭘까. 이것 하고 문학의 정체성 하고, 김수영이 좋은 문학에서는 죽음의 리듬이 들린다고 한 것 하고. 이게 무슨 상관이 있을까. 한 십 년쯤 지나가지고 내가 여태 거기 매달려 있었구나. 공적인 죽음이란 무엇인가. 당시에는 바빠서 모르다가 약간 시간을 가지니까. 문학이라는 것이 사실 공적인 죽음하고 연관이 있는 게 아닐까. 이야기가 바로 죽음이다, 이런 이야기를 내가 한 적이 있었는데 그건 모르고 한 말이고. 쉽게 이야기하면 죽음이 있으니까 이야기가 생겨난다는 것일 수도 있고, 그게 아니면 이야기 자체가 죽음을 받아들이는 하나의 제의다, 더 나아가서 문학이라는 것 자체가 살아 있을 때 할 수 있는, 죽음을 극복할 수 있는 가능성이다, 그래서 문학이 공적인 죽음하고 어떤 연관이 있지 않을까, 돈도 안 되는데 죽어라 문학을 한다는 게 뭘까 …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거지.”(김정환)
32. “사실 대학 국문과 가보면 우리나라가 한글 쓴 지 얼마 안 돼서 공부할 게 별로 없어. 그러니까 계속 서정주고 김소월이야. 기껏해야 이상이고. 영국 같은 경우는 영어로 글 쓴 게 오백 년이잖아. 근대화라는 게 자기 나라 방언이 국어가 되는 거라고. 프랑스엔 몽테뉴가 있고, 영국에는 셰익스피어가 있고. 오백 년이란 말이야. 그런데 우리나라는 백 년밖에 안 됐거든. 그런데 국문과가 엄청 많아요. 이것들이 다 먹고 살아야 돼. 그래서 그런 사람들이 이해가 다 돼.”(김정환)
38~39. “글을 열심히 쓰는 것밖에 더 뭐가 있겠어. 자본주의라는 게 그렇잖아. 자본주의를 우리가 극복할 수 있을진 몰라도 도망칠 수는 없어. 들뢰즈가 탈주 어쩌고 하더니 결국 자살하잖아. 탈주를 못해서. 결국 죽음까지 삶의 영역에 끌어들인 거 아니야. 그러니까 자살을 했지. 철학의 결론인거지. 탈주가 불가능하니까. 누구나 자본주의 속에서 살고. 그건 일제강점기도 마찬가지야. 친일파들 너무 야단치는 것도 내가 싫어하거든. 내가 보기에는 박정희 때 열심히 민주화 운동했던 사람이 전두환으로 바뀌니까 그 중 3분의 2가 포섭이 되고, 전두환 때 열심히 민주화 운동했던 사람이 노태우로 바뀌니까 3분의 2가 또 포섭이 되고. 정치권까지 포섭된 걸로 치면 99퍼센트가 포섭이 된 것지. 그래서 내가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 일제는 삼십육 년인데 내가 민주화 운동 십 년 딱 해보니까 포섭이 안 되는 사람이 없는 거야. 그렇게 십 년 살아보니까 욕할 게 아니더라고, 아주 나쁜 놈 말고는. 그렇게 사는 거지. 그렇게 사는 게 모멸인 거지. 모멸이잖아? 그런데도 왜 사나. 그런 질문을 쓸데없이 던지는 게 문학이다…… 그것도 남이 아니라 자기한테.”(김정환)
46. “기품이라는 말을 생각할 때, 내가 제일 먼저 떠올리는 사람이 황인숙이다. 그는 누구 앞에서도 움츠러드는 법이 없고, 누구 앞에서도 젠체하는 법이 없다. … 내면의 견결한 자기긍정 없이는 힘들다.”(고종석)
58~59. 내가 아는 어떤 시인이 있는데, 이 사람은 좀 이기적이고 다른 사람한테 폐도 끼치고 그런 사람이야. 그런데, 언젠가 보니까 시가 예전보다 좋아졌던 거야. 그때 내가 곰곰이 생각해봤어. 어쩌면 악이거나 악과 유사한 그런 성향도 시에 도움이 될 수 있고, 그런 걸로 인한 사회의 반응이 있을 거 아니야. 자기 잘못에 대한 사회의 반응으로 따돌림을 당한다거나 그런 게 있거든. 물질적으로는 이익이 있을지 몰라도 정신적으로는 상처가 있을 거 아니야. 그런데 이런 게 이 사람한테는 좋은 시를 쓰는 자양분이 됐을 수도 있겠다 싶더라고. 그 사람이 그런 경우고. 선한 기운도 힘이 될 수 있지만, 그런 것도 이런저런 화학작용을 일으켜 좋은 시를 쓰는 데는 좋은 조건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 시 자체가 무슨 선악, 도덕 이런 건 아니잖아. 그냥 미적으로 훌륭하면 되는 거니까.
