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chive for January 22nd, 2010

January 22, 2010: 7:41 pm: bluemosesErudition

김기원은 “창비주간비평”(10/01/20)에서 다음과 같이 적었다. “진보세력은 ‘랄프 네이더’의 교훈을 되새겨야 한다. 그는 2000년 미국 대선에서 민주당이나 공화당이나 ‘그놈이 그놈’이라며 선거를 끌고 나가 부시의 당선에 한몫했다. … 진보세력은 민주당을 한나라당과 한통속으로 몰아붙이면 자기 지지기반이 확대되는 걸로 생각한다. 천만의 말씀이다. 많은 국민들 보기엔 민주당이나 진보파나 모두 한나라당 반대쪽에 있다.” “랄프 네이더가 존 케리에게 했듯이 상대편이 받기 힘든 요구를 연대의 전제로 삼는 건 ‘판 깨기’의 알리바이 만들기에 지나지 않는다.” “2002년 대선 당시 권영길 후보 말대로 한나라당과 민주당의 차이는 샛강이고, 민주당과 진보정당들의 차이는 한강이라 치더라도 그 샛강만큼의 차이도 민중의 삶에는 중요하다. 이를 무시하는 건 세속을 초탈한 도인의 자세거나 마천루 빌딩 위에서 시내 교통정리를 하려는 행태다.”

김기원은 자신이 선거공학 때문이 아니라 정치변혁의 새로운 기회 구조를 창출하기 위해 민주세력의 연대를 지지한다고 밝혔다. 처칠 수상의 변(辨)이 떠오른다. 그는 노동당에서 보수당으로 당적을 옮기며 다음과 같은 명언을 남겼다. “20대에 자유주의자가 아니면 가슴이 없고, 40대에 보수주의자가 아니면 정신이 없는 것이다.” 우경화의 뒷물결이 앞물결을 밀어낸지 오래인데, 아직도 앞물결의 개혁을 호소하는 이들이 있다. 그렇다. 그들은 ‘변명’ 대신 ‘주장’을 하고 있는 것이다. 체제를 구획한 이들과 그것을 개혁할 이들이 마치 상이한 것처럼 기만하면서. 혹시 ‘래디컬이 능사는 아니’라는 말을 하고 싶었던 걸까?

덧붙여, 김기원은 최장집을 비판한다. “아직도 최장집 교수처럼 이명박 정권이 보수지만 민주주의라는 납득하기 힘든 주장을 하는 경우가 있기는 하다. 정권을 비판할 언론의 자유마저 심각하게 훼손당하고 있는데도 민주주의라 할 수 있을까. 최 교수가 노무현 정권을 사이비 민주주의라고 비판했던 걸 생각해보면 그의 민주주의 개념은 도대체 일관성도 없다. 지금이 군사독재 상태는 아니지만 민주주의를 후퇴시키고 독재로 향하려는 그 ‘방향성’을 부정해서는 곤란하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과 다르다. 최장집은 <어떤 민주주의>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절차적 민주주의가 완성되었다는 말은 곧 이상적 민주주의가 실현됐다는 말과 같다. … 절차적 민주주의는 잘 되었으니까 이제 실질적 민주주의를 하자는 주장도 많이 보게 된다. 이런 이분법적 개념이 민주주의 발전 단계론처럼 활용되는 것을 보게 되면서 절차적 민주주의에 대한 오해를 교정할 필요를 많이 느끼게 됐다. 절차적 민주주의 단계가 성취됐으니 실질적 민주주의로 나가야 한다든가 하는 것은 민주주의의 개념을 정확히 이해하고 말한다고 보기 어렵다.”(21쪽) 최장집은 시종일관 절차적 민주주의를 역설하였지, 실질적 민주주의 내지 이념적 민주주의를 옹호하지 않았다. 다시 말해, 최장집은 [정치공학자로서] 시스템의 완성을 지향하였던 것이다. 최장집이 “이명박 정권이 보수지만 민주주의”라고 하였던 것은 그의 입론에서 비롯되었으며, 이에 따르면 역으로 김기원은 “민주주의의 개념을 정확히 이해하고 말한다고 보기 어렵다.” 김기원이 자의적으로 정리한 ‘이념좌표의 가로축: 진보-보수’, ‘이념좌표의 세로축: 개혁-수구’는 여기에 대한 방증이 될 수 있을 것이다.

: 6:11 pm: bluemosesErudition

권위가 상실된 시대의 특징은 ‘모든 것이 정통하기에 정통한 것이 없다’는 과도한 해석의 만연이다. ‘구성주의’ 혹은 ‘구조주의적 해석학’, 푸코는 바로 이것과 싸웠다.

: 5:40 pm: bluemosesErudition

1. 제한된 시공간에서 거대 서사를 구축하는 방법은 [보편적 공감이라는] 서정성에 사회성을 담는 것이다. 송선호 연출은 미시적 무대에서 거시적 세계를 재현하고자 객석의 참여를 동원함으로써 연출의 의도를 배우의 연기에 실어 관객의 심상으로 옮겨 놓는다. 무대와 객석의 합일, 이것을 일컬어 우리는 ‘극장의 장악’이라고 할 수 있다.

2. 어떻게 이것이 가능할 수 있었을까? 송선호 연출의 희곡은, “희곡 언어의 육화”를 염두에 두고 창작되었기에 극 공연의 ‘내용과 형식’이 상응한다. 역사에 관한 3가지 관점은 3명의 등장인물에 투영되어, 극의 전개 가운데 희곡의 지향을 시나브로 - 리얼리즘을 보존하면서 - 다음과 같이 집약해간다: 인간은 각자의 입각점에 따라 사실을 조합한다, 고로 “진실은 개별적인 것이다.”

3. You don’t understand는 연극의 유한한 강점을 나지막이 들려주는 우리시대의 모범답안이다.

: 5:03 pm: bluemosesErudition

기록은 안하고 기억에 의존하면, 역사는 소실되고 추억만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