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chive for June, 2010

June 23, 2010: 3:21 am: bluemosesErudition

“중남미의 가장 똑똑하고 야심적인 장교들이 어떻게 선 아니면 악이라는 경직된 세계관을 주입받고 소비사회와 ‘미국의 꿈’에 유혹당하며 마약과 ‘반란’에 맞선 전쟁에서 미국의 대리인으로 편입되는지를” 만주 신경군관학교 커리큘럼과 비교 검토할 것.

: 2:59 am: bluemosesErudition

‘간증과 간증을 비교하지 말고, 간증과 자신을 견주어라.’ 지금이 그러한 시기다.

June 22, 2010: 5:20 pm: bluemosesErudition

“안아주는 환경(holding environment)을 조성하는 충분히 좋은 어머니(A good enough mother)라는 개념은 위니콧(D. Winnicott)이 고안한 것으로 단순히 유아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것이 아니라 선택적으로 좌절시키는 어머니를 말한다. 대개의 정신장애는 안아주는 환경의 결핍에 기인한다. 다시 말해, ‘충분히 좋은 어머니’의 부재는 ‘안아주는 환경’의 결핍과 ‘나를 나무랄 때도 있지만 그래도 어머니는 좋은 분이야’라는 통합된 대상 항구성의 내재화의 결여를 유발하여, 성인의 정신병리 및 성격장애의 원인이 된다.”

“유아의 성격 발달은 크게 분화(Differentiation), 통합(Integration), 함입(Introjection)의 세 가지 과정으로 구성된다. 분화(Differentiation)는 유아가 어머니와 분리된 존재라는 사실을 자각하는 것으로, 건강한 분화란 부모와 다른 ‘독특한’ 개인으로 유아가 개별화되는 것을 말한다. 경계성 인격 장애는 발달 과정 중 세 살까지의 분리 개별화 과정에서 아이가 과도한 좌절이나 일관되지 못한 돌봄, 혹은 아이의 자율성을 침해할 정도의 과도한 보호와 간섭을 받을 경우에 생기기 쉽다. 특히 생후 18~24개월까지의 기간에 문제가 생기면 그 확률이 더 커진다. 왜냐하면 이때 아이가 익혀야 할 것은 세상을 탐험하다가 돌아왔을 때 어머니가 거기에 있음을 확인하고 안심할 수 있는 능력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으면 아이는 성인이 되어서도 옆에 누가 없으면 유난히 불안해하게 된다. 통합(Integration)은 유아가 어머니의 상반된 모습을 분열된 인격이 아닌 통합된 자아의 양면성으로 이해하는 것을 말한다. 다시 말하자면, 발달 초기 유아는 자신이 좋은(수용하는) 어머니와 또 다른 나쁜(거부하는) 어머니를 가졌다고 생각하는데, 이러한 두 어머니를 하나의 존재로 인식하는 것이다. 이 과정을 건강하게 거치면 성인이 되어서 누군가 일시적으로 화를 낼 때도 타자의 나쁜 점과 더불어 좋은 점을 볼 수 있다. 어떤 어머니는 일관되지 양육 태도로 인해 ‘좋은 엄마’와 ‘나쁜 엄마’를 도저히 한 인격으로 생각 할 수 없도록 만든다. 이런 관계 속에서 대상 항구성을 정립하지 못한 유아는 성인이 되어 주변 사람들을 완전히 이상화하나 수틀리면 완전히 경멸해 버리는 태도를 보이는데 이것이 바로 ‘경계성 인격 장애’의 행동 특성이다. 함입(Introjection)은 수용되거나 거부된 기억이 아동의 마음속에 내재화되는 것을 말한다. 수용 기억이 함입된 자는 악조건에 처해도 자존감을 견지할 수 있지만, 거부 기억이 함입된 자는 악조건에 처할 때 열등감에 함몰될 여지가 있다.”

* 육아의 관건은 온전한 기준을 일관되게 고수하는 ‘충분히 좋은 어머니’(A good enough mother)의 인격이다. 유아교육과 강의 계획을 궁리하던 중 “부모교육”의 필요성과 중요성을 자각하였다. 예전 軍에서 모 대위가 소개한 ‘대상관계이론’이 떠올라 자료를 검색하다 <대상관계이론적 관점에서 본 코메니우스의 교육사상>을 발견하였다. 2010-2학기 교육심리학 수업은 ‘부모교육’, ‘대상관계이론’, ‘코메니우스’를 중심으로 진행한다.

: 3:54 pm: bluemosesErudition

한국전쟁 60주년 특별 국제학술회의

: 2:02 pm: bluemosesErudition

피타고라스는 원 내부에 자신이 고안한 별의 형상을 그려 넣고 그 기하학적 비례를 탐구하여 다음과 같은 ‘황금비율’을 발견했다. “a:b=b:c(*c=a+b)”이기에 “b²=a²+ab”이고, 이는 “b²-ab-a²=0″으로 나타낼 수 있다. 여기에 a=1을 대입하면 상술한 등식은 “x²-x-1=0″으로 재진술할 수 있으며, 근의 공식에 따라 x의 값이 1.61803…임을 확인할 수 있다. 고로 a:b=b:c는 1:1.618이라 할 수 있다.

June 20, 2010: 3:29 am: bluemosesErudition

0. “이렇게 살 수도 없고 이렇게 죽을 수도 없을 때 서른 살은 온다.”