63. 황인숙 시인은 걸어서 올라가기 힘든, 해방촌 고지대의 옥탑방에서 고양이 세 마리와 함께 살고 있다. 그리고 매일매일 어떤 사역처럼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길고양이의 소외와 고통을 마주하러 다닌다. 이것이 시인이 짜둔 생활의 전선이다.
67. 그는 많은 자리에서 시인은 ‘받아 적는 존재’리는 말을 했다. 들려오는 말이 있을 때 시인은 그것을 받아적을 뿐이라는 것이다. 예컨대 외부로부터 음악과 시어가 폭포처럼 쏟아져내릴 때 시인은 시를 토해낼 수 있지만, 그렇지 않을 때는 눈이 가려지고 손이 묶인 사람처럼 한 글자도 쓸 수가 없다는 것.
71~73. “정현종 선생이 사람과 사람 사이에 섬이 있다고 했는데, 지금은 모든 것 사이에 돈이 있습니다. (손가락 사이에 낀 담배를 들어보이며) 나하고 담배 사이에도 돈이 있습니다. 지금 나를 찍는 사진작가의 카메라하고 나 사이에도 돈이 있어요.”(이문재)
73. 그의 초기시 <우리 살던 옛집 지붕>에서 묘사된, 내성적인 목소리로 서사적 비의를 불러내는 독특한 감수성은 1980년대 시의 현장에서 듣기 어려운 섬세한 자기 고백의 목소리를 들려주는데, 거기에 깃든 서정의 힘은 자신의 허약함과 불안까지 모조리 껴안는 핍진성에서 연원하는 것임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75~77. “두말할 나위 없이 시는 세상을 바꾸는 데 기여해야 한다고 봅니다. 나는 지금 문학이 뭘 하고 있는지 잘 모르겠어요. (중략) 누가 그러는데요? 왜 문학이 수사고 간접화법이죠? 아니, 사람이 죽어가는 데, 지구 전체가 위기인데 그 상황에 대해 말하지 않고 하늘에 먹구름이 몰려온다고 에둘러 얘기해야 하나요?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 시인이 세상을 바꾸는 사람은 아니지만 시인들이 왜 이토록 무기력한 걸까요. 199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사회적으로 무슨 이슈가 되는 일이 일어나면 신문에서 시인이나 소설가들한테 글을 받거나 코멘트를 받았어요. 시인과 소설가들의 직관이나 지혜가 솔루션으로 받아들여졌던 거지요. 그런데 지금은 안 그래요. 그러니까 9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사회가 문학의 눈을 빌리고 문학의 역할에 의미를 부여했다는 거죠. 지금은 그게 없어졌어요. 내게는 이런 변화가 문학의 사회적 역할이나 위상이 작아졌다는 증거로 보이는 거예요. 문학의 사회적 위상이 약해졌다는 이야기를 하는 게 이상한가요?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게 이상한가요?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게 이상하다고 말하는 게 이상한 거 아닌가요?”(이문재)
78. “난 문학이 왜 이렇게 왜소해지고 초라해졌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왜소해진 걸 문학이라고 부르는 자들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소위 문학의 죽음은 문학하는 사람들의 죽음, 자살이라고 생각될 때가 많습니다. 내면적인 투항이겠지요.”(이문재)
79. 급진성이란 불가능한 것을 극복의 대상으로 상정할 때 성립되는 성질이다. … 그는 지금 불가능한 것과 바투 대치 중인 것이다.
