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chive for February, 2010

February 7, 2010: 11:12 pm: bluemosesErudition

조재현, 김낙형 연출의 <에쿠우스>는 간단없이 성적 긴장을 고조시키는 관능미의 향연이었다. 이는 관객의 공감을 전유하기보다 이목을 휘어잡기에 그들의 삶은 우리의 삶이 될 수 없었다. 그것은 하나의 현란한 퍼포먼스였다.

1. “간단없이”: ‘긴박한 음향’, ‘국소적 조명’, ‘중복적 공간’ 활용에 따른 암전의 최소화. 이것은 객석(관객과의 소통), 무대(배우간의 대화), 내면(메세지의 전달)의 3차원 구성에 버금가는 극 연출의 묘미였다.

2. “성적 긴장을 고조시키는”: 금욕을 강요하는 사회적 억압 속에 ‘다이사트’가 동경하는 엑스터시와 그것을 향유한 ‘알런 스트랑’의 고해성사적 재현 과정. 어느덧 고루해진, 그러나 여전히 성행 중인 포스트 모더니즘 작품(1973년 초연)을 수차례 재연하는 극단 실험극장. 과연 [새로운 윤리를 주조하려는] 기획의도란 것이 존재했을까? 염량세태에 편승하는 변죽 울리기 아닌가.

3. “관능미”: 6(8)마리의 ‘말’과 ‘질 메이슨’의 육감적 의상과 몸짓. 이들의 노출은 신성한 ‘매혹’이 아닌 저급한 ‘유혹’이었다.

4. “향연”: 예수의 수난과 바알의 숭배를 연상케하는 종교적 메타포와 미장센. 희곡의 시공간을 실현하는 일상의 미학이 요청된다. ‘3D Matrix’ 시대일수록 - 그럼에도 불구하고 - 연극 고유의 극적인 요인을 고민해야 한다.

February 5, 2010: 8:10 pm: bluemosesErudition

1. [소극적] 타인의 인정이 없을지라도, 신앙의 열정이 사그라들지 않는가?

2. [적극적] 타인의 박해가 있을지라도, 신앙의 열정이 사그라들지 않는가?

: 5:54 pm: bluemosesErudition

0. M. S. C.: 대상 X에 관한 Multi-dimensional, Structural, Creative Thinking

1. “사물의 외양과 본질이 직접적으로 일치한다면 과학은 모두 불필요할 것이다.”(Marx, K.) “정통 마르크스주의는 마르크스의 연구결과를 무비판적으로 인정하는 것을 뜻하지 않으며, 이러저런 주장에 대한 ‘믿음’이나 어떤 ‘신성한’ 책의 해석을 뜻하지도 않는다. 마르크스주의적 문제에서의 정통성이란 오로지 방법에만 관련된다.”(Lukács, G.) 그렇다면 복잡한 현실을 어떻게 파악할 것인가?

2. Roy Bhaskar에 따르면, 존재는 다층적이다. 진리 혹은 진실을 규명하기 위해서는 외양에서 본질을 향해 육박해 들어간 뒤, 다시 본질에서 현상으로 귀환하는 [즉자대자적] 현상학적 해석학 내지 변증법적 역사 유물론이 요청된다. <자본론>의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3-1. 1차원에서 4차원으로 사유에 대한 사유: f(x) > f(f(x)) > f(f(f(x))) > f(f(f(f(x)))). 자본주의 사회의 인간 소외 > 자본의 생성, 유통, 축적 > 화폐 교환 > 상품 거래.

3-2. 4차원에서 1차원으로 구조적 사유 전개: f(f(f(f(x)))) > f(f(f(x))) > f(f(x)) > f(x). 상품 거래 > 화폐 교환 > 자본의 생성, 유통, 축적 > 자본주의 사회의 인간 소외.

4. 연구가 ‘탐구’와 ‘해설’로 구성된다면, 탐구는 [3-1의] 고차원으로 추상화되며, 그것의 결과를 제시하는 해설은 [3-2의] 저차원으로 구체화된다.

