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우리의 수출이 증가하면 할수록 일본으로부터 핵심소재와 부품 수입이 동시에 증가하는 가마우지 경제체제로부터 이제는 탈피해야 합니다.”(김현종)
“우리는 우리의 수출이 증가하면 할수록 일본으로부터 핵심소재와 부품 수입이 동시에 증가하는 가마우지 경제체제로부터 이제는 탈피해야 합니다.”(김현종)
“한일 국교 정상화가 이뤄진 지 50년이 넘도록 한국은 단 한 차례도 대(對)일본 무역수지 적자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으로 나타났다. 누적적자액이 700조원을 훌쩍 넘겼다.”
제1명제. 일제 강제 동원의 피해자들은 가해자인 일본 기업들에 대한 손해배상청구권을 가지고 있다는 한국 대법원의 판결은 정당하다.
_ 최근 한일 분쟁의 핵심은 한국 대법원의 판결이며 모든 논의는 먼저 이 판결의 정당성 여부에서 시작해야 한다. 이러한 점에서 볼 때 현재 국내에서 진행되고 있는 친일/반일 논쟁은 대표적으로 현 사태를 오도하는 방향이다. 일제 강제 동원 피해자들의 손해배상청구권에 대한 한국 대법원의 판결은 지극히 정당하다. 이 판결의 결론을 인용하자면, “일본 정부의 한반도에 대한 불법적인 식민지배 및 침략전쟁의 수행과 직결된 일본 기업의 반인도적인 불법 행위를 전제로 하는 강제 동원 피해자의 일본 기업에 대한 위자료청구권”이라고 명시했다. 그리고 국가와 국가 간의 배상 문제는 해결되었지만 개인과 기업 간의 배상 문제는 아직 해결되지 않았다고 판단했다. 이는 양국의 법조계에서 공통으로 인정하는 법적 논리이다. ‘외교보호권포기설’이라고도 부르는 이 법리는 개인이 입은 피해에 대해 국가의 외교보호권과 개인의 배상청구권은 서로 다르다는 원리에 기초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이것은 주로 일본 측에서 제시한 해석으로서 1951년의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과 이에 따른 1965년의 한일청구권협정에 대한 정통 해석이라고 말할 수 있다. 1991년 8월 일본 의회에서 일본의 외무성 조약국장은 한일청구권으로 양국의 외교적 보호권은 상호 포기되었지만 개인의 청구권은 가능하다고 설명했다. 2007년 4월 일본 최고재판소도 중국인 강제징용피해자가 일본 기업에 제기한 배상청구소송에서 국가 간의 합의에 의해 외교보호권은 소멸될 수 있지만 개인의 배상청구권이 소멸되는 것은 아니라고 판시했다. 대한변호사협회와 일본변호사협회의 2010년 공동선언도 일제강점기의 피해자 보상에 있어서 포괄적이고 개인적인 구제 조치의 필요성을 지지하고 있다. 따라서 일제강제징용자의 개인청구권에 대한 한국 대법원의 판결은 너무나도 당연한 결론이었다.
제2명제. 그러나 한국 대법원의 판결에 대한 한일 정부의 태도들은 서로 다를 수 있다.
_ 각 정부가 바라보는 국가 이익이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일본 정부가 이미 한일청구권에 미래에 발생할 모든 개인적 보상도 포함되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일본의 아베 수상이 부실하게 체결되었던 한일청구권협약의 일부 자구를 활용하여 강제징용피해자들에게 마땅히 돌아가야 할 권리와 보상을 거부하고, 두서없는 경제적 협박으로 한국 정부에 압력을 넣고 있는 것은 그가 나쁜 사람이거나 어리석어서가 아니다. 일본 수상으로서 일본 기업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 다양한 노력을 경주하는 중이다. 그러나 국가의 외교보호권과 개인적 배상청구권의 분리를 설파한 것은 도리어 일본 측이었다는 게 역사적 아이러니이다. 이러한 아이러니를 피해 일본의 국익 보호를 위한 방어논리를 개발하다 보니 사뭇 옹색한 결과가 나올 수밖에 없었다. 대표적으로 2007년의 일본 최고재판소 판결을 들 수 있다. 일본 최고재판소는 “강제징용피해자 개인의 실체적 권리”는 소멸되지 않았지만 “소송 청구의 권능”은 소멸되었다는 어정쩡한 판결을 내렸다. 한마디로 일본 기업에 피해가 가는 판결을 일본 법원이 내릴 수 없다는 뜻이다. … 일본 외무성은 2013년 박근혜 정부에게 강제징용판결이 일본 기업에 불리하게 나올 경우 한일 관계에 심각한 문제가 발생할 것이라는 경고를 보냈다. 당황한 박근혜 정부는 대법원 판결을 대통령의 임기 말까지 늦추는 방식으로 이 문제에 대응하였다. 문재인 정부에 들어서면서 판결은 더 이상 늦출 수 없게 되었다. 일본은 대법원 판결을 앞두고 문재인 정부에게도 동일한 압력을 가했다. 문재인 정부는 대법원 판결에 개입하는 것을 거부했다. 문재인 정부는 아베 정부에 타협책으로 양국의 기업들이 기금을 마련해 개인들에게 배상하는 방안을 제시했으나 일본 정부가 이를 거부했다고 한다. 일본 기업에게 개인 배상의 선례를 만드는 게 일본의 이익에 해롭다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제3명제. 한국과 일본이 싸우면 공멸한다.