80. “편력이 아니라, 그냥 받아쓴 겁니다. 그러니까 무당, 샤먼처럼요. 들려오는 걸 받아적은 거죠. 그런데 그게 언젠가부터 너무 힘들게 느껴졌습니다. 받아적는 사람이 아니고 내가 쓴 거라는, 시에 대한 저작권을 갖고 싶었던 겁니다. … 이십대 중반에는 하룻밤에 아홉 편을 받아쓴 적도 있어요. 이러다 죽겠구나 싶어서 뛰쳐나와서 술을 퍼마시곤 했습니다.”(이문재)
83~84. “나는 《녹색평론》 편집자문위원이기도 해요. 나는 여러 개의 얼굴을 가지고 있습니다. 나는 문학주의자가 아니에요. (중략) 《문학동네》 편집위원을 말하는 것 같은데, 그분들은 내가 존경하는 친구들입니다. 나는 그분들이 갖고 있는 문학관을 존중합니다. 이십 년 넘게 그분들로부터 많이 배웠고, 또 즐거웠습니다.”(이문재)
86. “난 정치 이야기를 하고 싶어요. (중략) 루소는 자유를 자기가 법을 세우고 그 법에 순종하는 거라고 말합니다. 문학 행위도 마찬가지 아닐까요? … 자기가 세운 법이 불가능하더라도 그걸 추구하는 게 문학이라고 봅니다. 사실, 병들고 타락한 세계, 멸망을 향해 질주하는 이 문명을 시인이 바꾼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불가능하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해야 합니다. … 불가능에 대한 추구를 말할 때마다 내가 소개하는 분이 있습니다. 지난 세기 중반 미국에서 활동한 기독교 아나키스트 애먼 헤나시(Ammon Hennacy, 1893~1970)입니다. 이 분은 일 인 시위One-Man Revolution의 창안자이기도 한데, 무슨 일이 생기면 뉴욕 거리에서 혼자 피켓을 들고 시위를 했습니다. 그럴 때마다 기자나 행인이 이렇게 물었습니다. ‘당신 혼자 그렇게 한다고 해서 세상이 바뀌겠느냐?’ 그때마다 애먼 헤나시는 씨익 웃으며 이렇게 답했습니다. ‘나도 안다, 나 혼자 이런다고 세계가 바뀌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 세계 또한 나를 바꾸지 못할 것이다.’ 내가 세계를 바꾸겠다는 각오보다 세계에 의해 내가 바뀌지 않겠다는 의지. 이 얼마나 고귀하고 당당한 태도인가요.”(이문재)
193~194. “독자와 유리되고 괴리된 그런 시들의 역할이 뭐냐고 나는 되묻고 싶은 거야. 독자는 무시하면서 평론가들이 줄세우기하는 시인들이 그런 말을 하는 거야. 어떤 위로도, 격려도, 치유도 되지 못하는 시를 내놓으면서. 그럼 시의 역할이 뭐냐고 물어보면, 어떤 의미의 확장 내지 언어의 확장, 세계의 확장이라고 대답하거든. 그렇게 무작정 확장만 하면 그 안에 뭐가 남는지 묻고 싶어. 지금의 시라는 것은 이미 이전 세대에 받아들여지던 그런 장르가 아니야. 이미 시인은 너무 많아졌는데 시는 남지 않았고, 독자들은 다 죽었잖아. 내가 심지어 이런 말을 한다고. 사람들이 죽지 않는 마을에 장의사만 난립하는 형태다. 평론가 남진우가 정확하게 말했지. ‘은퇴 시점을 놓쳐버린 늙은 여배우 같다.’ 시라는 장르가 솔직히 어떤 사회적 위상을 가지고 있는지, 우리끼리 생각을 더 해봐야 돼. 사실 뭐 미래파니 하면서 자기들끼지 위계를 만들어가면서 독자들을 다 죽여버린 것 아닌가.”(류근) “그렇다면 많이 팔리면 팔릴수록 좋은 시집이냐고 묻는 사람에게 뭐라고 대답할 수 있을까요?”