5. 이상의 논의를 확장하면, 우리의 사유를 Habitus(혹은 Desire) > Illusio > Agencement > Paradigm 순으로 층화할 수 있다. 1차원이 습속에 종속된 반응이라면, 2차원은 습속을 당연시하는 상식에 대한 질의이고, 3차원은 상식을 구성하는 체제의 고찰이며, 4차원은 당대의 역사적 조망이다.

: 4:10 pm: bluemosesErudition

“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는 것을 지켜보면서 그것을 들여다보는 프리즘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여기서 삼성의 문제를 찾게 되었다. 삼성은 민주주의를 무력화시키고 형식화시키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이 논문은 크게 △서론(1장) △이론적 자원과 기존 연구 검토(2장) △삼성의 국가 및 시민사회 지배 전략(3장) △저항블록의 응전과 ‘대자본 헤게모니와 공존하는 형식적 민주주의 체제’의 형성(4장) △결론(5장) 등 총 5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논문의 3장 “삼성의 국가기구 지배전략과 국가기구 내 기업권력 거점지화”의 일례로 다음을 거론할 수 있을 듯하다. “노무현 전 대통령 취임 전 열린 팀장회의에서 노무현 정부의 명칭에 관한 안건이 올라왔다. ‘참여정부’가 좋겠다고 의논이 모아졌는데, 실제 공식명칭이 됐다.”(146쪽)

: 3:59 pm: bluemosesErudition

1. “천천히 살겠다고 하면서도 / 빠른 세상이 익숙해져있는 나는 / 그의 밤을 사고 있다.” 밤으로 밀려나는 자들을 [본의 아니게, 당연시 하며] 학대하는 낮의 노동자. ‘화이트와 블루’의 대결 구도는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신분 차별을 교두보 삼아 ‘낮과 밤’의 주종 관계로 악화되었다. 이것이 자본가 때문인가?

2. 노동자는 “회사의 윗대가리들이 도적떼나 조폭의 수준을 능가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 회사에 취업하고자 혼신을 다하여 경쟁한다. 노동자의 일상은 노동자에 의해, 노동자를 위하여 생태에 역행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우리가 싸워야 할 대상은 MB 정부, 삼성 공화국 뿐만이 아니다. 궁극적으로는 자본에 영합하는 주체를 변혁해야 한다.

3. “이 글에서 주목할 점은 구조가 아닌 주체에 집중하고 있다는 것이다. 즉, 변화하는 사회 구조 속에서 실질적으로 행동하는 주체인 민중들이 어떤 식으로 반응하는지에 주목한다. 구조의 모순을 이야기하기는 보다 쉬워 보인다. 그러나 구조의 모순에만 그칠 경우에는 해결책도 간단하다. 구조를 바꾸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왜 구조를 바꿀 수 없을까?”

: 2:04 pm: bluemosesErudition

“전교조는 실은 운동조직이 아니라 노동조합이잖아요. 사회가 워낙 보수적이다보니 급진적인 운동조직 노릇을 하는 시절도 있었지만, 노동자가 노동조합에 가입하는 건 당연한 일일 뿐이죠. 진보적인 않은 교사를 전교조에서 내보낼 수도 없고 진보적인 교사만 가려 뽑을 수도 없죠. 그래서도 안 되구요. 전교조 전체를 대상으로 운동성을 되살리려는 시도보다는 전교조는 노동조합으로 두고 진보적인 교사운동조직이 새롭게 만들어지면 좋겠다는 생각입니다.”(김규항) _ 교사를 통한 사회개혁이 요원하였던 까닭은, 전교조의 참교육이 진보적인 ‘이권 홍보’였기 때문이었다.