1.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마11:29)

2.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4:11~13)

* 바울은 예수에게서 자족하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다. 그로 인해 성령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었다. 자족은 온유와 겸손을 뜻한다. 즉, 요란한 자기의지의 부인이다. 자기를 부인한 자는 성령의 인도에 순종하여 예수의 사명을 걸머쥐고

June 19, 2010: 8:34 pm: bluemosesErudition

Das Wahre ist das Ganze. Das Ganze aber ist nur das durch seine Entwicklung sich vollendende Wesen. Es ist von dem absoluten zu sagen, daß es wesentlich Resultat, dass es erst am Ende das ist, was es in Wahrheit ist und hierin eben besteht seine Natur, Wirkliches, Subjekt, oder Sichselbstwerden zu sein.

진리는 전체이다. 그러나 전체는 자신의 전개를 통해서 완성된 본질일 뿐이다. 절대적인 것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그것은 본질적으로 성과라는 것, 그것은 종국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진리에 있는 것이라는 것. 그리고 여기에 바로 절대적인 것의 본성은 현실적인 것, 주체 또는 자기형성이라는 것이 성립한다.

: 8:24 pm: bluemosesErudition

“천황이 근대 일본인들의 가슴 속에 자리잡는 과정은 일본이 근대국민국가를 만들어내기 위해 시도했던 전략들이 펼쳐진 과정이기도 하였다. 우리가 여기서 살펴본 것은 후지타 쇼조가 ‘천황제란 무엇인가’에서 이른바 ‘대중공작’이라 불렀던 것, 즉 ‘천황제가 국민의 행동양식, 생활내용, 사유형식을 어떻게 포착하고 있는가’에 해당하는 것이다. 이것은 패전 이후에도 일본인들의 심성에 살아남았다. 물론 현대의 일본국민은 ‘천황과 그 가족을 호기심 어린 응시의 대상으로 삼고 그들을 연예인 취급하여 황실의 뉴스와 이미지를 소비하고 있다.’”

“열혈 극우 문인 미시마 유키오(三島由紀夫)는 이러한 상황을 ‘주간지 천황제(週刊誌 天皇制)’라 비난하면서 ‘이른바 문화개념으로서의 천황의 부활을 통한 국민문화의 소생’을 부르짖기도 하였다.”

: 8:11 pm: bluemosesErudition

기간테스의 모방자(亞流), 혹은 난장이

: 6:24 pm: bluemosesErudition

“나는 파시즘을 기본적으로 보나파르티즘의 한 형태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것을 <브뤼메르 18일>에서 묘사된 것 같은 동적 과정으로서 보는 것이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것은 불모의 정의를 쌓아가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 예를 들어, 엥겔스는 보나파르티즘을 다음과 같이 정의했다. 근대사회에서 발생하는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트의 대립에서 힘의 균형상태가 생기고, 양자 모두가 국가권력을 장악하는 데에 이르지 못하는 상태가 발생했을 때, 일시적으로 양자에 대해 일정한 자립성을 가진 국가권력이 성립한다. 보나파르티즘은 그렇게 해서 성립된 독재권 권력의 성격을 가리킨다. 마르크스주의자는 보나파르티즘에 관해 <브뤼메르 18일>을 제대로 읽지 않고, 이 정의에 따라 생각해왔다. 그러나 그저 계급적 균형이라면 절대주의 왕권도 봉건적 세력과 부르주아와의 균형으로 성립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 때문에 단지 계급적인 대립이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로 변한 것이라고 해서는 보나파르티즘의 특징을 이해할 수 없다. 절대주의 왕권과 그것을 타도한 후 형성된 부르주아 국가 안에서 성립한 보나파르티즘과의 차이는 무엇보다도 계급적 균형이 어떻게 달성되었는가 하는 과정에 있다. 말할 것도 없이 후자에서 그것은 보통 선거권에 의한 대의제, 그리고 정치적 당파들의 연합을 통해서 실현되었다. 그러므로 이것들을 파악하지 않으면, 보나파르티즘만이 아니라 그 후의 파시즘 같은 대항혁명에 대해서도 이해할 수 없게 된다.”

“<브뤼메르 18일>은 예를 들어 일본의 1930년대 파시즘을 파악하기 위해서도 불가결한 텍스트이다. 대체로 파시즘론은 독일 혹은 이탈리아의 경험을 모델로 하고 있는데, 그것들이 일본의 경우에 반드시 타당한 것은 아니다. 그 결과 일본에는 파시즘은 없었다는 등의 어리석은 주장조차 상당한 설득력을 가질 정도다. 그러나 1930년대 선진자본주의 여러 국가에서 생겨난 사태를 파시즘이라는 개념만으로 생각하는 것은 무리다. 이 사태는 우선 러시아 혁명에 대한 대항혁명이다. 즉 그것 자체가 어느 정도 사회주의적이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대항혁명 운동은 30년대 대불황에 의해 박차가 가해졌다. 예를 들어 1930년대 아메리카합중국에서는 모든 당파나 계급을 전부 대표하여 전쟁정책을 추진한 대통령(루즈벨트)이 출현했다.” 그렇다면 파시즘을 무엇이라 규정해야 하는가. 그것은 ‘보수 체제의 위기에 따른 좌파의 약진 속에 반동적으로 대두되는 우파 혁명의 리더십’이 아닌가.