(김도언) “그렇게 말하는 건 아니지. 아이가 과자만 원한다고 과자만 주는 엄마가 어디 있어. 과자도 주면서, 이것저것 줄 수 있는 그런 것이 정말 좋은 시잖아. 그런데 시인 한 명이 전부를 생산할 수 없어. 비유를 하자면 나는 빵집을 해. 나는 빵을 주고 싶다는 거야. 그런데 나한테 스테이크를 내놔라, 아이스크림을 내놔라 하는 건 이상한 거야. 나는 빵집인데, 너는 왜 빵만 주냐고 하는 건 옳지 않잖아. 나는 빵집의 역할을 하겠다고. 그러니까 고도화된 셰프 역할은 다른 시인이 하면 돼. 나는 빵을 잘 만드니까 빵을 만들겠다는 거야. 어려운 시들은 다른 시인들이 쓰면 돼. 나는 가슴 아픈 시를 쓸 테니까. 그런 걸 말하는 거야.”(류근)
197. “내가 쓴 시가 대체적으로 엄살이 심하다고 말한다면, 나는 이렇게 되묻고 싶어. 그럼 시한테 가서 엄살을 부리지, 내가 누구한테 가서 엄살을 부려야 해? 시에 가서 엄살 부리고, 화해도 하고, 용서도 하는 거지. 시인은 시한테 할 말만 하면 되는 거 아닌가? 누구도 비난할 이유가 없어. 내 시에 대해 ‘감성팔이’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던데, 나는 시한테 가서 엄살을 부렸을 뿐이야. 그게 나한테는 절실하니까. 시한테 가서 울고, 시한테 가서 하소연을 하고. 그들은 왜 내게 직접적으로 그런 말을 할까. 나를 그렇게 대놓고 욕하는 시인들이 몇 명 있잖아. 그러면 그 시인들은 자기들이 쓰는 시 앞에서 도대체 뭘 하는 거지?”(류근)
213. “시를 쓸 때마다 한 가지 의식하고 있는 게 있는데, 그게 방금 말씀하신 것일 수 있을 것 같아요. 똑같은 시집은 안 내겠다. 이런 걸 오랫동안 의식했어요. 같은 이야기를 또 할 필요는 없다고. 그건 의미 없는 작업이니 매번 시적 관심을 갱신하려고 노력했어요. 그런데 나이가 들어서 그런지, 요즘엔 그것도 부질없다는 생각이 들어요. 내가 시에서 지향하는 건, 그게 <마징가 계보학>에서 시도한 방법인 것도 같은데, 웃음과 슬픔이에요. 감동에는 그 두 가지가 다 원천이잖아요? 이걸 동시에 발생시킬 수는 없을까, 생각했죠. 누구는 내 시를 읽고 웃고 또다른 누구는 슬픔을 체험했으면 좋겠다는 것. 둘이 만나면, 웃어도 시원하게 안 웃고 쓸쓸하게 웃고, 슬퍼도 카타르시스 같은 강렬한 정념이 아니라 실소를 하는 것 같은 거요. 나한테 주어진 삶과 이것이 맞는 것 같아요.”(권혁웅)
216~217. “내가 1997년에 등단해서 어느 정도 문단에 동료와 친구들이 생겼을 때, 비평가로서 말하고 싶은 게 있었어요. 우리가 이렇게 열심히 쓰는데, 내 시는 빼고도, 이 시들 꽤 괜찮은데 왜 여전히 가르치려드는 사람들이 있을까 하는 의문이 있었죠. 항상 윗세대 분들은 아랫세대 시인들에게 비판적이잖아요. 내가 보기엔 그분들이 텍스트를 제대로 읽지 못하는 거였는데도요. 이미 감수성이 달라졌는데 그들은 자신들의 감수성으로 우리의 감수성을 제단하려고 했던 거죠. … 우리끼리는 잘 통하고 서로 다 읽어내는데, 비평하는 사람들은 제대로 읽으려 하지 않아요. 게다가 그분들이 주요 시집 시리즈에서 출간을 결정하는 분들이니까 답답할 수밖에 없었죠. 김경주, 황병승, 유형진, 안현미, 조연호, 이런 좋은 시인들이 시집 원고 출판을 거절당한 경험이 있어요. 