February 4, 2010: 6:22 pm: bluemosesErudition

“하하야는 마이크로크레딧의 변형된 형태라고 할 수도 있다. … 하하야가 구매를 대행하고 결제는 형편이 될 때 천천히 하면 된다. [연체 이자와 함께] 쇼핑몰에서 덤으로 주는 포인트를 모아 시스템 운영비를 조달하면 된다. 불특정 개인에 대한 신뢰와 불특정 다수의 연대가 있기 때문에 가능한 시스템이다.”(이정환)

February 3, 2010: 8:24 pm: bluemosesErudition

“데이비드 이스턴은 정치 - 모두가 영향을 받는 공동의 문제에 관한 공동의 의사결정 과정 - 란 시장에 의한 자원 배분이 아니라 권위에 의한 [불균등한] 자원 배분이라고 규정한 바 있다. 현대 한국의 사회와 경제를 지배하는 권위는 자본과 (경제관료, 금융경제전문가, 법률전문가 등의) 전문지식에 있다.” “민주주의에 대한 진정한 고민은 민주적인 자원 배분과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민주주의의 실질화 - 형식적인 선거가 아닌 실질적인 국민주권의 행사 - 에” 있다. 물론 “자원을 어느 한 가지 방식에 의해서만 배분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으며 바람직하지도 않다. 예를 들면 모든 것을 국가 관료나 시장에 맡기려고 해도 계획이나 시장을 벗어나는 자원배분은 생기게 마련일 뿐 아니라 이러한 유토피아적 시도는 폴라니가 보여준 대로 엄청난 재앙을 낳을 것이다. 이는 민주주의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될 것이다.” “당신이 만약 진정으로 민주주의를 신봉한다면, 다른 여러 가지 권위(자본, 전문지식, 직업정치인 등)와 시장기제를 전적으로 배제할 수 없겠지만, 그럼에도 민주주의가 가장 우위에 서고 지배적이며 가장 중요한 순간에 결정적인 자원배분의 원칙으로 작동하는 시스템을 만드는 … 것을 필요로 할 것이다.”(지주형)

: 5:56 pm: bluemosesErudition

0. 가설을 폐기한다. ‘자아를 반성케 하는 자아’는 영혼이 아니다. 그것은 의식화된 자아일 뿐이다. 의식화는 Spirit와 Body를 경유하여 Heart에 내면화된 ‘닫힌’ 의식을 ‘열린’ 의식으로 변경하는 것으로, 工夫의 발단이다. 서구철학과 달리 동양사상은 진리 탐구 보다는 자연의 이치를 선험적으로 가정하고 그것을 체화하는 工夫를 목적으로 한다. 이는 단점이자 장점이다. 외면에 대한 인식이 미약하나, 내면에 관한 고찰이 탁월하다.

1. <朱子의 工夫論 硏究> 모임 참석동기는, 일단의 문제의식에서 비롯되었다: 1) ‘수술 중 각성’이 工夫를 통해 극복될 수 있는가? 2) 工夫는 어떻게 하는 것인가? 3) 工夫의 목적인 ‘마음의 도야’는 어떠한 과정을 겪는가? 4) 工夫는 超人이 되기를 요구하는 것은 아닌가? 혹, 그렇다면 克己란 私事化가 아닌가? 5) 內聖과 [개인에서 사회로 나아가는] 外王 간의 유기적 연관은 존재하는가? 이는 제왕적 관점에서 修己의 道를 통해 治人의 德을 배양하는 것이 아닌가?

2. 朱子는 大學, 論語, 孟子, 中庸 순으로 四書를 접하도록 권하였다. 五經에 속한 禮記의 일부인 大學 - 대학은 明明德, 新民, 止於至善의 ‘三綱領’과 格物, 致知, 誠意, 正心, 修身, 齊家, 治國, 平天下의 ‘八條目’으로 이루어졌다 - 을 朱子는 왜 그토록 중시하였는가? 양명학이 心卽理에 입각하여 ‘우리 마음은 이미 참된 것을 알고 있으니 그것을 행하자’며 知를 강조한 반면, 주자학은 性卽理에 근간하여 마음의 구성을 살피고 居敬窮理를 통하여 天理를 내화하여 그것을 人慾에 구애됨 없이 외화하는 것을 추구한다.

