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chive for January 25th, 2010

January 25, 2010: 6:55 pm: bluemosesErudition

“내가 의로운 사람에게 말하기를 ‘너는 반드시 살 것이다’라고 하였어도, 그가 자신의 의로움을 믿고 악을 행하면, 그가 이전에 행했던 모든 의로운 일들이 하나도 기억되지 않을 것이다. 그는 악한 일들 때문에 죽게 될 것이다.” 그러나 “악한 사람의 악함이라도 그가 악에서 돌이킬 때는 그를 넘어지게 하지 않을 것이다.”(겔33:12~13)

공의는 늘 우리 앞에 있다. 언제나 이미 현재를 대면하는 인간이 의로울 수 있는가. 인간이 의로움에 이르는 유일한 길은 ‘공의(심판)에서 사랑(은혜)으로’ 도약하는 믿음이다.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롬3:10),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롬1:17)

: 6:35 pm: bluemosesErudition

정의 없는 강도 조직 수준의 나라는 필히 재앙을 맞게 돼 있고 그 궁극에 가서 망국을 맞게 돼 있습니다. 근대 일본의 예언자이자 함석헌의 스승 우찌무라 간조가 군국 일제보고 하던 소리인데, 지금 대한민국보고 해야 할 이야기인 듯합니다.”

: 5:49 pm: bluemosesErudition

1. 청소, 빨래, 밥짓기, 설겆이, 구두손질 등의 행위는 [나에게] ‘의미’가 없다. 그러나 그것이 섬김의 일환이라면 ‘의의’가 있다. 왜일까?  주지하다시피 섬김은 외화된 노고가 귀환되지 않는 Poiesis다. 다시 말해, 섬김은 소외를 전제할 뿐더러 그 자체로 목적일 수 없다. 그렇다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섬김으로써 우리가 풍성해지는 이유는 무엇인가. 아마도 자아에 국한되어 있던 사랑이 확장되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 섬김은 Labour도 work도 아닌 Activity로서, 자아의 경계를 공동체로 확대시킨다. “인자는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으며, 많은 사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대속물로 내주러 왔다.”(마20:28) “둘째는 이것이니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이보다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막12:31)

2. “부르주아 사회의 발전이 ‘주민의 상당 부분을 세상사에 무관심한 농촌 생활에서 떼어내었다’는 구절에 대해서는 많은 언급이 있었다. 그런데 당시 마르크스가 농촌 환경에 대해 도시인들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던 경멸 — 뿐만 아니라 무지 — 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으나 재미있는 이 독일어 구절(dem Idiotismus des Landlebens entrissen)을 실제로 분석해보면 Idiotismus는 ‘우매함’이 아니라 시골에 사는 사람들이 가진 ‘좁은 시야’나 ‘더 넓은 사회로부터 고립되어 있는 상태’를 가리키는 것이었다. 이는 그리스 어 ‘idiotes’가 가진 본래의 의미를 반영하는 것인데, 이 단어로부터 현재 쓰이는 ‘idiot’나 ‘idiocy’의 의미가 파생되었다: ‘자신의 사적인 일에만 관심을 가질 뿐 더 넓은 공동체의 일에는 무관심한 사람.’ 1840년대 이후 몇 십년이 지나면서 — 그리고 마르크스와는 달리 구성원들이 고전에 대한 교양이 없던 운동 속에서 — 본래의 의미는 증발되었고 오독이 일어났다.” - Eric Hobsbawm

: 3:40 pm: bluemosesErudition

관계의 교류를 量化한 사회연결망, 이것들(A, B)로부터 어떠한 ‘교육사회학’적 시사점을 얻을 수 있을까? School to Work? Learning Complex Ecosystem? Community-laden Pers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