그래서 그 시절에 시집을 내면서 세게 광고를 한 거죠. 내가 하고 싶었던 말은 ‘이들에게 자기 고민이 있고, 그걸 말하는 새로운 감각이 있다’였어요. 그 말이 논쟁으로 번져 진영이나 세대 간의 싸움처럼 돼버렸죠. 내 의도와는 무관한 방향으로 흘러갔지만, 나는 지금도 내가 한 말을 전혀 후회하지 않아요. 반대 진영에 있던 사람들은 지금 어르신 몇 분 빼고는 거의 다 사라졌잖아요. 이들 시인이 다음 세상에는 표준 텍스트로 인정받을 거라고 예상했는데, 실제로 그렇게 되었죠.”(권혁웅)
217~218. “논쟁의 여지는 약간 있지만, 얼마 전에 뵌 이문재 선생님은 197, 80년대 이후에 시가 새롭게 쓰여진 적이 없다고 말했거든요. 이 선생님 보기엔 우리 시가 폭발했던 게 두 번인데 193, 40년대랑 7, 80년대이고, 이성복, 황지우 이후에는 그런 폭발이 없었다는 거죠.”(김도언) “내가 이성복을 읽으면서 자란 세대인데, 이성복 세대는 김수영 세대한테 빚을 졌어요. 실제 김수영 시 읽어보며느 거기에 이성복, 최승자, 황지우, 김혜순 다 있어요. 그 세계가 만개한 게 7, 80년대 세대라고 생각해요. 정치적 상황과도 맞물려서요. 그러고서 다시 터진 게 90년대 넘어가면서 기형도거든요. 이성복의 마지막 후계자인 셈이죠. 그다음은 이제 우리 세대가 되는 건데, 우리도 뭔가 달라져야 하는데 이성복 세대라고 이성복처럼 써서는 안 되잖아요. 이성복 시인이 이미 다 썼는데. 그래서 다르게 쓰는 방법을 모색한 거죠. 그런 얘기를 오래 나눈 친구들이 같은 학교 다닌 이장욱, 김행숙 같은 시인들이었고요. 우리 세대의 가능성을 더 강렬하게 실현한 시인들이 황병승이나 김경주 같은 시인들이겠죠. 그리고 지금 시를 공부하는 친구들은 이를테면 황병승, 김행숙 세대가 되는 거죠. 내가 미래파 얘길 한 건, 내 세대의 가수성이 그걸 이야기할 수 있었기 때문이에요. 나 자신이 속한 세대니까. 그런데 다음 세대에 대해서는 내가 내 윗세대가 우리에게 그랬던 것처럼 가르치려드는 비평밖에 할 수 없을 거예요. 꼰대가 되는 거죠. 나는 그 감수성의 밖에 있으니까요. 지금 2015년에도 지금 세대가 시를 이렇게 쓰고 있다고 말하는 동시대의 사람이 필요해요. 다른 세대에게 자기 세대의 시가 이렇다고 말하는 사람이요.”(권혁웅)
220. “나는 아이들에게 삶과 사회, 역사를 정확하고 날카롭게 바라볼 수 있도록 도와주려고 노력해요. 그래서 철학에서 과학까지 날카롭게 바라볼 수 있도록 도와주려고 노력해요. 시 잘 쓰는 기술이 어디 있겠어요? 나부터 배우면 좋겠네요. 그런데 [황석영 선생이] 기술을 가르친다고 하니까 좀 황당했죠.”(권혁웅)
221~222. “나는 진짜 먹고사는 데 허덕여요. 우리 집이 원래도 가난했는데, 형이 사업을 하다 부도를 낸 바람에, 나이 마흔이 넘어서 정말로 0원에서 시작했어요. 미친 듯이 일을 했어요. 그런데 문학 바깥에서 하고 싶지는 않았으니까 편집위원도 하고, 원고료 있는 청탁은 다 받고, 특강도 많이 다녔어요. 지금도 세 살고 있고 빚이 많아요. 이 사소하 답변을 이어붙이면 바깥에서는 나를 주류로 보는 것 같은데, 사실 내가 문단에 영향력을 미치거나 구조를 바꿀 수 있는 위치는 전혀 아니에요. 