3. 性體情用에 토대하여 마음의 구성을 다음과 같이 임의적으로 정리한다: 心(統性情)은 理와 氣가 융합된 것으로, 理가 내화된 것을 性이라 하고, 性(本然之性 / 氣質之性)의 발현 양태를 情(道心 / 人心)이라 하며, 情은 궁극적으로 氣로서 외화된다. 理의 내화를 靈과 肉의 영향력 수용이라 한다면, 氣의 외화는 魂의 영향력 작용이라 할 수 있다. 내화[Pedagogy, 1차적 학습]와 외화[Andargogy, 2차적 학습]의 用 사이에는 體의 ‘工夫’가 존재하며, 그 수양의 도야에 따라 氣質之性이 약화되고 本然之性이 강화되어 人心이 아닌 道心을 추구하게 된다.

4. 양태의 상태는 未發과 已發의 두 가지로 대별할 수 있다. <論語>에 따르면 未發이 思慮未萌, 知覺不昧한 “寂然不動”을 의미하고, 已發은 “感而遂通”을 나타낸다. 延平의 문하생 시절 未發의 氣象을 體認하는 工夫를 靜的이라 비판하였던 朱子는 언제나 이미 마음의 상태가 已發이라 간주하고, 그것으로부터 未發의 (本體 내지) 性의 단서를 살펴서 보존하는 工夫로 전향한다. 그러나 부단한 운동, 즉 已發만을 마음의 상태로 인식하는 전제에 무리가 있음을 깨닫고 未發을 ‘마음 공부’의 영역으로 복원한다. 朱子는 <中庸>의 “喜怒愛樂未發謂之中, 發而皆中節謂之和”에서 착안하여 已發을 중시한 전기의 입장을 中和舊說이라 하고, 未發과 已發을 모두 수긍한 후기의 사상을 中和新說이라 하였다.

5. 工夫는 어떻게 하는 것인가. 朱子는 敬을 근간으로 知와 行의 수양을 제기하였다. 知와 行은 先知後行이나 行重知輕이기에 竝進하며 互發한다.우선 敬 工夫는 心의 主宰性에 의거하여 本心을 유지함으로써 항시 理를 드러낼 수 있는 마음의 상태를 갖추는 常惺惺의 태도를 뜻한다. 풀어 말하면, 事이 없을 때는 고요함 속에서 마음의 理를 체인하고, 事이 있을 때는 그것에 집중함으로써 마음의 理를 발현하는, 일종의 각성이다. 다음으로 知 工夫는 格物致知를 통해 萬事萬物을 궁리하여 궁극적으로 마음의 體用를 변혁(Regime Change)하는 切己이다. 格物이 대상의 관점에서 事物의 理가 궁구되는 현상을 일컫는다면, 致知는 주체의 관점에서 마음의 理가 구축되는 현상을 지칭하는데, 範例로서 讀書法을 들 수 있다. 마지막으로 行 工夫는 格物致知에 의해 인식한 理를 일상에 구현하는 것으로 誠意, 正心, 修身, 齊家, 治國, 平天下로 확장된다. 이는 소외되지 않는 제3의 학습으로서 工夫가 지향하는 爲己之學에 관해 재고하도록 한다. 그것은 전체로서의 진리를 포용함으로써 正體 즉 자아의 경계를 세상의 경계 즉 世界로까지 확대하는 것이다.

February 2, 2010: 9:22 pm: bluemosesErudition

“‘스타’라는 것은요, 그 사람이 스타가 아닙니다. 관객과 그 사람 사이에 스타가 존재하는 거죠. 즉, 관객은 그 사람을 스타라는 프리즘을 통해서 보기 때문에 스타라 생각하는겁니다. 그 사람은 그냥 사람인거죠. 근데 자기 자체가 스타라고 착각하는 사람이 꽤 돼요.”(박중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