_ 결론은 자명하다. 둘 다 망한다. 함께 망하는 이유는 한국과 일본의 국력이 비슷하기 때문이다. … 한국과 일본의 갈등을 다룰 때는 미국의 입장에 대한 고려가 필요하다. 미국은 세계대전 후 유라시아 대륙을 장악한 공산주의 세력의 확대를 막기 위해 일본은 두말할 나위도 없고 한국에도 막대한 자원을 쏟아부었다. 한국이 예뻐서가 아니라 미국의 전략적 이익이 걸려 있기 때문이다. 1945년부터 1985년의 기간 동안 미국의 대외 원조 총량 제3위가 바로 한국이었다. 전후 유럽 전역에 쏟아부은 마샬 플랜 원조 총액이 170억 달러였는데, 이 기간 동안 조그마한 한국 하나에 쏟아부은 돈이 무려 130억 달러에 달한다. 미국은 당연히 세계에서 가장 역동적인 동북아 지역에서 한미일 동맹이 깨어지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 또 깨어지도록 방치하지도 않을 것이다. 한국이 미국과의 동맹을 긴밀히 하는 한 일본과의 갈등은 찻잔 속의 태풍으로 끝날 가능성이 크다.
제4명제.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
_ 한일 간의 국제수지 균형을 새롭게 정립할 좋은 기회이다. 지금까지 한국 경제는 여러 가지 이유로 심한 일본 의존에 시달렸다. 그로 인해 막대한 국제수지 불균형 즉 무역적자를 감수해야 했다. 이 구조를 정부가 나서서 극복하자니 국제자유무역체제의 제재를 받을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이제 이 구조를 극복할 수 있는 좋은 명분이 생긴 것이다. 지나친 대일의존을 극복하여 한일 간의 국제 분업을 호혜적으로 정상화하고 한일 간의 국제수지 균형을 바로 잡는 행위가 국제적으로 인정을 받을 수 있게 된 것이다. 각 당파는 권력 쟁취를 위해 노력하되 국가 이익 증진에도 초점을 맞추는 게 바람직하다. … 거듭 강조하거니와 당파 이익과 국가 이익을 일치시키려는 진지한 노력이 필요하다. 가짜뉴스로 백성을 속이려는 자들이 명심해야할 금언이 있다. 많은 사람들을 잠시 속일 수 있다. 소수의 사람들을 오래 속일 수 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을 오래 속일 수는 없다.
172~173. 방송 진행자는 이렇게 물었다. “아담이 선악과를 먹은 하와를 버렸다면, 인류는 낙원에서 아담과 함께 영원히 살았을까요?” 그런데 이것은 문제가 있는 질문이다. 질문을 그대로 받으면 질문자가 정해 놓은 프레임에 갇히게 되는 함정 질문이랄까. 아내와 같이 죽거나, 혼자서 살겠다고 아내를 버리거나 양자택일밖에 없는 것으로 상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C. S. 루이스는 같은 질문을 좀 더 열린 방식으로 물어본다. “아담이 ‘나쁜 일을 따라 하는’ 대신 하와를 나무라거나 꾸짖고 그녀를 위해 하나님께 탄원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밀턴은 말해주지 않는다. 몰랐을 테니까. 루이스는 아마도 하나님께 다른 카드가 있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아담은 하나님께 묻지 않았고, 이제 누구도 그 답을 알 수 없게 되었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렇게 덧붙인다. “거부된 선은 볼 수 없다.” 주어진 명령을 따라 봐야 어떻게 되었을지 알 수 있는데, 아담은 명령을 따르지 않았다. 가능성의 문을 스스로 닫아 버린 것이다. 이 대목에서 나는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었던 모세 이야기를 꺼냈다. 이스라엘 백성이 엄청난 죄를 지어 하나님이 격노하신 나머지 그들을 다 없애 버리겠다고 하신 적이 있다. 그때 모세는 먼저 나서서 이스라엘 백성의 죄를 엄하게 꾸짖은 후, 그들을 벌하시려는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 사이를 막고 섰다. 그리고 하나님께 간청한다. 차라리 저를 죽여 주십시오. 그런데 그때마다 하나님은 ‘마치 기다리셨다는 듯’ 모세의 청을 받아들여 이스라엘을 용서하신다. 그것이 바로 인류의 대표였던 아담이 해야 할 일이었다. 아내의 죄를 따라 하는 방식으로 같이 죽겠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가장으로서, 인류의 대표로서 옳고 그름을 분별하고 아내를 위해 목숨을 걸었어야 하는 것이다.
_ 홍종락, <오리지널 에필로그>, 홍성사, 2019.