문단 권력과 관련되는 얘기지만, 문학의 허약성을 낳은 제도적 약점은 편중된 인적 구성이라고 생각해요. … 이렇게 편중되면 시야가 아주 좁아져요. 예전에도 서울대 중심은 여전했지만, 출신 과의 경우에는 편집자들이 불문과, 중문과, 독문과, 영문과, 이랬잖아요. 지금은 국문과에 몇몇 학교 출신이에요. 그러니까 다양한 목소리가 나오질 않는 거죠. 그러니 생각도 비슷하고, 참고하는 텍스트도 비슷하고, 문체도 비슷하고, 안목도 비슷해져요. (중략) 문학 권력은 잘못 행사되는 권력과 잘 행사되는 권력이 거의 붙어 있어요. 무슨 이야기인가 하면, 어떤 문화예술 분야든 그 분야의 생태계 내에서는 문학성 혹은 예술성에 따라 어떤 힘의 중심이 생겨요. 중요한 잡지나 문학상, 단체가 생겨나죠. … 그러니까 지금 문학 권력이라고 비판 받는 사람들은 억울한 측면이 없지 않을 거예요. 생태계 질서로는 자연스럽게 행사되고 있는 힘을 권력이라고 비판하는 셈이니까요. 나는 문학 권력에 대한 비판에도 현실적 대안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새로운 상상력과 감수성으로 독자와 수요자를 설득할 수 있는 전략을 모색해보는 거죠.”(권혁웅)
263~264. “시 쓰는 사람은 언제나 앞으로 쓸 시가 더 걱정이 되는 법이에요. 그래서 더 조심스럽고 고민이 많아진다는 생각이 들어요. 타성이 생기면 시인으로서는 치명적이죠. 시가 좋지 않았을 때 받게 될 실망감과 충격이 정말 클 테니까요. 태작을 발표하면 더 빨리 들켜요. 더 빨리 알아버리죠. 직접적으로는 이야기하지 않아도 우회적으로는 다 그런 이야길 해요. 시를 쓰고 있는데도, 시 좀 써라, 이렇게 말을 하죠. 나도 그런 경우가 있었죠. 한 계절에 제법 많은 시를 발표했는데, 태준이 저 친구는 시도 안 쓰고, 그러더라고요. 그래서 시 많이 썼는데, 했더니 무슨 시? 그러더라고요. 사실 무서운 말이죠. 고마운 말이기도 하고요. 그러니까 그런 긴장을 유지하다보면 타성이란 게 생길 여지가 없어요.”(문태준)
268. “내가 ‘아, 이런 걸 알아냈구나!’보다는, 내가 들었던 생각이 제대로 나왔을 때 만족감을 느끼는 것 같아요. 그러니까 내가 보고, 내가 있는 그래도라고 생각하는 것, 물상, 물물, 존재, 이런 것들을 내 시 속에 있는 그대로 옮겨왔느냐. 그것이 만족스러우면 기쁜 거죠. …. 내가 제대로, 다시 쓸 수 없을 만큼 썼느냐. 그것이 더 중요하다는 거죠.”(문태준)
284~285. 이미 결혼해 아이들이 있던 그의 부친은 한때 강원도 태백 장성 광업소에서 일했는데, 한 여자를 만나 살림을 차렸다. 안현미는 그 둘 사이에서 태어났다. 역마살이 있던 아버지는 여자와 식솔을 돌보지 않고 경향 각지를 떠돌다가 본처에게, 태백 어디에 가면 자기 핏줄인 영민한 계집아이가 하나 자라고 있으니 집에 데려오라는 연락을 취했다. 그렇게 안현미는 다섯 살 무렵 생모를 떠나 아버지의 본처 슬하로 들어가게 됐다. … 어느 날 갑자기, 자신을 낳아준 엄마를 떠나 생면부지의 두 번째 엄마, ‘뒤바뀐 엄마’의 집으로 들어가는 어린 여자아이의 초상을. 눈앞의 세계가 하루아침에 뒤바뀌는, 그 막막한 암전의 체험의 무게를. 아이는 얼마나 두렵고 어려웠으며 어리둥절했을까. 아이는 자신의 삶의 좌표가 천공의 눈금에서 어느 지점에서 어느 지점으로 몇 센티미터 정도 이동했는지를 직감적으로 알아차렸던 것일까.
290~291. “난 지나치게 문학적인 엄살을 떠는 사람보다는 문학적인 삶을 사는 게 더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그러니까 ‘비만’에 대해 ‘슬픔의 두께’라고 표현하는 며칠 전 내가 만난 한 시인처럼.”(안현미)
304~305. “저한테 시를 쓰면서 가장 설레는 지점이 뭐냐고 물어보면 시를 쓰는 순간 어딘가를 건너가고 있다는 느낌이 드는 부분인 것 같아요. 극을 쓰거나 스토리를 쓰는 작업을 할 때는 뭔가를 채워간다는 느낌이 강한데, 시를 쓸 때는 내가 모르는 어딘가를 건너간다는 느낌이 있어요. 그 운동성. (중략) 시차는 제가 몸을 통해 얻은 것인데, 외국 여행을 갔다 오면, 몸을 통해서 공간과 시간을 건너고 넘어서는 느낌이 들거든요. 시차時差가 주는 시차視差가 발생하는 거죠. 그 순간에 매우 강렬한 포에틱이 발생해요.”(김경주)
318. 그에게 자신의 시 세계를 관통하는 시어 하나만 꼽아달라고 하자, 명쾌하게 “시차”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334. 1980년대 중반 <세계의 문학> 주간으로 영입된 시인 황지우 역시 일하는 동안 “내가 창녀가 된 참혹한 기분이었다”는 매우 극적인 소회를 남기면서 그 자리에서 물러나기도 했다.
340~341. “다운증후군은 병명이 아니다. 특별한 염색체가 발생시키는 여러 불편함을 통틀어 일컫는 말이다. 은재는 특별한 염색체를 타고났지만 알고 보니 그런 친구들은 많았다. 동시에 모든 아이가 그렇듯이 은재라는 아이는 단 하나다. 나는 아이의 고유성과 일반성 사이에서 갈등했다. 내 특별한 아이가 평범하기를 바랐다. 하지만 세상 모든 아이는 일반적으로 빠짐 없이 특별하다는 걸 잘 몰랐다. 나중에 알았다.”(서효인)
342. “모두 장애가 있는 거 같아요. 사회도 장애가 있고요. 은재에겐, 너는 제도에 의해 결정된 장애를 가진 거다, 다른 사람도 다 장애가 있고 약한 지점이 있고 강한 지점이 있다, 너도 너만의 강점이 있다고 말해주고 싶어요.”(서효인)
352. “제가 문학 작품에서 좋아하고 항상 감탄했던 것들은 운 좋게 잘 가지고 태어난 반짝이는 재능 같은 게 아니고 오랜 시간을 견뎌서 만들어낸, 그래서 한 명의 시인이나 작가로 완성시켜주는 그런 것들이에요. 저는 그래서 랭보나 기형도 같은 시인은 별로 좋아하지 않아요. 그들의 재능은 배울 수 있는 것도 아니잖아요. 배울 수 있는 건 태도겠죠. 점차 자신을 완성시켜나가는 자세, 그러면서 자기 복제를 하지 않는 것, 그렇게 희소한 태도를 견지한 작가들에게 감동을 받아요.”(황인찬)
354~355. “첫 시집을 내기 전부터 사람들이 제 시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 들었던 생각은 아, 내가 이러다가 되게 빨리 소비되겠구나, 빨리 소비되고 금방 사라질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었어요. … 그때 이런 생각을 했죠. 사람들의 기대에 계속 부응하려고 노력하는 것보다 그들의 기대를 계속 배반하려고 움직이는 쪽이 내게 의미가 있고 모두한테도 좋은 일이겠다는. 그런 생각을 첫 시집이 나오기 전부터 했어요.”(황인찬)
357. “시적 대상을, 세계를 잠깐 멈춰서 보는 게 첫 시집에서 하고 싶은 거였거든요. 잠깐 멈춰서 거리를 두고 손 안 대고 보는 것. 그게 필요하다고 생각했고요. 그런데 첫 시집을 그렇게 내고 나서 그게 진짜 쓸모없고, 아무것도 아닌 거구나를 알게 된 거 같아요. 세상이 내가 생각하는 것과 다르고 사람들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정말 다르구나, 이런 생각이 들었죠. 혼자 그렇게 멈추는 건 아무 의미가 없더라고요. 다 멈추거나 다 안 멈추거나 해야 어떤 의미가 있을까 … 혼자 멈추는 건 별 의미가 없다는 걸 깨달은 거죠.”(황인찬)
358. “제가 하고 싶은 건 가능한 한 전혀 다른 세계로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주면서 가는 거예요. … 시집을 묶어낸 이후 다른 세계를 보여주지 못하고 무의미한 자기 복제를 거듭하는 시인들도 있는 것 같더라고요. 그럴 바에는 자기 자리에서 계속 모색하는 게 더 낫다는 생각이 들어요.”(황인찬)
364. ”2010년대가 ‘레퍼런스’가 없는 시대인 것 같아요. 지금은 참조할 서양의 흐름이나 사조가 없어요. 전 세계적으로 경제적인 전망이 악화되면서 예술이 위축되는 것과 영향이 있는 것 같아요. 이 형편 없이 쪼그라든 멘탈로 경쟁 사회에서 어떻게 예술을 할 것인가, 어떻게 자생할 것인가의 문제만이 던져져 있다는 거죠. 제가 아이돌을 좋아하는데, 2000년대까지 나온 아이돌의 경우 끊임없이 미국 팝들을 따라하고 수입해오는 게 많았어요. 그런데 2010년 아이돌들을 보면 이제 다시 1990년대 말, 2000년대 초 한국 아이돌들을 복제한 거예요. 그러니까 레퍼런스가 외국에서 1990년대 2000년대 한국으로 옮겨온 거예요. 우리 세대가 느끼는 한국 시에 닥친 위기는 문화적 차원에서의 레퍼런스가 없다라는 걸 얘기하고 싶어요.”(황인찬)
_ 김도언, <세속 도시의 시인들>, 로고폴리스, 2016.