우리 현실에 맞는 공영형 사립대의 틀은 어떻게 갖추어야 할 것인가? 나는 그 답을 미국의 대학교에서 찾는다. 코넬대학교는 미국 동부 아이비리그 대학 중의 하나인 사립대학으로 13개의 단과대학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가운데 농업생명과학대학, 수의과대학, 인간생태대학 그리고 산업노동대학 등 4개의 단과대학은 뉴욕주 정부의 재정지원을 받는 주립 단과대학이다.
또 다른 예는 뉴욕주 최초의 대학인 알프레드 대학교로, 이 학교는 뉴욕주립 세라믹공과대학을 운영하고 있는데, 엄청난 규모와 지원을 등에 업고, 미 전역을 통틀어 랭킹 1위를 차지하는 명성을 누리고 있다. 이들 대학을 통해 입학하는 신입생은 당연히 주립대학 수준의 등록금을 내며 수업을 받는다. 사립과 공립이 공존하는 형태라 할 수 있다. 그러나 학교 운영에 주 정부의 입김은 배제된다. 학교 운영은 철저히 학교 당국자의 몫이다.
“편안하게 지낼 적에 위태로움을 생각하라고 했습니다. 생각하면 대비가 있게 되고, 대비가 있으면 근심이 없습니다. 천하의 일은 어렵거나 일이 많은 것을 근심할 것이 아니라 편안한 것이 짐독(酖毒)이 됨을 두려워해야 합니다. 설령 정치가 잘 행해져서 해야 할 일이 한 가지도 없다 하더라도 아침저녁으로 두려워하고 거안사위하면서 조금이라도 게을러서는 안 됩니다.”
- <좌씨전>, 주희가 송 효종에게 올린 봉사(封事)
먼저 ‘인자’라는 칭호에 대한 대표적인 오해를 간단히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인자’라는 칭호는 예수님의 인성을 강조하고 ‘하나님의 아들’이란 칭호는 예수님의 신성을 강조한다는 일반적인 견해가 있는데, 사실 이 견해는 잘못된 것입니다. 기독교 역사상 고대 교회로부터 그렇게 가르쳐 오기는 했지만, 그 고대 교회가 주로 희랍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인자’라는 예수님의 말을 제대로 알아듣지 못했던 것입니다. 즉 희랍 사람들이 히브리어의 숙어가 무슨 말인지를 제대로 모르는 바람에 고대 교회로부터 잘못 가르쳤던 것입니다.
‘인자’라는 칭호에 대한 두 번째 오해는 이 칭호가 유대 문서, 특히 묵시 문학에 유행하던 메시아에 대한 칭호 가운데 하나였다는 주장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이 스스로 이렇게 ‘인자’라고 불렀을 때, 자기가 곧 메시아라는 것을 밝힌 것이었다고 주장하는 책들을 펴내기도 하는데,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선 이 말은 도대체 칭호로 쓰인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유대 문서에 ‘사람의 아들’이라는 표현이 더러 나오기는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처음으로 ‘사람의 아들’이라는 말에 ‘그’라는 관사를 붙인 표현, 즉 “그 ‘사람의 아들’”을 하나의 칭호로 만들었습니다. 따라서 이상하게 느껴지기까지 하는 이 칭호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푸는 열쇠는 ‘그’라는 지시 관사에 있습니다. 유대 문서에 ‘사람의 아들’이란 말은 많이 나옵니다. 이 말은 단순히 ‘한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셈족 언어의 숙어입니다. 칭호가 아니었습니다. 이 표현에다 예수님이 ‘그’라는 관사를 붙임으로써 자기가 어느 특정한 사람이라는 것을 지적하고 있음을 나타냈고, 그리하여 ‘그’라는 관사와 더불어 ‘사람의 아들’은 하나의 칭호가 되었습니다.
다니엘 7장 13절에 ‘사람의 아들’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이 말은 시편 8편에도 나오고 에스겔서에도 여러 번 나옵니다. 다니엘이 환상 가운데 하나님을 보고 하나님 앞에 구름을 타고 오는 한 분을 보는데, 그분이 ‘사람의 아들’ 같이 생겼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사람의 아들’이라는 말은 칭호가 아닙니다. 어떤 한 분이 나타났는데, 그분이 사람 같이 생겼다는 의미의 표현입니다. 그분이 구름을 타고 왔다는 점에서 신적 존재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구름은 오직 하나님이 나타나실 때에만 동반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천사가 나타나도 구름을 타고 나타났다는 말은 없습니다. 구름이 나타나는 현상은 하나님이 나타나시는 현상입니다. 따라서 다니엘서 문맥을 보면, 구름을 타고 오는 사람의 아들 같은 분이라는 것은 ‘한 사람의 신적 존재’임을 알 수 있으며 그 신적 존재가 ‘사람 같이 생겼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자기를 “그 ‘사람의 아들’”이라 하셨을 때, 그리고 종말에 구름을 타고 천사를 동반하고 와서 이 세상을 심판하는 이로 나타난다고 하셨을 때, 분명히 다니엘 7장 13절을 두고 하신 말씀임을 알 수 있습니다.
_ 김세윤, <구원이란 무엇인가>, 두란노, 2001, 34~37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