Sutopo Purwo Nugroho, 1969~2019
재임 만 9년 만인 지난 7월 7일, BNPB 공보센터장 수토포가 폐암으로 별세했다. 향년 49세.
인도네시아 재해 공보관은 아시아ㆍ태평양 지역을 비롯한 전세계 언론을 상대해야 하는 자리다. 재난 정보를 신속하고 정확하게 알린다는 것도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신속하면 정확하기 힘들고, 공식 정보가 디디면 거짓들이 생겨나 소문으로 번진다. 재해의 공포와 혼란 상황에서 괴담은 또 하나의 재해이고, 선정성은 언론의 위험한 본능 중 하나다. 이래저래 국가기관은 신뢰를 잃기 십상이다. 그뿐 아니다. 부실한 재해 대비와 더딘 수습 상황에서는 책임을 따져야 할 일이 잦다. 그건 진실의 영역이지만 동시에 정치의 영역, 선택의 영역이다. 조직을 위해선 예산 기관의 심기를 헤아려야 하고, 보신 출세를 하려면 인사권자의 눈치도 살펴야 한다. 진실은 그렇게 곧잘 덮이고 휘어진다. 수토포가 맡은 게 그런 일이었다. 그가 한사코 마다했던 건, 어쩌면 자신이 없어서였다. 신속 정확은 개인의 역량으로 이룰 수 있는 게 아니었고, 당시 인도네시아 재해 공보 시스템은 빈말로라도 좋은 말 해주기 힘든 지경이었다. 시종 정직하고 정의로울 자신도 없었을지 모른다. 그에겐 아내와 어린 두 아들이 있었다.
‘팍 토포(Pak Topo, 토포 선생님 또는 아저씨)’라는 애칭으로 더 널리 불린 수토포는 1969년 10월 7일 자바 중부 보욜라이(Boyalali)란 도시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교사였고, 어머니는 주부였다. 우기에 집에 기어든 흰개미를 볶아먹어야 했을 만큼 가난했던 탓에 초등학교를 맨발로 다녀 급우들의 놀림과 따돌림을 당했다고 그는, 발병 직전인 2017년 12월 한 인터뷰에서 말했다. 어려서 손금을 봤는데 커서 성공할 거라고 했다고, 영리하진 않지만 워낙 성실해서 아둔함을 극복할 수 있으리라 하더라고도 했다. 그는 “돌이켜 보면 그 말이 옳았다”고, “남들은 한 번 보고 마는 책을 나는 세 번씩 봐야 간신히 이해하곤 했다”고 말했다. 그렇게 그는 93년 족자카르타의 국립 가자마다(Gadjah Mada)대학을 우등 졸업했고, 졸업식장에서 인사 나눈 법학과 우등졸업생 레트노 우타미 율리아닝시(Retno Utami Yulianingsih)와 결혼해 아들 둘을 낳았다. 교수나 연구자가 되는 게 꿈이었다는 그는 37번 도전 끝에 94년 10월 ‘응용기술평가원(BPPT)’이란 곳에 취직했다. 그 직장을 다니며 명문 국립대인 보고르(Bogor) 농업대학에 진학, 2010년 수자원ㆍ환경 관련 논문으로 박사 학위를 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